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오늘은 저의 28주년 결혼기념일입니다. 첫 문장을 이렇게 써도 마음속에 이렇다 할 변화가 생기지 않는군요. 새해 세 번째 날, 작년처럼 변함없이 눈이 오고 날이 춥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일곱 시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나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상을 차려서 아침을 먹고, 설거지 하고, 커피를 타서 방안에 들어앉으니 다시 또 하루가 평온하게 시작되고 흘러가는구나 하고 느껴질 뿐입니다. 딸애들은 멀리 있고, 방학이라고 집에 와 있는 막내 녀석은 아직 어리니 저희 부부가 스스로 챙기지 않는다면 자기일로 바쁠 애들이 부모 결혼기념일을 기억할리 만무합니다. 따지고 보면 엄마아빠의 생일보다도 녀석들이 이 세상에 생겨나게 된 이 결혼기념일을 더 잊지 말아야 하지만 이날은 저희 부모에 국한된 일이라 보는 듯합니다. 하기는 저희 부부도 잊고 살아 버릇하지만서도요.

그렇지만 제 아내는 아닐 겁니다. 막내인 저와는 달리 큰딸인 제 아내는 친정의 맏이 노릇은 물론 시댁 동서들의 생일까지도 잘 챙깁니다. 그것이 비록 전화 한 통화일지라도 잊지 않고 챙기는 사람인지라 겉으로는 잊은척해도 속내야 결코 그럴 리 없었을 겁니다. 뒤늦게 제가 아내의 행동에서 서운해서 그러겠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엊그제가 무슨 날이었구만 잉?’ 하며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한마디 던지면 이제 알았냐고 투정을 하니까요. 그런 날들을 지나오며 저라고 마음이 없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이렇다 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버릇(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제게는 있습니다. 제 보기에 참 인생 허랑하고 우습게 사는 듯한 사람들이 무슨 날만 되면 자랑스러운 그 무엇이라도 이룩해 놓은 듯 요란 떨어대는 것을 보면,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럴 때는 닭살이 돋는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아예 환갑 전에는 절대 생일은 쇠지 않겠노라고 식구들에게 선언을 해두었습니다. 제가 이러니 아내도 어쩔 수 없이 저 따라 하는 것입니다. 결혼기념일까지도 말입니다.

이제 나이 먹으니 생각이 조금 변합니다. 인생에서 이룩해 놓은 게 있든 없든 태어난 날이나 결혼식 날이나 그 자체로 모두 중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생겨나지 않았다면, 통과의례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존재할까요? 그래서 더없이 그런 날들이 소중한 것이고 그것을 인정할 때 또 이것은 세상에 대한 긍정의 한 끄트머리가 되는 것이겠지요. 젊었을 때는 이런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가 신봉하는 것들로 해서 스스로 빛나 보이는 아우라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사고의 경직을 불러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아내는 자기 생일날이 되면 읍에 있는 친정집의 홀로 사는 어머니에게 가서 미역국을 끓여 드리고 옵니다. 자기 낳느라고 애쓰셨다는 고마움의 표시지요. 이것은 친정어머니가 혼자 사시기 시작한 뒤부터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면 내 생일에 미역국상을 차려 드렸겠지, 그러나 지금은 계시지 않으니 한동네 사시는 형님 내외분들이라도 모시고 밥 한 끼라도 대접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부터 생일날이 되면 마음 한편이 조금 불편해졌습니다. 생각이 변해도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어서 초라하고 언짢아지는 거지요.
어쨌거나 결혼기념일만큼은 이번에는 그냥 보내지 않기로 혼자 속으로 맘을 먹었습니다. 이 것 만큼은 저희 내외에 관한 일이고 또 전적으로 저한테 달려있는 일이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예의’ 라는 단어가 크게 느껴져서 저는 최근에 이 ‘예의’라는 것을 이것저것에 붙여보곤 했습니다. 제 아내에게도 이 말을 붙여보니, 버릇처럼 또 잊고 지나갈 뻔 했던 이날이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했습니다. 이런 것을 여태껏 해보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몇 가지 생각나기는 했습니다. 둘이 단 며칠이라도 여행을 하는 것,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는 것, 외식 혹은 전시회나 영화관을 찾는 것 등등. 하지만 이것도 다 저에겐 버거운 일이더군요. 그 빌어먹을 여유라는 것이 없으니까요. 나중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읍에 나가서 꽃 한 다발, 시디나 책 한 권 사다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결국은 이십 리 떨어진 농협마트에 나가서 밀감 한 박스, 라면 열 봉지, 고등어 다섯 마리 따위 살림할 것과 아내 몫의 아이스크림 한 통, 제몫의 술 한 병 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근 열흘 만에, 눈으로 막혀버린 집 앞 오르막 언덕길을 한나절 치워내고 한 30여 분 헛바퀴 돌리며 실랑이 한 끝에 겨우 집을 탈출해서 말입니다. 

이게 어제의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방에서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저는 아궁이 불 때는 거실에서 밤새 짚일을 하며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아무 일 없이 예전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이렇듯 하나하나가 낡고 닳아서 또 한편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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