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하늘 티벳고원에 꽃핀 인애와 사랑

  
 
  
 
서기 630년경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당나라에게는 벅찬 상대가 둘 있었다.
하나는 동북아의 최강자 ‘고구려’였고 또 하나는 서남쪽 에베레스트 산맥을 중심으로 험한 고원지대의 사나운 부족들을 통합하고 비로소 통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토번’이었다. 고구려 못지않은 막강한 군사력의 토번에 대해 당나라는 공포심까지 갖고 있었다.

당 조정은 문화적으로 한참 뒤져 있던 토번에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도입시켜 그들로 하여금 중화문명에 대한 경외심을 조성하고 당에 대한 정신적 예속을 꾀하는 일종의 ‘문화정책’을 고려하고 있었다. 630년대 중반 토번의 대규모 침공으로 혼쭐이 난 당나라는 토번과의 화친과 문화 전파의 효율적 수단으로 ‘결혼정책’을 시행한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높은 험한 곳 토번으로 시집가게 된 이가 바로 당태종의 딸 ‘문성공주(?∼680)’다.

끝없는 팔천리길

‘가도 가도 산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구나….’
마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천지는 온통 산뿐이었다.
‘태산, 황산, 아미산… 중원에도 험산준악(險山峻岳)은 많고 많지만 여기에 비하면 언덕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건 그렇고 토번의 왕은 어떤 분이실까? 성질이 포악해 날마다 구박받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음식은 입에 맞을까? 날씨도 몹시 험하다던데….’

당나라 태종과 장손황후의 양녀로 자랐지만 당당한 당제국의 공주신분인 문성공주가 수도 장안에서 3천km나 떨어진 멀고먼 토번국으로 시집가는 길. 마차 속의 ‘귀하신 몸’은 걱정이 태산 같다. ‘이제는 살아서는 다시는 못 돌아갈 중원의 천지…. 아버님은 하필 저를 이 먼 곳으로 보내셨습니까?’ 공주는 황제가 원망스러웠다.

당 태종은 서남부의 막강한 토번제국과의 화친을 위해 공주를 토번 왕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했다. 중국의 사서에는 ‘서기 640년 당 태종에게 크게 패한 토번왕 ‘송첸캄포’가 신하의 예를 갖추고 공물을 보내며 사위가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썩 내키지 않지만 이 거칠고 위험한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해 공주를 보냈노라’고 기록돼 있지만 많은 사학자들은 이를 ‘중국의 아전인수 격인 기록’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당나라는 토번과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늘상 패해 왔고, 그 해(640년) 인근의 ‘토곡혼’ 국을 멸망시키다 시피하고 당나라까지 진격해 들어 온 토번을 달래고자 당나라 측에서 ‘저자세’로 혼인외교를 청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과거 한나라시대에 궁녀 ‘왕소군’을 흉노의 선우에게 보냈던 것과 같은 결혼외교의 하나였던 것이다.

수개월이 지나서야 공주의 일행은 멀리 티벳 고원이 보이는 국경지대에 다다랐다. 잡힐 듯 보이는 산들의 모습은 먼 길, 기나긴 여행에 지친 일행들에게 체념 같은 심정으로 다가왔다.
‘그래 아무데면 어떠리 정들면 고향이라는데….’

지칠 대로 지친 공주도 이젠 고향에 대한 미련도, 미지의 나라에 대한 두려움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편히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운명의 만남

이제 곧 토번국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의 한 숨을 내 쉬고 있던 공주는 마차 밖 여기저기서 웅성웅성하는 소리를 들었다. 뭔가 몹시 소란스럽고 부산했다.
“무슨 일이냐?”

“다름이 아니오라 토번국왕께서 멀리 여기까지 공주님을 맞으러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래? 아직도 토번국의 왕궁까지는 멀다고 들었는데….”
왕이 자신을 맞으려고 멀리까지 왔다는 소식에 공주는 내심 기뻤다.
‘오만하지 않고 다정다감한 성격인가 보구나….’

공주의 일행과 공주를 맞이하려는 토번국왕의 화려한 행차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저 멀리 능선을 넘어 왕의 눈부신 행렬이 공주의 눈에까지 들어왔다.
“아!” 공주의 눈에 들어 온 송첸캄포의 모습은 과연 영웅의 풍모였다.

그는 이 험한 지형 속에서 생존하며 질긴 근성과 억센 기운을 자랑하던 수도 없이 많은 부족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달래서 거대한 토번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마침내 대당제국까지 공포에 떨게 만든 히말라야 산악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녀는 이제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송첸캄포 왕이 아버지인 당태종이 내린 비단 신랑예복을 입고 있음을 보고 더욱 안도할 수 있었다.
문성공주는 자신을 맞이하는 그의 뺨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남몰래 웃음 지었다.

‘그래 이제 나는 토번의 어머니가 된 거야. 이제 내 고향은 토번이고 나의 뼈도 여기 묻힐 거야.’
송첸캄포는 공주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교양 있는 몸가짐에 감탄했다.
“나 토번왕 송첸캄포가 대당의 공주를 맞이하노라.”

왕의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리자 양쪽의 수행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왕은 공주를 데리고 수도 라싸로 들어갔고 곧 왕궁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문성공주를 국모로 맞이하는 토번의 백성들도 모두가 기뻐했다. 그들은 문성공주를 따라온 승려, 기술자, 의사, 문인, 악사, 군인, 도공, 세공사 등의 화려한 모습과 현란한 중원의 문화에 매료되었다.

당시 공주의 나이는 24세 전후로 추정된다.

청장고원의 꽃

왕은 공주를 극진히 대했다. 그는 공주를 위해 궁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포탈라’ 궁이다. 1,000간의 궁실과 36만여㎡에 이르는 방대한 궁전을 그 높은 산악지역에 지었다는 것은 송첸캄포의 막강한 제왕적 권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송첸캄포는 포탈라 궁의 완공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오랜 전쟁과 정복군주로서의 긴장감에 지쳐있었던지 공주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겨우 3년밖에 누리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진실한 사랑과 존경으로 자신을 대해주던 왕의 죽음으로 공주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왕에 대한 그리움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티벳의 절경을 보는 것으로 유일한 위안을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깊은 산속 어느 농가의 아낙네가 방아를 찧느라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저 집 옆에는 저렇게 큰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데 어찌해서 저 여인은 물레방아를 만들어 쓸 줄 모를까?’

공주는 중원에서 데려온 기술자에게 명하여 그 집 옆에 물레방아를 만들어 주었다. 여인은 곧 그 중노동에서 벗어났고 공주를 칭송했다.
공주는 그 일이 있은 후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나는 아직도 이 나라의 어머니야. 비록 왕은 돌아가시고 새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나는 송첸캄포의 아내로서 이 나라 백성의 아픔을 헤아리고, 벗은 자가 있으면 옷을 지어 입히고 주린 자가 있으면 나누어 주고 아직 문물의 이치를 잘 몰라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르쳐 주어야 해. 그것이 내가 할일이고 그것이 돌아가신 대왕의 뜻일 거야.’

이후로 공주는 일생을 티벳인들의 생활 개선에 몸을 바쳤다. 농업기술의 전파로 티벳의 식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은 물론 야금, 도자기, 직조, 의술, 문화예술, 학문이 눈부시게 발달되었다. 아울러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공주로 인해 티벳의 불교는 비로소 화려한 꽃을 피게 되는 것이다.

문성공주는 왕이 떠난 후에도 40년을 더 살며 토번(티벳)의 딸로 생을 다했다. 지금 티벳에는 포탈라 궁을 위시해 문성공주의 덕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전국에 즐비하다. 그녀는 실로 중원과 티벳 우호의 상징으로 영원히 남을 ‘청장 고원의 꽃’이다.
현재 중국에 의해 강점돼 있는 티벳을 보며 그녀의 혼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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