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기일이었습니다. 대서와 입추사이, 중복과 말복사이, 그야말로 여름의 더위가 최고조일 때입니다. 다른 해도 물론 덥지만 작년에 윤달이 든 덕분에 음력과 양력이 달포가까이 벌어져서 이 절기에 제사가 돌아온 것입니다. 꼽아보니 꼭 45년이 흘러갔습니다. 아버지는  훌륭한 가장이셨죠. 집에서건 동네서건 아버지가 없으면 대소사를 치루지 못한다 했으니까요. 그만큼 재주 많고 힘이 센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양반도 술은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더군요. 그러니까 내리 삼년정도는 술 중독자로 사셨던 겁니다. 그 기간에 보여준 많은 일들을 두고 사람들은 정 끊기 위해서 저러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버님 기일이 돌아오면 괜스레 마음이 바빠집니다. 마을에 큰 형님 댁이 있으니 제사가 제차지 일리 없지만 그래도 해야 할일이 많습니다. 큰 형님도 아버지 나이보다 겨우 10년을 더 살고 그 역시 술로 예순 아홉에 죽은지가 금년 째 5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할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조카들에게 벌초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이고 그것을 또 옆에 사는 둘째 형님에게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라 벌초는 제가 해야 합니다.

아버지 기일이라고 서울에 사는 또 한분의 형님과 누님이 내려오니 그전에 밭은 물론 집도 좀 말끔하게 해놔야겠지요. 제 하고 사는 것이 허랑하지 않다고,  제사 앞두고 이발하듯이 밭도 집도 단정하게 해놓고 싶더군요. 그래서 부지런을 떤 덕분에 김은 대강 큰 목이 숙어졌고, 다음은 밭 주변과 집 앞의 풀들 깎느라 한 삼일을 품을 버렸습니다. 덕분에 주변이 좀 환해져서 마음이 개운했습니다. 그러니 어서 서울의 형님과 누님이 보고 싶어지더군요.

옛날 어리고 철없을 적에는 쌀밥 먹고 떡 먹기 위해서 제사를 기다리기도 했겠지만 나이 먹어가면서는 형제들 볼 마음으로 제사를 기다립니다. 저희 형제는 칠남매로써 제 위로 형님 세분 누님 세분이셨는데 큰형님 큰누님 둘째누님이 5년 이쪽저쪽해서 죽고 이제 넷이 남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이 다 보고 싶어도 아버지 어머니의 제사를 넷이서만 맞이할 뿐입니다. 다른 형제의 제사도 마찬가지지요. 아버지 제사만 이렇게 한여름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을에서 봄에 걸쳐있습니다. 여름제사! 지내본 분들은 아시겠지요. 떡이고 나물이고 간에 미리 해놓을 수가 없으니 당일 오후에 몰아서 해야 되고 불앞에 앉아 꼬챙이며 적을 굽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입니다. 지금은 냉장고 덕분에 사정이 비할 수 없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더운 것만은 이겨먹을 장사가 없지요. 자연 제사도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냅니다. 저희 집이 장손이라 아버지 어머니 계실 적에는 제사가 전부 열세 번이었고 그중 여름제사는 일곱 번입니다. 그러던 것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형님들의 설득으로 어머니가 윗분들의 제사를 한날한시로 몰아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의 초상적 모습이야 바로 엊그제 일이니 기억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오직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초상은 45년이 흐른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기억 속에서 흘러갑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쏟아 놓아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아버지는 시집간 큰 누님만 빼고 식구들과 이웃어른 한 두 분이 계신 중에서 임종을 하셨는데 그 어른이 아버지 적삼을 벗겨들고 밖에 나가 무엇이라 외치며 지붕에 옷을 던지던 게 생각납니다. 소렴하고 저승사자들을 위한 밥을 지어 울타리 밖에 지푸라기 깔고 차려놓고, 보름 갓 지난달이 있어 어둡지 않은 밤을 동네가 참 조용히 술렁대었던 것 같습니다.

점심 때 쯤이나 형님 누님이 도착할 줄을 알고 시방 어디쯤 오고 있냐고 전화를 했더니 아직도 서해대교랍니다. 문산에서 아침 7시에 출발했는데 휴가철이라 차가 밀려 그 지경이니  몇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하여튼 무려 8시간이나 길에서 정체되다가 형님이 와서 저는 미리 산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묘를 하고 묘 앞에 따라놓은 술을 같이 음복하고 늘 그렇듯이 산소 앞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피서철이라 산에서 내려다뵈는 마을엔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바다 쪽으로 쌓은 마을 앞의 방파제와, 그것과 직선이 되게 옆으로 쌓은 둑을 지금은 차들이 늘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그 둑이  마을로 들어가고 나가는 길이기도 해서 얽힌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제 기억에 삼복더위에 상을 치르느라 마당에 차일을 치고 사람들이 각기 일을 맡아서 북적이며 땀 흘리던 모습들이 생생하고, 발인 날 저 둑에 가득 펄럭이던 색색가지 만사(만장)들이 줄을 잇던 모습도 보이는 듯합니다.
지금 저 해수욕장의 노송 밭에서 밴 소나무로, 이웃면에 사는 농방(장롱을 짜는 곳)을 하시던 고종형님이 와서 마당 한 켠에서 사개 틀어서 관을 짜던 일, 동네 청년들이 밤을 새우고 낮을 도와 상여에 쓸 종이 꽃을 만들던 일, 새끼를 꼬아 일일이 흰백지로 감아서 관을 묶을 끈을 만들던 일, 누님들은 울고 어머니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눈이 허공에 가있는 듯한 모습들, 부고를 나르느라 이 동네 저 동네로 분주히 오가던 사람들, 예전에도 초상은 가난 탄다 했지만  잘 죽기위해 잘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이 여름에 새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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