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후대의 인재 양성 위해 구담봉 자리잡다



고향을 잊지 못해 자신의 기명도 두향이라 지은 어린 두향을 자기 고향 두향리가 올려다 보이는 강선대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씩 강선대에 오곤 했는데 퇴계가 부임하고서는 퇴계와 함께 강선대에 오곤 했다. 퇴계는 어린 기녀 두향을 특히 어여삐 여겼던 것이었다.
“저희 영감님께선 손님을 맞고 잠시 후에 오신 답니다.”
“그래 기다리자꾸나.”

두향은 지번에게 술을 권했다. 술잔을 단숨에 받아 마신 지번은 두향이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다. 어리지만 정숙한 맵시에 곱고 잔잔한 눈매를 지닌 기녀였다. 가무에도 능한 두향의 끊어질 듯 이어져 가는 가야금 소리에 지번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하다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지번이 술잔을 기울이면 두향은 술병을 들고 지번의 잔을 채우곤 하였다.
“나으리.”
정다운 눈길이 마주쳤다.

“제가 이실직고 할 말이 있습니다.”
“그래, 네가 이실직고 할 게 있다고? 허허, 그래 어디 들어보자꾸나.”
“실은 옥순봉의 단구동문을 제가 쓰자고 했습니다.”
“아니, 어째서?”

“소인은 두향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하온데 계란제를 중심으로 우측은 단양이요, 좌측은 청풍인데, 유독 옥순봉만 홀로 청풍에 있길래 영감님의 허락도 없이 석필을 세웠습니다.”
그때 퇴계가 빠른 걸음으로 강선대에 올라왔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 급히 올라온 탓인지 퇴계의 갓 끝에 땀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이공, 너무 오래 기다리시진 않았는지요?”
“강선대의 하루는 신선이 숨 한번 쉬는 것보다 짧은 것 같소. 내 두향이 따라주는 술 몇 잔에 한나절 가는 것도 몰랐구려.”

“이공께서는 농도 잘하시는군요.”
“실은 이공께 청이 하나 있소이다.”
“허허허, 내 두향한테 방금 들었소. 단구동문 옆에 청풍 말문이라 쓸 수는 없지 않소. 두향의 술 몇 잔에 옥순봉이 단양으로 가버렸구려.”

“이공께서 이렇게 응해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내 술 한잔 크게 따라 드리지요.”
두향이의 매혹스런 몸짓에 날아가던 새도 잠시 솔가지에 앉아 넋을 잃고 쳐다보는 듯 했다. 옥순봉이 더해지면서 단양은 팔경의 칭호를 달아 단양팔경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와 두향과 함께 술 마시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벌써 이리도 흘렀으니……. 지번은 조용히 옛 생각에 잠겼다. 구담에 걸린 햇살에 저 멀리 여강의 물빛이 눈이 부시게 붉은 색을 띈다. 옛 추억을 떠올리던 지번은 조용히 지함을 불렀다.
“마음을 정했네. 아우의 말대로 이곳에 조상을 모시기로 하세. 어디 좋은 날이라도 잡도록 하게나.”
“형님, 고맙습니다.”

토정은 묵은 체중이 씻기는 듯하다. 자신이 전국 방방곡곡을 수차례 돌아다녔지만 이곳처럼 좋은 곳은 흔치 않았다. 조선 팔도를 아무리 돌아다녀 보아도 큰 물줄기를 휘감아 틀어 직각으로 꺾어 놓은 곳은 이곳 밖에 없었다. 거대한 황톳물이 노도와 같이 밀려와도 구담을 이기지 못하고, 거센 여울이 몰려와도 숨소리 한번 크게 못 내고 돌아갔다.

탁류 같은 조정에도 구담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토정은 옥순봉과 구담봉 사이의 명당 터를 골라 후대의 인재를 기대한 것이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형의 허락을 받아냈으니 이제 이장할 일만 남은 것이었다. 토정은 마음이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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