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몇 번에 여름더위가 많이 숙어졌습니다. 한낮엔 아직도 30도 가까이 오르내리지만 어차피 점심 무렵엔 일손을 놓고 쉬게 되므로 그 더위 또한 힘이 세게 느껴지지 못한 것입니다. 벌써 오후3시만 넘어서면 불어오는 바람이 그 결속에 서늘함을 담고 있어 아! 가을이구나— 하는 느낌이 저절로 듭니다. 예전에는 이런 날씨도 날씨지만 수수나 조 이삭이 숙어지는 모습에서, 그리고 마당을 가득 나는 고추잠자리의 모습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푸른 하늘과 흰 뭉게구름 등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모습이 많이 변했습니다.

저 사는 곳에서는 이제 수수나 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수지맞지 않고 귀찮기만 한 잡곡들은 일찌감치 뒤로 밀려나고 죽자 사자 고추나 깨 따위들만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중에도 고추가 단연 주인 노릇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마져도 농촌 인구의 고령화에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라 점점 그 양이 줄어들고 있는 듯합니다. 그럴수록 풀만 무성한 묵밭이 늘어납니다. 우선 저부터도 김매는 게 힘이 들어서 한 400평 정도나 밭을 쉬게(?) 했습니다. 그러니 예전 논밭에서 느껴지는 가을의 모습이 아쉬워지는 거지요.

백로가 가까워지면서 아침저녁 벌어지는 일교차와 습도 탓에 풀잎에 이슬이 참 많이도 맺힙니다. 말 그대로 희디흰 진주 같은 이슬방울입니다. 고무신 신고 바지 걷어 부치고 밭둑을 채 다섯 걸음도 걷지 않아서 신발 속에 이슬이 고입니다. 선득선득한 그 시원한 맛이 좋아서 부러 이슬을 훑듯 하며 걸어갑니다. 밭둑에 풀 베는 일을 빼곤 이렇게 이슬이 많으면 다른 일은 좀 느직하게 시작해야겠지요. 요즈음은 녹두를 따고 있는데 가뭄 통에 두 번을 따고 한번 또 딸만큼 까맣게 익었던 것이 소나기를 맞고 도루 파래진 감이 있더군요.

깨 벨 준비도 슬슬 하는 중입니다. 깨밭 주변의 밭둑을 베고 깨 베어서 아예 비닐하우스에 들여세워 말릴 수 있도록 비닐하우스 안에도 좀 치울 것 치워냈습니다. 추석 전에 양파모판 설치와 배추모종 옮겨심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벌초해야겠습니다. 명절 쇠이려면 이제 논둑도 말끔하게 깎아줘야 기분이 좋을 겁니다. 남의 동네에 있는 논이라 어쨌든 남보다는 논둑도 한번은 더 깎아서 늘 말끔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시월중순 무렵 나락을 베기 전까지 이제 한번만 더 깎으면 논둑은 마지막이지 싶군요.

평소의 일 그대로인데도 추석은 왠지 바쁘고 여유가 없습니다. 그게 다 경제적 여유와 관련된 것이어서 이겠는데 남보다 비록 없이 살아도 너저분하게야 살 수 있겠느냐는 결벽증 같은 게 작용해서이기도 할 겁니다. 어찌 보면 고단한 삶의 한 전형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감나무에 벌레 먹은 감이나마 하나씩 붉어지는 게 있어 따 먹어보니 제법 홍시 맛이 났습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지면 그라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감나무 밑의 풀을 다 베어 냈습니다. 나무 밑의 풀들은 일 년에 기껏 두세 번 베는 것이라 한 번씩 베면 그 긴 풀이 마르면서 풍기는 냄새가 좋습니다. 가을에 가까울수록 풀들도 영그는 것이라 풀에서는 향기가 나고 풀에 덮여있던 땅에서는 희미하게 땅의 냄새가 납니다. 하루에 한 번씩 감나무 밑을 가보면 여기저기 덜 붉거나 붉은 감들이 풀 섶에 뒹굽니다. 붉은 것은 입에 넣고 덜 붉은 것을 모아서 돌덩이 위에 놓아두면 이튿날 없어지기도 합니다. 너구리 몫이 된 것이지요.

푸르디푸른 땡감이, 겉의 하얗기 조차하던 색깔을 벗어던지고 붉어질 준비를 하는걸 보면서 더욱 가을을 실감합니다. 당나라 때 어떤 시인은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고 했는데 오동잎은 다른 나뭇잎보다 일찍 떨어지는 것이긴 해도 시인의 남다른 촉감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것 보다는 아무래도 가을은 풀벌레 우는소리에 그 아취가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백중의 밝은 달이 점차 하현으로 기우는 한밤중이나 새벽은 그야말로 벌레들의 잔치인 듯합니다. 멧돼지를 막아 볼 양으로 밭둑 길가의 가로등을 켜 놓았는데 멧돼지는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듯해도 풀벌레들은 그 불빛이 아주 좋은 모양입니다. 왜 그 어렸을 때 보리나 밀을 홀태에 훑어내고 나면 보릿짚 밀짚의 대궁을 하나하나 잘라 모아서는 여치 집 짓던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 여치 집에 깨끗한 풀을 조금 넣어놓고 밭둑 풀 섶에서 여치 한 마리나 잡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골몰하던 시절들 말입니다. 그래서 잡은 여치를 집에 넣어 서늘한 추녀아래 걸어두고 마루에 누워서 기다리면 스르륵 스르륵 날개를 비비며 울기 시작했죠.

한밤중,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끌려 가로등 밑을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낮에는 소리만 들리지 보이지는 않던 녀석들이 죄다 사람 있는 줄도 아랑곳 하지 않고 풀잎에 나 앉아서는 맘껏 울어대더군요. 손을 뻗어 가만히 집어 올려도 도망갈 생각도 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옳다구나! 이놈들을 잡아서 풀벌레 교향악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시인들이 시를 쓰지 않게 될라나요? 아니 되겠지요? 아무래도 이놈들은 그대로 놓아두어 버리는 게 더 좋은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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