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아내의 생일입니다. 그 전날 밤은 홀아비 신세가 되고 생일날 아침은 혼자만 밥을 먹습니다. 왜냐고요? 아내가 읍에 홀로 사시는 친정어머니에게 가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 드리고 오기 때문입니다. 시집오고 30년을 한결같이 지켜낸 눈부신 업적(!)인데 이제는 그것이 그대로 전통이 되었습니다.

 아내랑 같이 가서 자고 같이 아침 먹고 오면 단 하룻밤이라도 홀아비 신세가 될 일은 없지만 왠지 그렇게 하기가 싫어서 저는 거의 빼먹다시피 했습니다. 외딴집에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선 하룻밤이라도 집을 비워두기가 허전하고요, 한편으로는 혼자 있어 허전하고 호젓한 그 상태를 마치 저를 정화시키는 기회인양 생각했으니까요. 친정에 간 안식구도 오랜만에 친정엄마랑 나란히 누워 오붓해야 한다는 것은, 제가 안 가는 것에 대한 속 보이는 핑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친정엄마와 딸은 성격이 너무나 정반대여서 무슨 이야기가 그리 살갑게 이루어질리 없겠습니다만, 딸이 일 년에 한번 그것을 의례나 숙제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내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는 저는 또 서울에 있는 딸들에게 미리 전화를 해둡니다. 아무 날이 그날이니 잊지 말고 전화나 해주라고요. 그러면 딸애들은 저희들 엄마가 친정에서 돌아온 생일날 점심때쯤이나 저녁에 전화를 합니다. 엄마 생일이라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시간 내서 왔다갈 만큼 여유롭지 못한 애들이 ‘먹고사니즘’ 때문에 정신이 없을 것이므로 안사람도 굳이 내려오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설사 그런다고 하면 오히려 손사래 치며 말리겠지만 제 노파심으로는 혹시 애들이 잊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 때문에 전화로라도 대신하라고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그것도 없으면 섭섭할 테니까요.

저는 저대로 해마다 반복되는 공수표를 뗍니다. 당신 미역국은 내가 끓여주겠다, 꽃을 한 다발 사주고 싶은데 우리 집 화단에서 질리도록 보니 소용없겠지? 대신 저녁에 사랑이나 할까? 돈 들지 않아서 좋잖아 등등. 헐렁한 말들이지만 가끔 미역국을 끓이고 밥상을 차려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전혀 공수표만은 아닌데요, 근년에는 그것도 너무 경박한 것 같아서 십만 원 정도는 당신을 위해서 써주겠다고 술김에 말하곤 했습니다. 말할 때는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마치 무얼 사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술 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먹곤 해서 아내의 구박을 받곤 하는데, 사실 인즉슨 술 핑계대고 잊어먹은 척했다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지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다그치는 아내에게 심드렁하게 마이너스통장의 마이너스가 얼마라고 말하며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누가 봐도 속 보이는 일이며 저급한 쇼인데, 놀랍게도 안식구의 바다 같은 마음은 옹졸함의 극치로 허우적대는 저를 의례 그러겠거니 하는 듯 마른땅으로 옮겨놓습니다. 그러면 저는 마지막 대첩을 거두고 전사하는 성웅 이순신 장군의 그 비장함으로 “내 생일을 애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하곤 하지요. 여드레 후에는 제 생일이니까요.

이제 제 아내의 뙤우침으로 생일날 아침엔 애들한테서 전화가 오고, 저희의 생일은 그렇게 이런 식으로 그럭저럭 지내왔습니다. 아니, 아내는 그게 아닐 것이라고 치고 대체 제 생일은 ‘자축타축’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자조적이며 편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도 그럴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문제는 저에 대한 이런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려는 데 있습니다. 자기의 자존감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인데 저에게 그런 것이 없다고 다른 사람도 그럴까요? 남에게 축하받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는데 남도 그럴까요? 환갑 지나고 일흔은 돼야 이런저런 거침없이 앉아 생일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이 생각의 반대편, 즉 이날 하루만은 다른 이들을 위해 상을 차릴 수는 없을까요? 지금 제 나이 쉰여섯에 말이지요. 생각의 갈래를 이리저리 갈라보면 생일이라는 것에 부여 할 수 있는 의미가 그리 만만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엊그제 제가 알고 지내는, 제 사는 곳에서 차로 한 삼십분 거리에 홀로 사시는 선생님 한분이 저를 보자고 오셨습니다. 물론 그 전날 전화가 와서 오실 줄은 알았으나 왜 오시는가는 몰랐습니다. 금년 나이 일흔여섯 되시는 분인데 젊어서 이후로 여태껏 혼자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래서인지 건강관리에 아주 투철하셔서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데, 오셔서 점심을 먹고 조용한 찻집엘 가자시더니 당신이 실은 심혈관계에 병이 있어서 염려가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잇는 말씀은 ‘유언장을 남기겠지만 집 한 채 있는 것은 큰조카에게 주고 약간의 저축은 여생과 병원비로 쓰겠다, 조카가 멀리 있고 경험이 없을 테니 일 생기면 옆에서 좀 수고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온화한 미소로 말씀해 주셔서 고맙고 염려 마시라 답했습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습니다. 그분의 일흔 살 생일상을 차려드린 것이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합니다. 저의 칠십도 바로 내일모레겠지요. 그런대도 이렇게 갈피가 분명치 않습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