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일이 막바지를 향해 숨 가쁘게 치닫고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온통 가뭄 때문에 상강절인데도 서리 같은 건 올 기미조차 없고요, 그래도 서둘러 가실들을 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군요. 일주일사이에 벼는 거의 베어지는듯한데 그것과 겹쳐 지금은 양파 심을 준비가 밭일 중엔 가장 중요한듯합니다. 저도 얼마 전에 갈아놓은 밭에 보리종자를 뿌려서 노타리를 해두었고 양파 심을 곳에도 거름을 뿌려두었다가 함께 노타리를 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흙이 분가루 같습니다. 올해 양파 모는 포트 모로 키워놨기 때문에 옮겨 심고 3~4일안에만 비가 와 준다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마침 돌아오는 주초에 전국에 걸쳐 비가 온다니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하여 아내와 함께 오늘은 양파 심을 곳에 비닐 씌우는 일을 했습니다. 양파비닐은 폭이 넓어서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혼자는 할 수 없습니다. 비닐 통속에 줄을 넣어서 양쪽에서 잡고 끌고 다니며 비닐을 펴야 되고 삽으로 흙을 펴서 여러 군데를 많이 눌러 주어야합니다.

늘 같이 하는 일이지만 올해는 안식구가 더 힘들어 하는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나이는 저보다 한 살밖엔 어리지 않지만 생일이 빨라서 저랑 도긴개긴이고 농사를 짓고 살아도 거칠고 힘든 일을 얼마 해 봤어야지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저처럼 일이 뼈에 박힌 게 아니어서 애를 삭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같이 일하다보면 종종제가 애성받이가 돼서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살살 구슬리고 달래기도 합니다.

오늘도 역시나 노타리한 밭에 돌이 많이 있다는 둥 깻 대가 마구 삐져나와서 짜증난다는 둥 인상을 찌푸리며 삽질을 하는데 봐 허니 여간 어설프고 하찮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것들이 다 남편 탓인냥 말을 하는군요. 저는 늘 아내사랑 하는 마음이 넘쳐서(!) 웬만하면 거친 일은 덜 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양파비닐도 바람에 날리지 않을 정도로만 널찍널찍 달아나며 흙을 누르고, 그렇게 해서 1차로 비닐 펴는 것만 아내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내는 다른 하고 싶은 일 하라고 보내고 본격적인 마무리는 제가 하는 거지요.

그래 오늘도 역시나 아내를 살살 달랩니다. 반절도 하지 않았는데 반절도 더 했다고 너스레를 떨어줄고 한 두룩 비닐을 씌우고 나면 조금씩 쉬라고 저는 세 번이나 감나무 밑에 가서 홍시를 따는 척 했답니다. 이런 줄 나이 먹어서 곰살갑지도 않은 저 마누라쟁이가 알기나 할랑가요? 일이 거의거의 끝나갈 즈음에는 “보소, 옛말에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 하다고 하더니 인제 거의 다 끝나지 않았남?” 말했더니 그제는 얼굴이 조금 펴지고 생기가 돌고 웃음기마저 띄고, 원내 참 내원!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려.

저한테 쌀을 사다 자시는 분들의 쌀 주문이 들어와서 엊그제는 나락 방아를 조금 찧어 왔더랬습니다. 그런데 올해 나락농사 수월하게 지었다고 속으로 생각했더니 그 말 대접인지 그만 방아 찧는 데서 사달이 났습니다. 제가 사는 면에는 정미소가 두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미소들이 나락 건조기를 돌리느라고 지금처럼 벼를 벨 때는 방앗간을 돌리지 않는 겁니다. 암지나 나락 다 베어서 건조 끝난 다음에야 방아를 찧으므로 11월 달이나 돼야 하는데요, 저처럼 조금씩 나눠서 빨리 찧어야 하는 사람은 애가타지요. 소비자들의 주문을 빨리 들어주어야 하니까요. 올해도 할 수 없이 다른 지역의 방앗간을 수소문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이웃면의 한곳에서 찧어 줄 테니 나락을 가져오란 말을 들었습니다. 얼씨구나 하고 제 차에 1톤 마대자루 하나를 싣고 득달같이 달려갔죠. 그리고는 무탈하게 방아를 찧어왔습니다. 집에 와서 40kg 쌀자루를 열어서 20kg으로 나누는 작업을 하려는데 그런데 쌀이 이상했습니다.

어째서냐고요? 올 들어 처음 방아 기계를 돌렸던 것인지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섞여 현미에는 뉘가 태반이고 현미 백미 가릴 것 없이 쥐똥이 태반이고 벌레집이 반절이고 쥐가 쏠아서 제집을 지은 온갖 비닐 조각 마대자루 조각이 이루 말할 수가 없던 것입니다. 이건 도정한 쌀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쓸어 모은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었어요.

하늘이 노랬습니다. 좋은 내 쌀은 어디가고 이런 것이 왔는가 싶어서요. 아까 방앗간에서 쌀을 받던 사람이 연방 쌀을 손에 퍼 올려 보고 고개를 비틀더니, 쌀이 이렇게 나오면 무슨 조처를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처음에 한번 상태를 봤는데  괜찮은 듯 했고 또 그 방앗간의 주인을 잘 알고 있고 그곳에서 찧는 게 처음이 아닌 것이라 태평 믿고 있었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방앗간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도로 가져 오라는군요. 석발기에 넣으면 깨끗이 골라진다고요. 그러면 아까 처음에 하지 왜 그랬냐 했더니 일꾼이 일을 잘 못한 거라고 그러는 군요, 주인의 나이 제가 알기로 예순아홉이고 그 부인과 일꾼 한명이 들러붙어 방아를 찧으므로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이건 참, 그 바쁜 때에 쌀을 싣고 두 번씩 왔다갔다해야했던 웃지도 못할 이야기, 다시 하려니 다시 어이가 없어집니다. 어쨌거나 농사지어서 처음 쌀 방아를 찧어왔다고 저녁을 햅쌀로 밥을 지어 먹으며 아내와 제가 서로 마주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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