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입니다. 칠석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농사꾼들의 명절입니다. 미끈유월 어정칠월이라 - 유월은 밭에서 나오는 것이 거의 없으니 미끈유월인데 게다가 논밭에서 뙤약볕아래 힘들게 김을 매야합니다. 그것이 달포이상 이어지고 나면 칠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어 칠석이요. 이내 백중입니다. 이제 들엔 곡식들이 빼곡하게 자라므로 풀맬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칠월은 아침저녁으로 뒷짐 지고 어정거리며 논밭이나 둘러보는 겁니다.

이런 한가한 달을 근면하지만 신명 좋은 우리민족이 그냥 보낼 리 없습니다. 특히 백중은 호미씻이 같은 풍속이 전국에 걸쳐있고 지금도 밀양백중놀이는 그 이름이 나라 안에 자자하지요. 예년만은 못해도 제가 사는 이곳에도 이날만큼은 동네마다 술멕이들을 합니다. 모정주위에 작은 차일을 쳐놓고 음식들을 장만하고 나이 드신 어른들은 앉아 음식을 대접받습니다. 한쪽에선 윷판이 벌어지고 흥이 나면 북장구 꺼내다가 풍물을 잡힙니다. 저 사는 곳이 마을과는 좀 떨어진 곳인데 이른 아침부터 들려오는 확성기 방송소리로 짐작컨대 아마도 술멕이 한다는 소리 같습니다.

한 2~3년 하지 않았었는데 그러다보니 그냥 넘겨버리기 섭섭했던 모양이지요. 집에 앉아 방송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저는 술멕이도 좋지만 음력칠월이 왠지 다 좋더이다. 견우직녀 만나는 애절한 로맨스도 좋고 그이들이 흘리는 눈물, 그 소나기도 좋습디다. 또 칠석하면 늘 생각나는 게 황진이의 시입니다. ‘누가 곤륜의 옥을 찍어/ 직녀 얼레(빗)만들었나/ 견우 한번 떠난 뒤에/ (수심에 겨워 푸른) 허공에다 던졌구나’ 제목이 아마 반달이지 싶습니다.

시가 말하는 이때는 칠석의 밤이 지났을 터이므로 달은 반달에서 벗어났거나 보름지난후의 하현의 낮달이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황진이가 얼레로 머리를 솰솰 빗다가 생각하기를 ‘님 도 떠났는데 단장은 허여 무엇할꾸’ 하고 빗을 던졌겠지요. 그 상심의 마음위에 뜨인 반달이 빗과 겹치자 번개처럼 직녀의 처지와 자기의 처지를 한데 묶어버리는 시적 감성이라니 - 그 탁월성은 누가 감히 쫓을 수가 없어서 시는 빼어나게 느껴지며 편안합니다.

제가 칠월을 좋아하는 것은 칠월이 가져다주는 어릴 적의 분위기를 못 잊는 탓이 큽니다. 특히나 어머니가 따다가 쪄주시던 옥수수. 옥수수는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선선한 기운이 있을 때 먹어야 제 맛인데 내남없이 지금은 너무 일찍들 해내버려서 이제는 먹을 게 없습니다. 저희 집만 해도 올해는 꽤 많이 심었는데 그걸 시차를 두고 심기 귀찮다고 한꺼번에 심어버려서 딸 때도 한꺼번에 몽땅 쏟아졌습니다.

옥수수와 함께 뜯어오시던 고구마순 나물 벗기는 일도 좋아했습니다. 통통하게 쭉쭉 뻗은 고구마 순을 쫙 벗기면 아주 작은 서근거리는 물방울들이 코로 뛰어 들어 오면서 느껴지던 그 푸른 시원함이라니- 하여 지금도 고구마 순 나물을 좋아하고 고구마순 김치를 좋아하고 고구마순 줄거리를 한 아름 끊어다 놓고 나무 밑에 앉아서 순을 따고 껍질을 벗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제도 멧돼지가 파헤친 곳의 고구마순 들을 수습 해다 놓고 나무 밑에 앉아 그걸 다 다듬었습니다. 점점 더 앉아서 잔잔하게 하는 칠월의 이런 일들이 편안하고 좋아집니다. 어릴 적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옆에 지켜보고 앉아 있을 때의 아늑한 편안함을 우리아이들은 느끼지 못할 겁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가진 정서적 지위를 이제야 저는 가지게 됐는데 제 아이들은 이미사춘기도 훌쩍 벗어나 버렸거니와 멀리 나가 살기 때문입니다. 어정칠월은 어정대며 엉덩이로 뭉그적거리는 사이 농촌의 정서는 세대가 단절되거나 도시에 너무 멀리 있습니다.

백중 지나고 꼭 한 달 뒤가 추석 이지요 술도 먹고 어정거리는 사이에도 김장채소농사는 빼지 않고 해야 됩니다. 소나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는 뒤란의 작은 텃밭은 어쩔 수 없이 괭이나 쇠스랑으로 파헤칠 수밖에 없는데 이럴 량이면 한 여름 못지않게 땀을 흠뻑 쏟아야 합니다. 간간히 내리는 소나기를 의지해서 배추 무를 심어야하고 마르지 말라고 짚을 덮었다가 싹이 나오면 조심스럽게 걷어내야 합니다. 선선해져야 생육에 맞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제부터는 햇볕이 아쉬워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순만 뜯어먹던 고구마도 일찍 심은 집은 두둑에 쩍쩍 금 벌어지는 곳을 파헤쳐 한 두 개씩 따내어 반 바구니나 채워서는 솥에 찌게 됩니다. 옥수수가 군입정이라면 고구마는 끼니였으므로 가을의 첫 수확물이라고 해야겠지요. 고구마 순으로 하여 칠월이가고 고구마로 하여 팔월과 함께 가을이 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칠월은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움직이는 정중동의 계절인데 그 움직임이란 것도 무언가 자꾸 안타까워지는 그런 움직임입니다.

일 년을 통 털어 놓고 볼 때 처음 반년이 다음 반년에게 자리를 넘기는 애틋한 시기여서 낮과 밤 해와 달이 크기와 밝기를 달리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햇빛은 아쉽고 백중의 달은 저리 밝은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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