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조마조마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멧돼지입니다. 평소 버릇대로 아침에 화장실을 가는데 그 길을 따라 심어진 수선화 한 무더기가 완전히 파 헤쳐진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조금 더 가자 이번에는 통통하게 올라오던 죽순 두 개가 밑동까지 사라지고 껍질만 남아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랬을까? 딱 그 자리만 파헤쳐진 것과 죽순의 껍질을 벗겨낸 모양으로 봐선 주둥이와 앞발을 꽤 정교하게 사용하는 짐승이라고 여겨질 뿐 짐작이 잘 가지 않더군요. 풀숲이라 발자국은 남지 않는다 해도 멧돼지라면 주둥이로 땅을 갈아댄 흔적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았고, 죽순 껍질을 까먹은 걸로 봐선 너구리같은데 그놈들은 땅을 파지는 않거든요.

이상하다 생각하며 우선 급한 볼일을 보고 난 다음 뒤 숲을 한 바퀴 돌아보며 본격적인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밭 여기저기에 잘리고 꺾인 죽순들이 또 여러 개 드러났습니다. 이미 한 발 가량씩 자란 죽순들을 이빨로 꺾어서는 연한 윗부분만을 먹어치운 것인데 죽순의 밑동엔 사이가 넓은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러면 너구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멧돼지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던 차에 한군데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습니다. 바로 똥! 아주 굵다란 것으로 보아 이제 멧돼지임에 틀림없었지요.
멧돼지라고 확인하는 순간 걱정이 앞섰습니다.

 냇갈 건너 형님 댁에는 지난 겨울내 멧돼지가 와서 뒷마당 앞마당 화단을 다 갈아놓고 난리를 쳤는데 이제 그놈들이 우리 집 쪽으로 들이닥쳤으니 또 얼마나 파헤쳐 놓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침 먹은 후에 아내와 함께 파헤쳐진 수선화 알뿌리들을 대강 수습하고 구덩이를 매운 후에 피해를 입은 죽순들도 대강 정리를 해두었습니다. 집 주변이 멧돼지가 워낙 파헤치기 좋은 화단으로 되어있고 그 너머에는 감자밭 더덕 밭이 연달아 있는데 이놈들이 또 온다면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지 내내 막막하기만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마 또 오기야 하리라구?”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애써 불안을 덮기도 했고요.

그 설마가 늘 탈인 것은 다들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또 설마 했더니 보란 듯이 다음날 밤 저희 집 화단이 뒤죽박죽이가 돼버렸습니다. 평소보다도 일찍 화장실에 가 앉아서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는데 희끄무레한 여명 속에서 처참해진 모습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이번엔 특히 화단의 여기저기에 색깔 맞춰 심겨졌던 튤립들이 멧돼지의 먹이가 됐습니다. 봄내 이것들을 가꿔냈던 안식구의 상심할 모습을 대할 일이 우선 당장 커다란 걱정거리입니다. 차라리 감자밭이나 더덕밭을 조금 파헤치고 말지 하필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화단이라니-.

그렇지만 할 수 없이 방에 들어와 아직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죠. 상황을 전해들은 안식구는 처음에는 눈만 허공에 매단 채 일어나지도 않더군요. 그렇게 한 30분 있더니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얼이 빠진 듯 화단을 서성이는군요. 그 마음을 알기에 옆에 가지도 않고 가만 놔 두어 우선 진정되기를 기다립니다. 그래 할 수 없이 아침밥도 제가 했다는 거 아닙니까, 압력솥에 밥 앉혀놓고 2주 만에 집에 아들녀석이 와있기에 달걀찜이라도 하나 하려고 그릇에 달걀을 깨는데 그제야 아내가 부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내쳐 밥 다 먹고 설거지 끝내고 커피 한 잔 먹을 때까지 굳게 닫힌 그 어여뿐 입에선 말 한마디 없습니다 그려!

사실 너무 기막혀서 제가 글을 이렇게 쓰긴 합니다만 남편으로써 대책이 없다는 게 제 스스로 답답한 노릇이기도 해서입니다. 이럴 땐 더 이상 피해가 나지 않을 확실한 대비책을 아내 앞에 내어 놓아야 이 상황이 정리되는 것인데 그게 없으니 이게 무슨 꼴이랍니까? 네모반듯한 감자밭 더덕밭이라면 이왕에 있는 전기목책기를 그 쪽으로 옮겨 설치하면 끝이겠는데 이거는 사방군데 미로처럼 길을 만들고 곡선 직선으로 층위가 다르고 또 섬처럼 이곳저곳 무더기무더기 동산을 이룬, 아내의 마음만큼이나 아기자기한 화단을 무슨 수로 대비한단 말입니까?

화단엔 그러나 아직 파헤쳐지지 않은 튤립이 많이 남아있고 주먹 만씩 할 백합 구근이 여기저기 모양 갖춰 심겨져서 이제 필 날이 머지않은데 오늘밤 틀림없이 잔치를 벌이려고 멧돼지식구들이 또 또 내려오겠지요? 아내에게 우선 시기는 조금 이르지만 튤립구근들을 다 캐서 갈무리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딴엔 대책인 셈이지요. 그러면 백합은 어찌할거냐고 묻는 눈치더군요. 이럴 때 제가 잘 쓰는 막고 품는 방법! 밤에 불침번을 서서 멧돼지를 막아내겠노라고 했습니다. 우선 당장 그 수밖에 방법이 없잖습니까? 저는 사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하루나 이틀 한뎃잠 자면서 멧돼지를 막아내기 위해서, 아니 다시는 제 영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저는 대밭의 실한 대 한가락을 베어냈습니다. 죽창! 혼 좀 나봐라 이놈의 멧돼지들, 오늘 밤 아내의 복수전도 펼치고 너희들의 고기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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