“남편은 이미 유기농을 실천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전여농 활동을 마친 뒤에야 적극적으로 함께 했어요. 지금이야 친환경농법이나 유기농법이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개척자나 다름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전남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에 사는 이정옥 <행복한 고구마>대표의 말이다.
5만 평 농지에 연 매출 5억 원이 족히 넘는 유한회사의 부부 공동 CEO 김용주, 이정옥 씨.
이 씨는 구황작물 정도쯤으로 여겨졌던 고구마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유능한 매니저쯤 된다.



운명 같은 남편 만나, 투사로 변신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이 씨는 목포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다. 딸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지닌 엄마의 희망에 따라 고향에 내려간 이 씨는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를 다니다가 3개월 만에 운명과도 같은 사랑의 감정을 전해준 김용주 씨를 만나게 되었다.

“한 마을에서 1년 선배인 남편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지요. 남편이 워낙 농사짓는 것을 좋아해서, 저도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게 된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해서 저도 기독교농민회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구요.”
제 아무리 애인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은 처녀가 그 어렵다는 농사를 업으로 삼게 된 것이 쉽지 않은 결심이라는 추론은 뻔하다.

남편은 기독교농민회 교육을 받으면서 “미국 놈들은 나쁘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곤 했다.
이 씨는 “어이구, 당신은 무슨 그런 교육을 받아요?”하며 반대했다. 그러던 이 씨가 마을의 을류농지세 싸움에서 일어난 부당한 군의 처사에 자극을 받아 애를 업고 이화여대에서 하는 농민교육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이 씨는 남편의 뒤를 이어 농민운동가로 변신한다.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이 씨의 느긋한 웃음 뒤엔 젊은 시절 용감하고 당찬 모습의 흔적이 배어난다.

“1980년 광주항쟁 때 함평고구마사건 기념대회에 참석한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가 25일 시민군의 무기교환 때 나왔어요. 머리를 쇠방망이로 맞았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31사단에 끌려갔다가 통합병원으로 옮겨졌지요. 남편이 다시 살아 돌아온 날엔 온 동네에서 잔치를 벌였답니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또 한 차례 곤욕을 치렀는데 목포교도소에서 70일간 구류를 살았습니다. 저에게도 남편에게도 1980년대는 그렇게 투사로 살게 했습니다.”
아이를 셋이나 낳은 농촌 아줌마가 의식화 되어가는 과정이 눈에 그려진다.

싸움도 농사도 열정적으로

“1988년 고추파동 싸움... 큼직한 싸움에 ‘이념’같은 그런 거창한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을 교육을 많이 다녔는데, 사람들은 폭삭 내려앉은 고추가격을 800원에서 2,000원으로 올려 받을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주도한 것뿐인데, 갑자기 제가 투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전국단위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고, 전농 여성위원회와 여성위원장, 그리고 전국여농성농민회 초대회장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농민운동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여전사’였던 이 씨가 최첨단 농업분야인 유기농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

“1985년부터 남편이 유기농을 시작하자고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도 남편은 퇴비 만들기부터 깻묵액비나 청초액비를 만들어 유기농을 시작했지요. 제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9년에 농약중독이 되고나서였습니다. 제가 여농 활동을 마치고 10년간 유기농에 몰두한 계기가 됐지요. 점차 유기농에 자신이 생기면서 농업도 이제는 소비자에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농민운동에 뛰어들게 된 사연도, 그리고 유기농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이 늘 행복해 하며 하기에 덩달아 하게 된 것이다.
결혼 초 이 씨 부부는 양파, 마늘, 콩, 고구마를 키웠다. 특히 마늘을 중점적으로 재배했는데 가격변동이 심했다. 마늘 가격폭락이 3년째 지속되자 그때까지 믿고 재배했던 마늘을 작목 전환해야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고구마로 작목 전환을 하고 나서 어분, 깻묵, 쌀겨, 숯 등 나름의 노하우로 비율을 맞춘 자가 발효퇴비도 만들었다.
유기질 퇴비를 먹고 자란 고구마는 맛있고 안전하여 소비자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재배면적도 꾸준히 넓혀 갈 수 있었다.

<행복한 고구마>의 재배면적은 주변 다섯 유기농가의 면적까지 합하면 20만 평이 넘는다. 맨 처음 시작할 때는 같이 하자는 말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점차 같이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마을 전체가 친환경마을이 되었다.

“오늘의 <행복한 고구마>에 감사해야 할 분이 두 분이 있는데 김재식 전 전남도지사와 남상도 목사님입니다. 김 전 지사님은 일본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새 고구마 품종 <수>를 남상도 목사님을 통해 전해주셨는데, 마침 먼저 하고 있던 품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대체할 수 있는 종자가 필요할 때였지요.”

<행복한 고구마>브랜드로 탄생하다

이 씨는 올 봄에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했다. <행복한 고구마>라는 브랜드 이름을 사용한 유한회사다. 생산, 유통, 가공, 문화, 체험을 점차 통합해서 농업이 갖는 기능을 다양화 할 생각이란다.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브랜드 컨설팅을 하였고 정보화구축시스템을 진행 중이다.

“우리 농장에서 머물게 되면 편안함을 느끼고 마음과 몸이 치유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 궁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자원을 활용할 생각입니다. 먼저, 황토집을 지어보았어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래야 농민도 맘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2004년엔 자체적으로 고구마 축제도 열었다. 농장 방문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초청해 ‘작은음악회’를 연 것이다.
고구마 축제로 마을의 신명과 흥을 돋우고, 친환경 유기인증 고구마 생산단지임을 과시하는 1석 2조의 효과를 얻었던 이 씨는 2회 축제는 마을 축제로 확장시켰다. 올 겨울에는 군고구마 축제로 열 계획이라니... 벌써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돈다.



이정옥 대표 성공 5계명

1. 스스로 행복한 고구마가 돼라
좋은 환경, 재료, 정성스런 손길이 만들어내는 ‘행복한 고구마’라는 것을 명심한다.
2. 나는 프로다
농업이 갖는 여러 가지(생산, 유통, 마케팅, 경영, 예술, 건강, 과학, 영성)의미를 농장운영에 접목하여 소비자와 고구마가 행복하게 한다.
3. 다시 태어나도 나는 농사를 짓는다
못 다 한 일들이 자식으로 이어져서 더 깊고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 아는 것이 힘이다
농업에서도 아는 것이 힘이다. 늘 공부하고, 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5. 나는 어머니다
아이들에게도 고구마에게도 소비자들에게도 어머니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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