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통일 후 신항로 개척…유럽 최강국으로 우뚝

  
 
  
 
1492년, 유럽 대륙에서도 가장 큰 나라로 손꼽히는 스페인(에스파냐)은 아라곤, 카스티야와 이슬람세력에 700년 가까이 지배를 받고 있던 그라나다 등 여러 나라로 분립돼 있었다.

이 나라는 특이하게도 부부가 공동으로 다스렸는데 남편인 페르디난도 왕과 아내 이사벨라 여왕이었다. 부부는 동등한 왕으로서 서로 우열을 따지지 않고 스페인을 사이좋게 다스렸다. 철저한 카톨릭 신자였던 부부 왕은 양자 간의 애정은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이며 스페인을 당대 유럽의 최강국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1492년에 그들은 전(全) 스페인을 통합했고, 무엇보다도 영원히 깰 수 없을 것 같았던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지중해를 다시 유럽인들의 품으로 돌려놓는 교두보를 마련한다.

새로운 땅 아메리카
한껏 성취감에 부풀어 있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한 뱃놈이 찾아왔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해 스페인의 영토를 늘려주고 특히 당시 유럽인들에게 낙원으로 알려진 인도로 가서 많은 보물을 가져 와 여왕께 바칠 터이니 항해비용을 대달라는 당돌한 사람이었다.

“가는 곳마다 여왕폐하의 위대한 깃발을 꽂고 돌아오겠나이다.”
허풍 끼가 없어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여왕은 이 잘생기고 저돌적인 탐험가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여왕폐하. 저 자는 포루투갈의 엔리케 왕자에게도 항해 비용을 대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입니다. 엔리케 왕자는 신중한 사람이라서 저자의 청을 물리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 몽상가 같은 녀석에게 돈을 대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여왕은 생각을 거듭했다. 이웃 포루투갈은 항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며 식민지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이제 나라 안의 복잡한 일들은 거의 해결해 놓았으니 우리도 눈을 먼 바다바깥의 새로운 세상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나!”

여왕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당돌한 모험가를 돕기로 했다. 그는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였다.
여왕은 콜롬버스에게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 등 세척의 특급범선과 승무원들, 특수인력과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120명의 죄수들을 내주었다.

1492년 8월 3일, 이 미심쩍은 모험가는 이사벨라 여왕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돛을 올렸다.
그해 가을, 콜롬버스는 지금의 미국과 멕시코 만 사이에 있는 바하마 군도(群島)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가 인도인줄 착각하고 그곳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이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콜롬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는다.

그 첫발 이후 수천, 수 만 년 동안 그들끼리의 번영과 평안을 누리던 남,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됐다.
콜롬버스의 아메리카대륙 진출은 15세기 이후 신대륙에서의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바꿔버리고 만다.
미국과 카나다 등 북미에서는 스페인의 세력이 약해져 영국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지만 멕시코서부터 바하마, 쿠바, 파나마, 칠레, 볼리비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베네주웰라, 페루 등 중남미의 거의 모든 국가가 수 백년 간 스페인의 식민지 생활을 했거나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남미대륙에서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스페인어를 쓴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콜롬버스의 신대륙 진출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이 어떠한 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엄청난 인류사적 사건의 중심에는 이사벨라라는 여걸의 판단과 모험심이 작용했던 것이다.

생존…그리고 정략결혼
이사벨라는 어린 시절을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네 나라로 갈라져 있던 스페인 카스티야의 왕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이복 오빠인 헨리4세가 왕위에 오르자 이사벨라의 목숨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다.

헨리4세와 반대파 간의 암투가 격화되면서 사랑하는 남동생 알폰소가 독살당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어린 이사벨라는 참고, 견디고, 현명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힘이 될 만한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사람을 만들었다.

그녀는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한 궁중 생활 속에서 아들이 없던 헨리4세의 후계자로 공인받는데 성공한다. 그 다음 그녀가 추진한 것은 적대국이었던 아라곤 왕국의 왕세자 페르디난도와의 결혼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라곤과 우리 카스티야는 적대국이지만 같은 핏줄이야. 장차 아라곤의 왕이 될 페르디난도와 결합해 나라를 통일하고 힘을 키우면 아무도 우리를 견제하지 못하겠지.’

당시 그녀의 일차적인 관심은 왕실의 암투를 이겨내고 생존하는 것뿐이었다.
헨리4세는 이사벨라가 아라곤의 왕세자와 결혼(1469년)하자 이를 트집 잡았다.

“적국인 아라곤의 왕자와 붙어서 나라를 말아 먹으려는 게로군. 저따위 반역자에게 어떻게 왕위를 물려준단 말인가? 이사벨라에게 왕위계승을 취소하고 대신 내 딸에게 왕위계승권을 물려주기로 한다.”
이사벨라는 일단 살아야했으므로 바짝 엎드려 조신하게 행동했다.
헨리4세는 그로부터 5년 후 숨을 거뒀다. 왕이 숨지자 카스티야 정국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원래 왕위를 계승키로 한 이사벨라 공주와 나중에 번복돼 헨리 4세에 의해 왕위를 물려받기로 한 헨리4세의 딸. 이 둘을 비호하는 양 세력의 치열한 암투가 시작됐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사람들을 착실히 심어놓았던 이사벨라의 완승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카스티야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곧이어 아라곤 왕위에 오른 남편 페르디난도. 스페인에서 가장 크고 힘 센 두 나라의 왕위에 오른 부부는 사실상 스페인을 통일하고, 남쪽에서 이슬람 지배세력 하에서 신음하던 그라나다까지 병합함으로써 강력한 스페인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의 빛나는 16세기. 바다를 통해 세계를 주름잡던 이른바 ‘스페인 무적함대’의 시대다.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는 애정보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정략결혼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수완은 놀라웠다.

영광의 스페인시대
그들은 통일 이후에 공동 왕으로 통치할 것을 약속하고 권력 때문에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부부는 1480년부터 종교개혁을 단행해 스페인 땅에서 미신을 타파하고 무슬림을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땅에 살던 유태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기도 했다.

신대륙 진출에 영향을 미친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사검은 1492년의 그라나다 함락이다. 여왕과 남편은 711년부터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와 스페인을 지배했던 무슬림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무려 700년간의 지배. 스페인 남부는 사실상 무슬림 제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라나다 병합은 유럽대륙의 곡창지대 이베리아 반도를 무슬림들의 손에서 유럽인들의 것으로 가져왔다. 이를 ‘레콩키스타’라고 하는데 ‘잃은 땅의 회복(失地回復)’이라는 뜻이다.
이 광활한 땅의 확보는 향후 유럽의 발전과 번영에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다.

무슬림을 몰아냈으나 강력한 오스만투르크(터키) 때문에 아직 지중해는 무슬림들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강력한 스페인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해양으로의 진출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사벨라는 어차피 터키 때문에 막혀있는 지중해를 포기하고 멀리 서쪽의 대서양으로 눈을 돌렸다. ‘저 망망대해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를 점령하는 자만이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콜롬버스가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여왕의 베팅은 성공했고 이것이 세계사를 바꿔 놓았다.

이사벨라는 1504년 5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아마도 스페인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인 아메리카대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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