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

드르륵, 문을 열고 정지에 들어서자 고구마 익는 다디단 냄새가 가득합니다. 점심밥 먹을 시간이 가까이 되는지라 저는 그 냄새에 끌려서 아궁이에 넣어둔 고구마를 하나 꺼내어 껍질을 벗겨 듭니다. 타지 않고 노릇하게 잘 익은 고구마를 이손 저손으로 옮겨 쥐고 호호 불며 한입 베무니 뜨겁고 부드럽고 다디단 것이 입안에 가득 차는군요. 김치 중발을 꺼내 부뚜막에 올려놓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 개를 더 꺼내 먹습니다.

금방 뱃속까지 뜨끈뜨끈 해지며 포만감이 생겨서 기분이 좋습니다. 고개를 들어 밖을 쳐다보니 낮게 구름이 덮인 하늘에서 또 단풍잎 같은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 달 넘게 눈 속에 묻혀 살았어도 내리는 눈을 보니 마음은 차분해집니다. 시간은 잠시 멈춘듯하더니 이내 거꾸로 흘러갑니다.

저 사는 이곳은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엔 점심을 거의 다 고구마로 때웠습니다. 낮의 해가 비록 짧다고는 해도 점심을 거르고 참는 것은 힘든 일이라 밥 대신 고구마로 때우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아침을 해 먹고 설거지하면서 아예 고구마를 씻어서 한 솥 미리 앉혀둡니다. 그러고는 조금 지나 열시쯤 돼서 불을 때는 것이지요. 그때의 고구마는 지금처럼 한입씩 베물기 좋게 개량된 길쭉길쭉한 게 아니라 어른 주먹만한 고구마입니다.

이것은 물을 좀 나수 붓고 한 시간 정도 불을 때서 물이 졸아들 때쯤 멈추고 다시 한 시간 가량 더 무르게 솥뚜껑 열지 않고 놔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솥 밑에 닿은 고구마는 타지 않을 정도로 약간 눌어붙으면서 지금처럼 다디단 냄새와 맛을 내는 것이지요.

점심때가 되면 마실갔던 식구들이 돌아와 방안에 빙 둘러 앉아 고구마 점심을 먹습니다. 커다란 양푼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고구마가 담겨서 상에 놓이고 그 옆에는 꼭 얼음이 버석 버석한 무 싱건지 양푼이 따라 놓입니다. 짠지는 잘 놓지 않습니다. 무 싱건지는 조선무를 이파리째 파 마늘 소금 간만 해 담근 것인데 잘 익으면 약간 싸한 맛이 나며 아삭거리는 식감이 더 없이 좋습니다.

뜨거운 고구마와 찬 싱건지의 섞임도 좋은 것이며 물큰한 녹말질과 거친 섬유질의 조화도 훌륭합니다. 사실 고구마만 먹으면 목이 메어 잘 먹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고구마와 짠지는 맛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고구마와 짠지를 먹으면 이상하게도 밥하고 먹을 때와는 달리 김치에서 젖비린내가 나거든요. 그래서 겨울을 나려면 싱건지를 집집마다 서너 동이씩은 담갔던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싱건지와 고구마만으로 점심을 먹어 배가 불러도 왜 그런지 속은 허전했습니다. 곡물로 밥을 지어 먹던 우리 민족의 오랜 버릇 때문이겠지만 아무래도 고구마나 싱건지는 식이섬유소가 대부분이어서 포만감이 오래 가지 않지요. 그래서 늘 고구마를 먹는 점심엔 맨 나중에 거친 보리나 조밥일지라도 한 두 수저씩 밥을 뜨는 걸로 마무리했습니다. 어른들은 이걸 일러 ‘목에 걸린 고구마를 밥으로 밀어내려야 한다’고 했지요.

지금은 이것이 반대로 되었지요. 기름진 음식과 탄수화물이 든 음식만 많이 먹고는 부드러운 섬유질 음식 한 저분으로 그것들을 저 배꼽아래 대장으로 밀어내려 안간힘 하는 식입니다. 무슨 유행처럼 한때 ‘참살이’라는 말이 사방에 떠돌았는데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것을 잘 알고 누렸으면서도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나 되는 양 호들갑이었습니다. 요즈음은 또 ‘힐링’이라는 단어가 각종 매체에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치유해야 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그래야 되지만 치유라는 것이 떠들썩하게 요란을 떨어야 되는 것인지는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여기에도 잽싸게 상업적 논리가 끼어든 탓에 성찰로 이어져야 하는 진정한 치유를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간 감이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결론은 고구마 먹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되 거울은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고도의 압축 성장을 거치는 동안 묻어두었던 여러 가지 잘못된 과정이나 병증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실마리는 아직 농촌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고구마 맛있게 구워 먹는 방법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음식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고구마도 찌는 것보다는 굽는 것이 더 맛있습니다. 기왕이면 아궁이 장작불에요.

그러나 시골에 서도 아궁이 불 때는 집이 드물고, 있다 하더라도 직접 불에 던져 넣어서 굽는 것은 타기 쉽고, 껍질 벗겨 먹을 때 손에 재 묻고 방안 어지럽혀져 덜 좋습니다. 그러니 우선 뚜껑 있는 적당히 헌 그릇(전기밥통 속 그릇 같은 것)을 하나 마련해서 그 속에 어른 손마디 하나정도 되는 깨끗한 자갈돌을 한 겹 까십시오. 그 위에 고구마를 대강 씻어 두 겹 정도로 얹고 불에 올려놓습니다. 가스 불에는 가장 낮은 단계의 불에 40분 정도, 장작불이라면 적당히 사위어갈 때 올려놓으면 됩니다. 깊어만 가는 겨울, 고구마 익는 냄새 한 자락이 우리  삶의 원형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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