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늦가을 비가 잦으며 날씨가 추워지는가 싶더니 오늘 아침엔 기어이 우박을 쏟아 놓고야 말았습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조금 다르다 싶어서 방문을 밀치자 콩알 같은 우박이 잠깐사이 마당을 하얗게 덮는 중이었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탄성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왔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순간 신선한 충격 같은 것이 잠깐 머리를 훑고 지나간 것이지요.

가을일을 끝낸 여유로움이 추운 줄도 모르고 마루에 앉아 한동안 밭을 바라보고 있게 합니다. 천육백 평 정도가 한 덩어리로 된 밭 중간의 푸른 마늘들을 뺀 나머지는 모두 말끔하게 정리되고 갈아엎어져서 엊그제 마지막으로 보리를 갈았습니다. 이곳은 시월 말 정도가 보리 심는 알맞은 때인데 조금 늦어져서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보리를 늦게 심으면 겨울에 얼어 죽기 쉽지만 지금은 겨울 날씨가 예전보다 따뜻하니 괜찮을 듯합니다.

저는 보리를 좋아합니다. 겨울의 그 새파란 어린 보리도 좋고 봄이 되어 넘실대는 밭 가득한 푸른 물결은 더욱 좋습니다. 그런 보리밭사이를 거니노라면 마음이 참 종다리처럼 높아져서 보리대궁을 뽑아서는 피리를 불곤 했습니다. 날이 더워지면 보리밭에서는 다디단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합니다. 풀 베어 말릴 때 나는 냄새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저는 늘 어떤 가슴 두근거림으로 어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다 젊은 날의 이야기이지만 가슴에 새겨져버린 것들이라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여 가을이 되면 거르지 않고 보리를 심었습니다.

제게 보리는 그냥 보리가 아닌 꿈이며 그리움이며 그래서 시이기도 합니다. 보리 심어놓은 단정하고 깨끗한 밭을 이렇게 발볼 수 있다는 것에서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하지만 보리농사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짓는 것은 쉽지만 베어서 탈곡을 하기가 참 어렵기만 합니다. 이웃 삼사동네를 두고 봐도 보리를 심은 사람은 저 혼자뿐이기에 벨 때가 되어도 콤바인을 불러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며칠을 두고 낫으로 벨 수밖에 없고 타작을 하기 위해서는 멀리서 또 따로 탈곡기를 얻어 와야 합니다.

사람도 여럿이 필요하고요. 이제는 보리를 파는 것도 문제입니다. 정부서 수매를 해주지 않으니 제가 도정을 해서 소비자분들에게 직접 팔아야하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도 보리농사는 다른 농사에 비해 수입이 너무 적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있는 사이 거짓말같이 날이 맑아지고 바람마저 멈추었습니다. 구시월 날씨는 참새 눈 깜박이듯 한다더니 그런가 봅니다. 밝디 밝은 햇살이 창호문을 타고 방안까지 들어와서 다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먼 산의 단풍들이 바로 집 둘레까지 내려와 곱기만 한데다가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여서 수없이 많은 무지개가 선 듯합니다. 천천히 밭둑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올겨울, 저는 아마 이 밭둑을 또 셀 수 없이 걷겠지요. 마음이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방문을 밀치고 나와 이 밭둑에 서 있노라면 어느덧 벌거벗고 있는 제 자신을 보곤 했습니다.

글을 쓰다가도 생각이 멈추면 버릇처럼 밭에 나와 거닐곤 했습니다. 그러면 현재의 이 시간이 가장 선명하게 멈춰 섰다가 다시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시계 속에서가 아니라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서 느낀다는 것은 순간의 경이로움이기도 합니다.

밭둑에 서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아직도 푸른 이파리들을 매달고 있습니다. 작년 같으면 지금쯤은 손바닥 같은 노오란 이파리들을 함박눈처럼 떨어뜨리고 있을 텐데 시간의 흐름을 잊었나봅니다. 하기는 일 년에 두 번씩 이파리를 피워냈으니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는데 이러다 눈이라도 오면 어떤 모습일는지 사뭇 걱정이 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서글픈 일입니다. 스스로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버릴 수 있는데도 버리지 않는 것은 추함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세월의 여정에서 버리고 또 버려도 어느새 고이고 넘치는데 때때로 그것을 저는 한동안씩 까마득히 잊기도 합니다. 저 은행나무를 보면서 오늘도 문득 그런 저를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흔들었습니다. 반대로 제 아내가 가꾸는 화단의 국화는 샛노랗기만 한 것이 이제 막 절정을 향해 치닫는 듯합니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봄 여름내 소쩍새와 천둥이 울고 가을의 서리까지 내리고 나서야 먼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온 누님 같이 피는 꽃! 날씨가 추워져서야 국화는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버려야 얻는 활엽수들이나 인고의 세월을 안으로 간직해야 피워 낼 수 있는 국화가 다른 것이 아닐 겁니다.
겉 다른 모습의 속 같음이겠지요. 단풍잎 한 장 국화꽃 한 송이를 봉투에 넣어서 오늘밤은 편지를 한 통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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