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고상한 아름다움, 영화 같은 인생

  
 
  
 
그레이스 켈리는 1929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명문가에 태어났다.
천사처럼 예쁘던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자 미의 여신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게 됐다. 170cm의 늘씬한 키에 화려한 금발, 푸른 눈의 전형적인 북유럽 풍 백인 미녀였다.
극작가였던 숙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연극·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1951년 ‘열 네시간’이라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23세(1952년)에 ‘하이눈’에서 게리쿠퍼의 아내 역으로 주연을 맡아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1954년에는 영화 ‘갈채(country girl)’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어 단순히 예쁘기만 한 여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보였다.
이후 1956년까지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정숙하고 현명한 아내 역을 맡아 청순하고 우아한 이미지로 영화팬들에게 각인됐다.


운명의 모나코

유명한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다이얼 M을 돌려라’(54년)에서 종전의 청순한 이미지를 탈피하며 관능적인 매력을 발산한 그레이스 켈리는 그 해 영화촬영과 칸 영화제 참석을 위해 유럽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모나코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로 총 길이가 4km밖에 되지 않는 인구 4만여 명의 초미니 국가다. 주로 관광과 카지노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 한가로운 지중해의 오후를 즐기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영화 스텝 중 한명이 말을 걸었다.

“이봐요 그레이스, 오늘 누구 소개해 줄 사람이 있는데….”

“누구요? 영화 관계자들이라면 웬만한 사람들 다 만나 본 걸로 아는데….”
“글쎄 함께 가보면 알아요.”
어느 파티 장으로 안내된 그레이스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제가 소개를 부탁드린 사람입니다. 저는 레이니에 3세라고 합니다.”

썩 미남은 아니지만 다정하고 세련돼 보이는 이 남자는 31세의 총각으로 모나코 영주였다.
“마치 여신이 내 앞에 있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나온 영화는 모두 보았을 정도로 그레이스양의 팬이랍니다. 실제로 보니 더 아름답군요.”

레이니에의 칭찬에 그레이스는 특유의 우아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레이스와 레이니에의 만남은 그렇게 파티에서의 짧은 대화로 끝나는 듯했다.

영주의 구애

며칠 후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두 사람은 영화제 행사에서 다시 마주쳤다. 레이니에 3세는 첫 만남 이후로 이미 그녀를 자기 배필로 맞을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그 자리에서 젊은 영주는 그레이스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 한다.
그레이스는 갈등상태에서 어떤 확답도 하지 않은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레이니에 3세는 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말았다. 그레이스를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젊은 영주는 그레이스에게 편지와 인편을 통해 자신의 불타는 사랑을 고백했다.
‘당신을 그냥 잊을 수가 없소.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번에 당신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를 보며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느꼈소. 당신이 보고 싶으면 영화를 보는데 아마 수 백 번은 본 것 같소.’
이렇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던 영주는 드디어 1955년 12캐럿의 다이아 반지를 보내며 정식으로 청혼하기에 이른다.

‘아름다운 여자는 많고도 많지만 지혜와 이지적인 기품, 왕비가 가져야할 우아함과 기품까지 간직한 여자는 흔치 않아. 그레이스가 우리 모나코의 안주인이 돼 준다면 이 나라의 이미지도 엄청나게 올라갈 거야.’
레이니에 영주는 이렇게 생각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레이니에와 많은 대화를 나눠 본 그레이스도 영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배우로서의 명성과 지금껏 쌓아 온 성취도 포기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레이스가 1956년 프랭크 시나트라와 공연한 영화 ‘상류사회’를 보던 레이니에 3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화 속 그레이스의 손가락에는 분명히 자기가 보낸 다이아반지가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그레이스에게 연락이 왔다. “그래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모나코 왕비 되다

그레이스가 모나코 영주와 결혼한다는 소식은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어 놨다. 특히 세편의 영화를 함께 했던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감독은 “앞으로 도대체 어떤 여배우와 영화를 찍는단 말이야?”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녀를 흠모하던 수많은 남자배우와 상류층의 남성들도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국을 떠나면서 남긴 그녀의 한마디, “어떤 성공이나 명성도 그 기쁨을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레이스의 결혼은 전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다. 세계의 여성들은 그레이스가 신데렐라 같은 동화 속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 냈다며 부러워했다.

전 세계의 TV와 라디오, 신문은 300개의 방을 갖춘 호화로운 궁전에서의 결혼식을 대서특필했다. ‘세기의 결혼식’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은막의 스타’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식 이후 왕궁안의 생활은 극히 엄격했고 형식적이었으며 연일 ‘뭔가 캐내려는’ 언론의 등살에 그레이스는 심신이 지쳐갔다.

거기다 할리우드에서는 영화출연 제의가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스트레스와 영화 출연에 대한 의욕으로 몹시 힘들어 했지만 이를 잘 극복해 냈다.
연이어 태어난 아이들은 그레이스 부부에게 큰 위안이 됐다. 캐롤라인 공주와 아들 알버트 2세, 그리고 훗날 유럽 상류사회의 스캔들 메이커이자 악동으로 소문나게 되는 막내 스테파니 공주가 그들이다.

그레이스는 점점 자신의 생활에 적응해 갔으며 할리우드와의 교류도 일체 접고, 모나코 공국의 안주인으로 조용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레이스의 결혼생활은 어언 25년으로 접어들었다. 부부의 일상은 말썽장이 스테파니를 꾸짖는 일로 하루해가 짧았다고 한다. 그만큼 부모의 골치를 썩인 막내딸이었지만 스테파니에 대한 부부의 사랑은 각별했다.

꽃은 지고…

1982년 9월 14일 왕실의 이런저런 행사에 지쳐있던 그레이스는 딸과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고 스테파니가 모는 스포츠카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몬테카를로 해안 절벽은 언제 달려도 절경이구나. 그나저나 스테파니 힘들텐데 이제 운전 교대하자꾸나. 아무래도 이런 위험한 길은 내가 낫겠어.”

그러나 스테파니는 운전을 고집했다. 이윽고 급한 커브길이 나타났고, 스테파니는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둘이 탄 스포츠카는 절벽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스테파니는 가벼운 부상에 그쳤지만 그레이스는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53세였다.

1950년대 은막의 세계적인 스타였고, 후에 모나코 영주의 아내가 된 영화같은 인생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다. 스테파니는 줄곧 이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면(裏面)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영주와 결혼하자 모나코의 산업과 이미지는 크게 향상됐다. 수입 감소로 위기에 몰려있던 모나코는 그레이스와 영주의 결혼을 통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관광 수입은 이전보다 몇 갑절이 올랐고, 프랑스에 흡수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는 이를 미리 간파하고 레이니에 3세에게 “그레이스 켈리와 결혼만 한다면 모나코는 살 수 있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레이니에의 청혼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다는 이야기다. 한편, 그레이스의 죽음은 카지노 산업에 부정적이어서 카지노 규제를 주장했던 그녀에게 마피아들이 복수한 것이라는 암살설이 나돌고, 왕비가 사실은 남몰래 애인을 30명이나 두었던 ‘뜨거운’ 여자여서 우아함과 기품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화사한 햇살 같은 미모와 품위,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모범적인 생활은 이런 뒷이야기들을 일축하게 만든다.
그레이스 켈리야 말로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불멸의 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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