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 31일, 휴가지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자녀들은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받게 된다.
“왕세자님. 다이아나 공주(이때는 이혼한 상태였으므로 왕세자비가 아닌 공주라 불렸다)께서 비운의 사고로 돌아가셨답니다. 바로 오늘 새벽의 일이랍니다.”
“........”

“교통사고라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정보가 더 들어와야 알겠습니다.”
영국은 그날 아침 마치 전쟁이라도 터진 양 공황상태에 빠졌고, 모든 공식 행사가 취소됐다. 다이아나에 관한 관심이 거의 중독 수준이었던 영국인들은 이후로도 엄청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다이아나의 최후를 함께 했던 사람은 이집트 출신 세계적인 백화점 재벌의 아들 ‘도디 알 파예드’ 였다. 이 부분, 즉 영국 왕실의 왕위계승권자의 어머니가 이방인 남자와 함께 했고, 또 그의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영국인들은 또 한번 놀랐다.

이 부분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영국 왕실에 의한 살해 가능성 제기 등 이후로도 ‘암살설’ ‘음모설‘ 끊이지 않는 이유가 된다.

다이아나는 결혼 전 유치원 보모와 시간제 아르바이트 가사도우미 일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귀족이 아닌)평민 출신으로 왕세자비가 된 신데렐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다이아나는 영국에서 천년이나 내려온 유력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 스펜서 백작의 조상은 스튜어드 왕가에 이어지고 어머니 역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귀족가문에 이어진다. 찰스의 할머니와 다이아나의 할머니가 잘 아는 사이였고, ‘왕족이거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개신교 또는 영국 성공회 신도이며, 결혼 적이 없어야 한다.’는 왕세자비의 조건에 맞았기 때문에 결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무지개 빛 신혼

영국인들 뿐 아니라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던 그 비참한 사고로부터 18년 전인 1981년 7월 29일, 다이아나는 찰스왕세자와의 이른바 ‘세기의 결혼식’으로 세계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적이 있었다.
순박해 보이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갖춘 20세의 어린 신부는 순백의 드레스에 분홍빛 뺨을 하고 수줍은 듯 행복한 듯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박에 세계인의 시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찰스는 이때 32살이었다.

물론 훗날 그 지나친 관심과 파리처럼 들끓는 파파라치들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가야 했지만…
출발은 좋았다. 열렬한 군중들 속에 무개차를 타고 행진하는 이들 부부의 앞날에, 영국의 앞날에는 환한 무지개가 걸려있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찰스를 붕어빵처럼 쏙 빼다 박은 윌리엄에 이어 해리 왕자가 태어나자 왕실에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영국 왕실에서도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유고 시 왕위를 물려받을 ‘찰스’ 왕세자에 이은 왕위계승 서열 2위인 왕자들이 태어남으로 인해 ‘후사’에 대한 걱정을 덜었던 것이다.
예쁘고 건강하고 소탈한 이미지에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다이아나 왕세자비는 이모저모로 보나 왕실의 복덩이였다.

게다가 다이아나에게 보내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왕실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던가!
다이아나는 영국 왕실의 안주인으로 대외적으로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선과 봉사활동 대사로 활약하며 세계인들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었다.

특히 영국 왕실에 대한 아련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다이아나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전통과 권위, 고전을 느끼게 하는 아이콘이었다.

엇갈리는 사랑

그러나 결혼 3, 4년이 흐르면서 찰스와 다이아나 사이에는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찰스는 노골적으로 다이아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첫 사랑이었던 ‘카밀라 파커 불스’에 집착했다.

이미 유부녀가 되어있는 카밀라는 패션 감각도 형편없고 외모에서도 다이아나에 크게 못 미쳐 영국 언론들에게 ‘못난이’ ‘추녀’로 통하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찰스의 카밀라 사랑은 유난했다.
다이아나는 소외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즈음 영국 언론들은 다이아나의 시무룩한 표정과 어딘지 슬퍼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 해 신문에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내보내곤 했다.

다이아나는 이때 승마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녀의 최초의 스캔들이 발생한다. 다이아나는 찰스와 카밀라와의 외도에 신경이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폭식증에 빠져버린다. 한동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입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체중도 상당히 불어 몸매도 망가졌다. 그 모습을 보면 또다시 스트레스가 몰려와 다시 먹을 것을 찾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저기… 마음이 그렇게 괴로우시다면 가까운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털어버리시는 것이….”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다가 온 승마교관 ‘제임스 휴이트’는 곧 다이아나의 사랑으로 자리 잡았다.

찰스는 찰스대로, 다이아나는 다이아나대로 외도가 이어졌다. 그들의 엇갈린 사랑은 영국의 선정적인 대중언론에 집요하게 까발려졌다. 거리거리에 있는 가판대마다 왕세자 부부의 ‘연애행각’을 비웃었다.

여왕 엘리자베스와 보수적인 영국 내각은 왕세자 부부의 이런 모습에 어지간히 속을 끓여야 했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이들 부부의 외도는 5년간이나 이어졌다. 사실상 마음이 멀어진 부부였지만 그들이 왕실의 일원이고 특히 왕세자비부부였으므로 이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엘리자베스 여왕도 이들 부부가 더 이상의 결혼생활이 무의미하다는 결혼을 내렸다.
제임스 휴이트와의 염문설 와중에 터진 ‘제임스 길비’와의 선정적인 농담이 녹취록으로 공개되자 왕실의 망신을 극에 달해 엘리자베스의 최종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1992년부터 별거에 들어간 부부는 그 해 12월 9일 부부는 정식 이혼에 합의한다. 다이아나 왕세자비는 이혼과 함께 ‘왕세자비’의 직함을 반납하고 ‘웨일즈의 공주 다이아나’로 격하됐다.

스캔들 있어도 영원한 왕세자비로 기억

다이아나는 그 후에도 간간히 염문설을 흘리며 언론을 장식했다.
반면 찰스왕세자는 오로지 카밀라 뿐이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다이아나에게 관대한 편이다.
‘다이아나의 진정한 사랑은 찰스 왕세자뿐이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외면하는 찰스에 대한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다이아나의 가련한 영혼은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일 것이다.

결국 1997년 8월 31일 다이아나는 새로운 애인 도디 알 파예드와 교통사고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다이아나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됐지만 영국인들이 체감하는 그녀의 체온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스캔들과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대한 보도에 익숙하지만, 생전에 적십자 활동을 통해 보여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다이아나의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왕세자비로서의 ‘행사를 위한 행사’ ‘보여주기 위한 자선’ ‘하는 척만 하는 실천’아니라 진솔하고 따뜻하고 진심이 담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직 건강하고 찰스 왕세자도 나이가 벌써 60이 돼 가기에, 영국왕위는 다이아나가 낳은 윌리엄이 바로 이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다이아나 스펜서는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갔지만 현대 여성으로서 가장 존재감이 높은 여성 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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