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독사에 물려 生 마감한 오리엔트 여왕

  
 
  
 
목표는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는 일단 로마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여왕’은 꼭두각시로 세워 두었던 자신의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폐위하고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을 왕으로 세운다고 발표했다. 이 역시 공동통치 형식이었으나 ‘클레오파트라’의 단독 통치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이집트의 운명은 로마의 권력자들이 쥐고 있었다.

‘저 자신만만하고 혈기왕성한 안토니우스가 우리 모자(母子)를 언제 죽일지 몰라. 빨리 손을 써야겠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로마의 최고 권력자다. 그는 60대의 카이사르와는 달리 이제 갓 40이 된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24세였다.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의 아내 ‘옥타비아’는 정숙한 아내로 로마시민들의 칭송을 받고 있지만 안토니우스는 대단한 호색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서 타르수스로 가는 채비를 준비 하여라.”
클레오파트라는 엄청난 재물과 수행들을 이끌고 오늘날 터키지역에 있는 타르수스로 달려갔다.

타르수스 연가(戀歌)
경치 좋은 타르수스의 강가에 나와 망중한을 즐기던 안토니우스는 천상에서 내려온 듯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배 한척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온갖 보석과 자주색 비단으로 치장된 초호화 보트에서는 아름다운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배는 안토니우스가 있는 곳까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황금빛 선체와 은으로 장식된 노, 금으로 장식된 갑판…. 그리고 그 안의 황금 옥좌에 비스듬히 누워 요염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한 여인.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이집트를 다스리는 클레오파트라입니다. 이 배에 오르세요. 영웅은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하지요.”
배에 오르자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몽환적 리듬이 흐르는 선상에는 향기가 가득했다. 그 모든 ‘효과’의 중심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안토니우스는 단번에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둘의 만남이 잦아졌다. 터키의 타르수스에서 로마의 영웅을 사랑의 포로로 만든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운명은 당분간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위한 간단한(?) 연회 때마다 (현재 우리기준으로) 몇 억씩이나 되는 돈을 썼다고 한다. 그를 위해 바닥엔 꽃을 뿌리고 비단과 황금과 값비싼 향유를 단 한 번의 데이트를 위해 마구 뿌렸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서 결코 도망칠 수 없었다.

오리엔트 여왕
여왕의 완벽한(?) 외교 덕에 이집트는 번영을 누렸다. 10년의 세월 동안 안토니우스는 한 번도 클레오파트라에게 싫증을 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녀의 매력이 단지 미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해 준다.
아름다운 외모에 지성을 갖춘 데다 절묘한 화술, 유머, 재치,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거기다 안토니우스와의 ‘은밀한 시간’에 그녀가 쏟는 정성은 대단했다고 한다. 방중술에 대해 궁녀들과 토론(?)하고 안토니우스를 위해 그 비법들을 익혔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연인’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고 그와의 결혼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안토니우스의 고민이 시작된다.

아내 옥타비아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지혜와 현숙’의 모델로 존경받는 여인이었다. 그녀를 배신하는 것은 로마시민들의 지지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안토니우스의 인기 상당부분이 아내 옥타비아 덕이었다.

“안토니우스. 안됩니다. 아무리 여왕을 사랑하신다해도 로마의 아내를 저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도리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의 신망을 저버리실 작정입니까?” (안토니우스의 가신)

그 당시 로마는 안토니우스 외에 ‘옥타비아누스’라는 또 다른 권력자가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그와의 경쟁관계를 염두에 둬야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끝내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니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안토니우스는 결혼 후 클레오파트라에게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터키 동남부 지방 즉, 이스라엘 지역을 포함한 중근동 지방으로 엄청난 이권이 달려있는 지역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오리엔트 여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안토니우스의 몰락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바람’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의 영웅에게 ‘그 정도 쯤은…’이라는 생각이 아직은 주류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자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개자식. 계집에 빠져 그렇게 훌륭한 아내를 저버리려 하다니….” 이런 류(類) 였다.
안토니우스의 패착은 계속된다. 공동 통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통치권을 동서로 나누어 다스리자”라고 제안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지금 로마는 안토니우스라는 미치광이가 동방의 창녀에 눈이 멀어 제국의 재산을 몽땅 그 계집의 입속에 쳐 넣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제국의 수치입니다. 이제 우리는 힘을 합쳐 안토니우스를 축출해야 합니다.”

로마시민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열변에 들끓어 올랐고, 결국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와 전(全)지중해 지역, 고대 서방세계의 패권을 건 운명의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안토니우스는 패퇴했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안토니우스는 자결했다.

여신(女神)의 마지막
“위대한 우리 로마인은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개척해 수많은 민족을 지배해 왔다. 오늘날 한낱 이집트 계집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한다면 우리의 위대한 조상과 영웅들에게 무슨 낯을 들고 살 것인가!”

안토니우스와의 전투를 앞두고 이런 말을 했던 옥타비아누스를 클레오파트라는 설득할 힘이 없었다.
‘이제 나는 로마로 끌려가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수치와 모욕, 조롱과 저주를 한 몸에 받는….’

그녀는 왕궁의 탑으로 올라가 시녀들이 보는 가운데 바구니에서 독사를 꺼내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독사에 물린 그녀는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39세의 화려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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