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들의 ‘두뇌’요 ‘사령관’이었던 진정한 여제(女帝)

  
 
  
 
(전편 줄거리)
서기 1227년 대정복자 칭기스칸이 원정길에서 사망하자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반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제국 몽골은 후계자 문제로 분열 양상에 접어든다.
칭기스칸의 세 번 째 아들 오고타이가 대칸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일찍부터 쾌락에 빠져있던 그는 유난히 술과 여자를 탐닉했다.

그는 아버지가 극진히 사랑했던 막내 톨루이를 견제해 중국 원정길에 교묘한 방법으로 동생을 독살한다. 이때 톨루이의 아내 ‘소르칵타니’는 오고타이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네 명의 아들들을 위해 잠자코 때를 기다리기로 한다.

오고타이는 원정에서 돌아와 소르칵타니를 자신의 아들인 구육과 결혼시켜 그녀를 자기 집 안사람으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녀의 군사와 재산을 자신의 아들들 것으로 편입시키는 등 소르칵타니를 견제해 나갔다.
소르칵타니는 이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세계 제국 몽골을 지배하는 안주인이 됐던 것일까?

오고타이의 죽음
오고타이는 늘 술에 절어 살았다. 그의 아내들 중 가장 현명하고 깐깐한 아내 ‘투레게네’는 오고타이가 술에 취해 정무를 볼 수 없을 때마다 ‘똑 부러지게’ 일들을 처리해 내곤 했다. 오고타이는 점차 제국의 주요결정 사항들을 투레게네에 맡기게 된다.

소르칵타니는 “투레게네야 말로 여인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 중의 하나지. 그러나 남자들 못지 않은 야심과 뜻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냉정함을 조심해야 해! 우리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났다가는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칭기스칸이 죽기 전 그의 아들, 손자들은 모두 몽골의 지휘관으로서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며 전장에서 지냈기 때문에 남자들이 없는 제국 내의 복잡한 행정은 대부분 칭기스칸의 며느리들이 처리했다. 그 거대한 제국의 방대한 업무를 처리해 낸 경험이 있는 칭기스칸 가의 여인들은 그 방면에 있어서는 남편들을 훨씬 능가했다. 특히 오고타이의 아내 투레게네의 재능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1241년 오고타이는 방탕한 생활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나는 이제 얼마 안 가 죽을 것 같다. 내가 죽으면 당분간은 아내 투레게네가 나라를 다스리라. 공식 섭정으로 인정하겠다.”
오고타이에 의해 섭정이 된 투레게네는 몽골의 대칸 선출을 위해 ‘쿠릴타이’(몽골의 전통적인 회의 방법 모든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쿠릴타이를 통해 결정됐다. 심지어 왕위 계승권까지도)를 소집했다.

구육, 대칸에 오르다
오고타이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했다.
“구육 저 녀석은 장자인데도 영~ 정이 안가고 신뢰가 안 가. 대칸의 자리를 물려주려면 손자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투레게네의 생각은 달랐다. “그따위 미친 소리 하려면 빨리 죽기나 했으면! 내가 섭정의 자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구육에게 대칸의 자리를 물려 줘야겠다.”
냉철한 투레게네도 자기가 낳은 자식 구육에게는 어리석을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구육은 누가 봐도 대칸의 재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섭정에 오르자 바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그러나 정족수를 채울 수가 없었다. 몽골의 핵심 귀족들에게 인심을 얻지 못한 구육은 대칸 자리에 오르는 꿈을 당분간 접어야했다. 투레게네는 아들이 대칸에 오르기까지 차분하고 치밀하게 ‘작업’을 해나갔다.

전임 장관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해임하며 자기 사람들을 요직에 심어 놓았다. 그녀는 뛰어난 판단력으로 그 큰 나라를 무리없이 이끌어냈다.

섭정 몇 년 후부터 투레게네는 이라크에서 데려 온 여종 ‘파티마’를 심복으로 삼아 그녀의 고자질을 들으며 그녀가 험담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냈다. 1246년 투레게네는 마침내 아들 구육을 대칸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투레게네 시대의 종말
구육은 어머니의 심복 파티마를 아주 미워했다. 구육은 대칸에 자리에 오른 뒤에도 계속되는 어머니의 간섭이 싫었다. 그는 파티마를 제거하기로 하고 파티마의 죄상을 낱낱이 보고받아 파티마를 소환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파티마를 감싸고 돌 뿐 소한에 불응하도록 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되풀이 된 어느 날, 구육은 파티마를 강제로 소환, 그녀의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을 꿰매고 담요에 말아 강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일로 인해 투레게네가 입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투레게네는 한동안 안 보이다가 몇 달 후 사망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후세의 연구자들은 구육 일파에 의한 살해로 간주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구육은 광분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소르칵타니의 모든 재산과 그 휘하의 군사를 접수해 버렸다. 과거에 자신이 대칸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도 모조리 처형했다. 그는 머나먼 서쪽에서 러시아 일대를 다스리던 사촌 ‘바투’를 치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바투를 제압하고 돌아오면 소르칵타니와 그녀의 아들들도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소르칵타니는 ‘이제 내가 움직일 때가 됐다’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과부들의 전쟁
소르칵타니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러시아 지방에 전령을 보내 “구육이 바투 황제를 기습하려 하니 단단히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직접 움직였다.
구육은 서방 원정길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인이 불분명한 죽음을 당했다. 건강했던 구육은 그때 나이 43세였고 대칸에 오른 지 불과 18개월 만이었다.

소르칵타니는 이제 구육의 미망인 ‘오굴’과 싸워야했다. 오굴은 죽은 남편 대신 섭정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소르칵타니는 자기 자식인 ‘뭉케’를 몽골의 대칸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멀리 ‘바투’와 손을 잡았다. 바투는 자신을 치러 오는 구육의 기습을 알려 줘 자기의 왕국을 구한 소르칵타니에게 기꺼이 협력했다.

1250년 바투는 텐샨 산맥 근처에서 뭉케를 몽골의 대칸으로 인정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그러나 오굴 일파는 이를 거부했다. 정족수를 채울 수 없었기에 뭉케의 대칸 등극은 실패했다. 소르칵타니는 여기서 기발한 작전을 감행한다. “위대한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칸으로 선출됐고, 죽어서 묻힌 몽골민족의 성지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할 것을 제안합니다.”

오굴 일파는 이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칭기스칸이 묻힌 성지에서 개최되는 쿠릴타이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원칙이 그들 집안에는 있었던 것이다. 칭기스칸의 종손 바투가 밀어주고 소르칵타니가 평생 인심을 쌓아 온 대다수의 대의원들은 뭉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소르칵타니의 맏아들 뭉케는 41세의 나이에 대 몽골제국의 4대 대칸에 오른다(1251년).

소르칵타니의 세상
칭기스칸과 그의 후손이 이루어 놓은 대부분의 영토와 권세, 영광이 이제 완전히 톨루이가로 옮겨왔다.
그녀는 서쪽의 바투와 잘 협력하면서 자신이 낳은 네 아들의 미래를 탄탄히 다져 놓았다. 첫째 아들 뭉케가 몽골의 대칸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막내 아들 ‘아릭 부케’가 몽골제국의 5대 대칸에 올랐다.

셋째 쿠빌라이는 중국에 ‘원나라’를 세워 황제에 올랐으며, 둘째 아들 페르시아(이란과 이라크 지역) 지방에 ‘일 칸국’을 세워 역시 대칸에 올라 중동 지역을 호령했다. 그녀의 직계 자식들이 터키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서 아시아와 남으로는 송나라를 점령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점령하며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형성했던 것이다. 소르칵타니는 죽을 때까지 이 네 아들의 ‘두뇌’이자 ‘사령관’ 역할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강력한 제국이 전쟁 포로 출신이었던 소르칵타니에 의해 움직였던 것이다. 소르칵타니는 13세기 중엽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 아니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기다릴 줄 알고, 사람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알고,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하는 지를, 움직일 때와 물러 설 때를 알았던 여인이다. 조용히 판단하고 나서야할 때는 번개처럼 과감히 움직였던 여인이다. 그러한 장점들이 그녀와 자식들을 ‘황금가족 중의 황금 가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유명한 학자 이븐 알 이브리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소르칵타니 같은 여자가 이 세상에 한 명만 더 있다면 나는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고 장담하겠다.”
1252년 2월 소르칵타니는 세상을 떠났다. 소르칵타니가 죽자 조언자가 없어진 몽골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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