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가을일이 이제 대강 마무리 되어갑니다. 하루하루 짧아져만 가는 해라 특별히 무얼 하는 게 없어도 금방 하루가 지나가버리지만 자질구레한 것도 일은 일이라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하다 보니 어지럽던 밭이 제법 말끔해졌습니다. 그대로 두고 겨울을 나도 상관없는 일들이긴 해도 내년 농사를 그만 둘지 말지 모르는 노인네가 아닌 바에야 게으른 표를 낼 필요야 없겠지요. 그렇긴 해도 예년에 비하면 제 스스로 많이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다지 보기 싫지만 않으면 그냥 두고 보는 일이 많아졌으니까요. 이상하게도 때론 그것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타협해서 그런 게 아니라 또 다른 내가 여기 앉아있는 나를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자각이 저를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는 늦게 거둔 메주콩을 털었습니다. 밭 양쪽 귀퉁이가 그늘이 빨리 지는 탓에 언제 까지나 퍼렇게 있었는데 이제는 익을 가망이 없어서 낫으로 베어 땅에 깔아둔 것들입니다. 조금씩이나마 가을비가 자꾸 지짐거려서 다 마르지도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당장 해야 할일도 마땅찮아서 아내와 둘이 덤벼들었습니다. 일 가심으로야 참 자잘한 것인데도 영글지 않고 마르지 않은 것이라 시간이 생각밖에 많이 걸렸습니다.

 막대기가 부러져라 두드려대도 제대로 익은 것은 몇 알 나오지 않아서 바람에 검불을 날리고 보니 못 쓸 것 골라내버리고 나면 기껏 서너 됫박 감이었습니다. 그래도 말끔하게 끝내고 나니 마음이 개운합니다. 이제 서리태 콩만 거두고 나면 콩 일은 끝인데 말 그대로 그것은 서리가 와야 거두는 것이라 조금 더 두어야 합니다.

먼저 거둔 콩은 며칠째 시방 안식구가 방에서 고르고 있고 저는 놀기 삼아서 한나절씩 더덕 종자를 땁니다. 콩이야 바깥일 없고 눈비 몰아쳐야 방안에 들어앉아 고르는 것인데 날이 갑자기 추워지는 탓에 메주 쑤기가 급해서랍니다. 텔레비전을 보는지 콩을 고르는지, 그러니까 무엇이 주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방안에 아내가 종일 버티고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 든든하고 따뜻합니다.

그래서 찬바람 맞으며 더덕 종자를 따도 제가 별로 추운 줄을 모르는 것이겠지요. 늘그막에 아마 팔불출이 되어가나 봅니다. 안식구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면 저도 딴엔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느라고 방안에 있는 때가 있지만 그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럴 땐 자주 들락거리고, 일을 거들어서 끝내고 같이 방안에 들어옵니다. 팔불출을 넘어서 어린애 같은 거지요. 나이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던 그것!

어쨌거나 가을일이 이렇듯 서둘 것 없는 것이 된 때여서 어제는 하루 제가 가르치는 공동체학교(대안학교) 의 짚풀 수업반 아이들을 대리고 짚풀 공예 하는 분이 계시는 남원으로 견학을 갔다 왔습니다. 저를 낀 어른 셋과 중고생 열여섯 명이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아침 아홉시 무렵 학교를 나섰는데 앞서가던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한 시간 반가량을 달리다가 빠져 나가야 할 나들목을 놓친 탓에 무려 두 시간을 길에서 더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뒤차를 운전하는 저나 앞차나 길을 모르긴 마찬가지라 내비게이션을 하나 빌려서 앞차에 달았는데 무슨 까닭에서였는지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는 그 길은 즐겁기만 했습니다. 가르치는 저나 배우는 저희들이나 교실에서 해방되기는 마찬가진데 비록 잠시나마지만 이제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에 좀 더 가까운지라 아이들은 저보다 더 신이 나고 아이들의 그 기운에 휩싸여 저 또한 덩달아 신이 나서 떠들어 댔습니다.

이런 즐거움에는 불량식품도 한몫 했습니다. 저희들은 평소에 유기농으로 기른 먹을거리만을 쓰고 인스턴트식품은 불량식품이라 하여 사먹는 것을 금지하는데 이날만은 그 규칙을 깨야 합니다. 그래서 간식으로 싸간 찐 고구마와 함께 과자 몇 봉지, 음료수 몇 병을 사서 고속도로 휴게소 한편에서 새참 시간을 가진 것인데 아이들은 그게 마냥 즐거웠던 것입니다. 모르는 길을 찾아야 하는 걱정, 운전 걱정 따위, 무슨 큰일이랍니까? 아침내 공동체 식당에서 함께 싼 김밥으론 점심을 먹고 나간 김에 짜장면으로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기로 예산까지 타온 마당에 말이지요. 흠….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은 그래도 저에겐 무리였나 봅니다. 집에 돌아와서 겨우 불을 때고는 그 길로 쓰러져 잠이 들었고 그것 때문에 잠 서너 시간이 깊을 대로 깊었으니까요. 빗소리에 깼는지 바람소리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간간히 들리는 차양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굵고 성기다가 가늘어지고 뒤 처마 밑 마늘을 덮은 비닐소리가 바람에 펄럭이는데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뻗고 누워있는 이 순간이 왜 편안 하다가도 처연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후론 밤새 잠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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