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슬퍼도 참고 또 참던 캔디 “짜증나”

‘예쁜 척, 약한 척’ 캔디 대신 억척스러울 만큼 생활력 강한 캔디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청순가련한 외모로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는 기존의 캔디는 요즘 드라마에 온데간데없다. 생계를 위해 상사의 눈치와 비위를 맞춰야 하는 직장인의 애환과 취업에 목숨 건 88만원세대의 고군분투가 여주인공을 통해 고스란히 펼쳐진다.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캔디 캐릭터의 변모는 녹록지 않은 요즘 시대상을 반영함으로써 공감과 재미를 돋운다.

요즘 드라마에 등장하는 캔디형 여주인공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신선하다.
뽀글 파마머리, 두꺼운 뿔테 안경 등 촌스러운 외모의 미운오리 새끼에서 회를 거듭하며 화려한 백조로 태어나는 모습은 그간 봐 왔던 캔디와 다를 바 없지만 요즘 여주인공들은 20〜30대 여성의 현실적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뽀글 파마머리를 풀고 두꺼운 뿔테안경을 벗는 순간 시청자들은 희열을 느낀다.


KBS ‘우리집 여자들’에서 고은님(정은채 분)은 아르바이트로 먹고사는 88만원세대의 슬픈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60세가 훌쩍 넘은 할머니, 증조할머니와 함께 사는 고은님은 돈벌어서 할머니 택시 한대 뽑아주는 것이 소원인 억척녀로 불량재벌 이세인(제이 분)과 유기농기업 풀빛사랑의 밑바닥부터 일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SBS ‘여인의 향기’ 이연재(김선아 분)는 평균치를 밑도는 학력, 집안, 나이도 모자라 시한부 선고까지 얻었다.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된 연재는 직장상사와 동료들의 차별과 무시에도 잘릴까봐 두려워 참아 왔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에야 직장상사 면전에 사직서를 내던진다.
MBC ‘애정만만세’ 강재미(이보영 분)는 예기치 않은 남편의 배신으로 이혼하지만 꿋꿋하게 현실에 맞선다.

이혼가정의 자녀로 자라 누구보다 가정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녀에게 이혼은 청천벽력이자 행복하다고 여겼던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를 품는 계기로 작용한다.
또 MBC의 ‘당신 참 예쁘다’의 고유랑(윤세아 분)은 사랑했던 연인이 유부남이었고, 임신까지 해 버림받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다. 이후 외식업체 손자인 변강수(현우성 분)를 만나 아이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최근 캔디는 시대상을 반영하며 공감을 얻고 있다. 그동안 브라운관을 지배했던 캔디형 여주인공은 숱한 난관에도 고통을 속으로 삭이거나 남자 주인공의 힘을 빌려 극복하는 판타지성 캔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캔디는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해 씩씩한 캔디로의 진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드라마 속 캔디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고 사랑을 표현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최근 종영한 MBC ‘반짝반짝 빛나는’의 한정원(김현주 분) 캐릭터는 방송 초반 논란에 휩싸였을 만큼 현실적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정원이 뒤바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변화에 대한 혼란을 드러낸 과정이 가난한 친부모를 거부하는 투정처럼 비쳐졌던 것이다. 극중 정원은 갑작스런 몰락과 맞물려 남자집안 반대에 부딪혀 사랑을 지키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지만 남자 어머니에 먼저 다가가는 등 사랑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MBC ‘최고의 사랑’에서는 구애정(공효진 분)이 한 때 잘나갔던 아이돌에서 최고의 스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장면이 그려졌다.

SBS ‘여인의 향기’ 지난 방송에서는 연재가 재벌녀 세경(서효림 분)이 반지소송사건에 대해 사과 대신 건넨 돈봉투를 받아 병원에 기부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돈봉투와 자존심 모두를 택한 연재의 행동은 현실적인 공감과 함께 기존 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신선함을 주기도 했다.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캔디 캐릭터는 시청자에게 통쾌함을 안긴다. 강자에게 당하기만 했던 남성에게 의존했던 기존의 캔디에 답답함을 느꼈던 시청자들은 요즘 캔디의 당찬 면모에 박수치고 있다.
지고지순하거나 발랄한 여자 주인공은 분명 예전이라면 시청자들의 무한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상황 판단이나 눈치 없이 여성스럽기만 한 캐릭터는 ‘민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지난 해 KBS 2TV ‘추노’에서 언년(이다해 분)이 직면했던 민폐 논란과도 맥을 같이한다. 타고난 미모와 단아한 성품까지 지닌 언년으로 인해 남자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면서 일부 시청자들의 짜증을 유발한 바 있다.

이는 여성스러움이 더 이상 미덕(美德)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자기 주체성이 결여된 캔디 캐릭터는 시청자의 외면을 받게 마련이다. 최근에는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캔디 대신 자신에 닥친 상황을 주시하고 빠른 판단력으로 상황을 극복하는 캔디 캐릭터가 시청자의 호응을 얻고 있다. 때로는 억척스러움으로 비칠 수 있는 위기대처능력이 시청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방식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으로부터 일방적인 도움만 받아 왔던 캔디녀가 역으로 남자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고, 변화를 주는 캐릭터로 그려지면서 남녀시청자 모두에게 어필하기도 한다.

이러한 캔디녀가 오랜세월동안 식상한 소재임에도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받는 여자 주인공은 대부분 캔디였고, 캔디가 일과 사랑에서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가 스토리의 근간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새로울 것 없는 캔디 드라마가 계속 만들어지고 시청자가 열광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긍정 마인드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캔디 이야기가 시청자에게 쾌감과 대리만족의 환상을 안기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최근 고용불안, 물가인상 등 팍팍한 서민들의 삶을 닮은 캔디 캐릭터가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는 도피처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캔디의 성공기는 시청자에게 익숙한 소재이면서 안전하게 시청률을 담보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선호될 수밖에 없는 소재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또 캔디의 밑바닥 탈출기는 드라마틱한 반전상황을 통해 시청자의 시선을 끌기 용이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면 캔디형 캐릭터가 주로 여자 주인공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캔디 캐릭터가 주로 다뤄지는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 남자 주인공의 성공기가 선 굵은 시대물을 통해 조명된다면 캔디형 캐릭터는 밝고 통통 튀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타깃 시청층의 성향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20〜30대 여성 시청자가 즐겨보는 로맨틱 코미디에 가난한 남자와 부유한 여자의 사랑을 그린다는 것은 모험이다. 남자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드라마는 ‘광개토태왕’ ‘주몽’ 등 대하드라마에 한정되어 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남자 주인공을 내세운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별은 내 가슴에’를 비롯해 가난한 캔디가 재벌남의 구제를 받는 구도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드라마에서 다뤄져 왔지만 비슷한 틀에서 새로운 설정을 고민하다 보니 현실을 반영한 캐릭터가 나온 것 같다. 몰입하기 쉬운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는 여전히 캔디지만 너무 뻔한 관습에 기댔거나 현실성이 결여된 캔디는 시청자로부터 공감을 얻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