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내가 런던 외곽의 한 감옥에 수용 됐을 때 만났던 어느 초라한 노파에 대한 이야기다. 그 더럽고 남루한 노파는 몇날 며칠 동안 아무 이야기도 없다가 내가 앞방의 죄수와 하는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앞방의 죄수와 나눈 이야기는 우리나라(영국)를 구한 영웅 ‘넬슨’ 제독의 무용담이었다.

가난한 천사
“나는 마을에서 술 한 병을 훔치다가 잡혀 들어왔다. 너는 무슨 죄로 이곳에 왔지?”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 한 번 들어봐라.”그녀가 말했다.
나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깊은 한 숨과 함께 그녀가 걸어온 화려했지만 고단했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1765년 체셔 지방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났지. 집안은 가난했지만 부모님들은 내 외모가 하나님이 주신 천사의 모습이라고 자랑스러워했어. 정말이지 나의 유일한 기쁨은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는 것이었지.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엄청난 부자나 귀족 집안으로 시집 갈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자랐어.”
이런 추한 노파가 예전에 미인이었다니 나는 비웃는 투로 물었다.
“그래서 결혼은 했수?”

“결혼? 글쎄… 그것들을 결혼이라 해야 할 찌… 어쨌든 내가 열여섯 나이가 되자 주변에 온갖 놈팡이들이 들끓기 시작했어. 그러나 나는 시덥지 않은 놈들에게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도도하게 굴었어. 그런 내 행동이 남자들을 더 몸 달게 만들었던 모양이야.”

소녀에서 정부(情婦)로
“열여섯 그해의 어느 날, 내 앞에는 ‘헤리 페더스톤’이라는 귀족이 나타났다. 호색한처럼 생긴데다 행동이 품위가 없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는 선물공세를 시작했고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즉 그의 정부(情婦)가 되기로 한 것이지. 집에서도 이를 묵인하는 분위기였어.”
“딸이 남의 정부로 들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요?”
나는 이야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가난했고 가난하면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기 십상이지. 무엇보다도 내가 강하게 희망했어. 헤리 경의 집에 들어가니 온갖 금은보화가 넘쳤지. 맛난 음식에 나보다도 나이 많은 도도한 여인들이 나를 시중들었어. 나는 그저 그 남자를 즐겁게 해 주면 그만이었지.”

헤리 경은 대단한 호색한에다 변태적인 기질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친구들을 모아 놓고 밤새 ‘부어라 마셔라’하는 방탕한 생활을 했고 조금 반반하다는 여성은 어떻게든 건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들 앞에서 이 여인에게 스트립쇼를 강요했다.

“그러다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지. 그런데 헤리는 ‘누구 아인지 어떻게 아느냐’며 나를 거리로 내쫓았다”는 그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헤리의 친구 ‘찰스 그레빌’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이미 삼십대 중반이었던 이 남자도 여성편력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는 다시는 버림받지 않으려고 조신하게 행동했다. 오로지 찰스의 비위만 맞추려했고 찰스의 쾌락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찰스도 결혼상대로는 그녀를 택하지 않았다. 귀족 집안의 여성과 결혼하려는 찰스에게 그녀는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찰스는 나폴리(현 이탈리아 나폴리 지방) 대사로 떠나는 자기 외삼촌 ‘윌리엄 해밀턴’에게 그녀를 살짝 보여줬다. 그는 한눈에 그녀에게 빠져버렸다. 윌리엄 해밀턴은 그녀를 첩 삼아 나폴리로 떠났다. 윌리엄은 조카의 빚까지 갚아줬다.

해밀턴 부인
“자기가 결혼하기 위해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늙은이에게 나를 물건 건네듯 줘버린 찰스에게 분노했지. 하지만 다시는 버림받지 않으려면 정식으로 아내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무슨 수가 있어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참 내 이름은 엠마 해밀턴이야.”
“엠마 해밀턴이라면… 어머 그러면 해밀턴 경과 결혼을 했다는 말씀?”
“그래 결혼에 성공했지.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어. 해밀턴은 이런 저런 과거가 있는 나와 결코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
“그럼 어떻게?”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가 나에게 반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 왕비는 나를 경계하게 됐고, 나는 왕비의 질투를 이용했어. 왕비를 찾아가 나를 윌리엄 해밀턴의 정식 부인이 되도록 압력을 행사하면 누가 다른 나라 외교관 부인을 희롱하겠느냐고 설득했어.”

윌리엄 해밀턴 경은 나폴리 국왕과 왕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엠마와 결혼했다.

타고난 미모를 갖췄지만 가난한 평민이었던 탓에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엠마’가 ‘해밀턴부인’이면서 드디어 귀족 집안의 일원이 된 것이다. 게다가 영국대사의 부인이었다.

굴곡의 삶을 살다 엠마 해밀턴 부인이 된 그녀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에 불과했다.

마침내 사랑을…
형식적인 부부사이였지만 엠마는 나폴리 사교계를 사로잡으며 영국 대사의 아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나갔다. 윌리엄 경은 이런 엠마의 수완 덕을 톡톡히 봤다. 그는 대사직 수행은 성공적이었다.
이즈음(1798년) 프랑스와 전투에서 이기고 영국으로 가던 ‘넬슨’ 제독(넬슨은 우리나라의 이순신과 비견되는 영국의 해군 장군)이 나폴리에 잠시 들렀다.

“프랑스와 싸우다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그였지만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진정한 내 사랑이 그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는 오랜 전부터 내가 흠모해 오던 나의 영웅이었지”
“그 유명한 넬슨의 애인이 바로 할머니라고요?”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윌리엄은 나에게 정부로서의 관심밖에 없었다. 아내이긴 했지만 형식적이었지. 전쟁터만 전전하느라 제대로 사랑한 번 못해본 넬슨은 나에게 첫눈에 사랑을 느꼈지. 우리 둘은 곧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두 분 다 가정이 있었잖아요.” “그래 넬슨에게도 영국에 본처가 있었고 윌리엄은 우리 사이를 알고도 묵인했어. 그는 내가 넬슨의 비서로 일하겠다는 데도 아무런 반대가 없었지.”

비극적 말년
엠마와 넬슨은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나눴다. 기혼자 신분인 둘 사이에 ‘호레이셔’라는 딸까지 낳았는데도 윌리엄이나 넬슨의 부인이 가만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윌리엄은 넬슨의 집에서 엠마와 셋이 함께 사는 이상한 행동까지 하게 된다.

“윌리엄은 1803년 약간의 유산을 내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 나는 넬슨과의 행복한 말년을 꿈꾸었지. 그러나 우리 사랑, 우리 행복은 길지 않았어.”

넬슨 제독은 1805년 트라팔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영국을 구해냈다. 그러나 그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까지 군사들을 독려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이다. 엠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넬슨은 죽으면서 모든 유산을 나에게 남기겠노라고 말했어. 영국에 부인이 있는데도 말이지. 사람들은 나 보고 넬슨의 정력과 기력이 소진된 것은 내 탓이라며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지 못하게 했지. 나는 졸지에 영웅을 타락시킨 요부로 낙인찍히게 되었지.”

이후 엠마의 인생은 그녀의 설명이 없어도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넬슨을 잃고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술에 빠져들었다. 한마디로 막 살기 시작한 그녀는 이내 빈털터리가 되었고 거지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가 됐던 것이다.

나는 몇 년 후 엠마의 비참한 죽음을 풍문으로 들었다. 내가 감옥에서 봤을 때 알콜 중독 합병증으로 그녀의 건강은 이미 가망이 없어보였다.
나는 젊은 엠마의 초상화를 한참 후에나 볼 수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초상화 속의 여인이 감옥에서 내가 만난 그 노파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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