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아침 아홉시 반쯤 집을 나섰습니다. 맑은 하늘 밝은 햇살,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댑니다. 산 밑 외딴곳에 집 한 채, 고즈넉이 남겨져서 조금은 외롭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봅니다. 가스 밸브는 잠겼는지, 켜진 불은 없는지, 문은 잘 닫혔는지 또 확인해봅니다. 사람이 없는 새 쥐란 놈은 낮에도 제 세상인양 활개치고 나대겠죠. 마루에서 채반에 주어다 말리는 상수리는 사람이 있어도 다람쥐가 다 물어가 버렸습니다. 감나무의 홍시도 땅에 빨갛게 떨어진 채로 있겠고, 토방 마루 끝의 햇살은 하루 종일 아까울 겁니다. 그래도 길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들이 오늘따라 유달리 제 바짓가랑이를 잡는 듯하지만 오래전부터 약속해둔 것이라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새롭고 낯선 풍경에 가려 집 생각은 옅어집니다. 희미해지다가 깜박 잊힙니다. 시디를 넣고 음악을 듣습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처럼 이내 기분이 들뜹니다. 아랫녘으로 달려갈수록 아직 추수 끝나지 않은 논의 황금빛 나락들이 산의 단풍과 함께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런 논들은 거의 다 산 밑에 있는 조각논들입니다. 작아서 기계가 들어가 수확할 수 없는 논들이지요. 잠깐 지나가는 길손의 눈엔 아름답게 보이지만 낫을 든 저 늙은 농부의 허리는 지금 많이 아플 겁니다. 그래도 당신들이 있어 우리나라 산천은 이렇게 금수강산입니다. 고맙습니다!

국도가 끝나고 이내 고속도로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좀 빨리 달려야 하나 봅니다. 그래서 주행차선으로 시속 90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데 뒤에 오는 차들이 하나같이 제차를 앞질러갑니다. 제차가 너무 느려서 방해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지금 이정도의 속도도 정신 못 차리겠습니다. 눈은 끊임없이 앞뒤 좌우를 살펴야하고 핸들을 잡은 두 손은 힘이 들어가서 어깨와 뒷목이 아플 지경입니다.

아까와는 달리 차안이 꽤 더워져서 에어컨을 켜지 않으려고 창문을 열어두었는데 아까까지 기분 들뜨게 하던 바람은 이제 소음이 됐습니다. 이걸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더 빨리 달리기엔 무리인 듯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처음 맘먹은 대로 그냥 국도를 따라서 갈 걸 하는 후회가 이내 밀려옵니다. 느긋하게 주변 풍경을 살펴보면서 다녀오려니 했던 생각은 고속도로에 접어드는 순간 속된말로 ‘깨 몽’이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빠름 빠름을 외쳐대던 광고카피가 생각났습니다. 단순하고 어리숭한 현실인식인지는 모르지만 제 생각에 고속도로야말로 그 속도주의가 가장 적나라하게 시각화되는 장소가 아닐는지요.

어쨌거나 지옥과도 같은 두 시간 남짓의 경주 아닌 경주가 끝나고 다시 국도와 지방도로 접어들었습니다. 여기는 시속 50킬로미터 이하로 달려서는 안 되는 고속도로가 아니니 평소 제 별명대로 ‘50킬로’만 놓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참! 90킬로미터로 달리던 관성이 그대로 이어져서 속도제한 턱을 몇 번이나 부서질 듯 덜컹대며 넘었습니다.

그렇게 일차 목적지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때가 기울었습니다. 옆에 탄 제 아내와 약속하기로는 좋아하는 돼지순대국밥을 사주기로 했는데 그곳은 사찰 아래여서 그런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요. 순대국밥은 오일장이 열리는 시장에나 가야 사먹을 수 있는데 그 도중에 있는 절을 찾았으니 그것이 있을 리 만무하지요. 할 수 없이 고만고만한 식당중의 한군데를 들어가 비빔밥을 시켰습니다. 그걸 좋아하냐고요? 천만에! 저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차림표 중에서 가장 쌌기 때문입니다. 왜 싫어하냐고요? 첫 숟갈부터 마지막 숟갈까지 한 가지 맛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다하는 집의 갖가지 재료가 들어간 그것이야 훌륭하지만 어디서나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는 늘 주머니 사정이 문제인 것이지요. 여기서도 역시 먹어봄직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모두 만오천원 이만원 이상이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차를 몰고 달려온 긴장이 온몸을 경직시킨 데다가 기름범벅 때늦은 점심이 속을 불편하게 하여 마음먹고 간 절은 겉만 훑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행선지는 그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립박물관이었는데 평소에 그렇게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음에도 몸이 피곤하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옆에 따라다니는 제 안식구에게는 그런 내색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 좀체 속을 보이지 않으니 알 수야 없지만 아내 역시 피곤한 듯하니 저라도 안 그런 척, 재밌는 척 해야지요.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하고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여행이라는 것도 해본사람이 잘 하는가 봅니다. 본디 낯선 것 익숙지 않은 것과의 만남을 통해서 물처럼 고여 있던 일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여행일 텐데 마음속에 이미 어떤 관념과 상투성을 지니고 떠난 제 여행이 이렇듯 빤한 모습이 아니 된다면 오히려 비정상이겠지요. 이튿날 간 길을 되짚어 가까스로 집에 와서는 콩 꺾다 만 밭에 들어가 덜퍽 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