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아서 흙이 분가루 같습니다. 올해 양파 모는 포트 모로 키워놨기 때문에 옮겨 심고 3~4일안에만 비가 와 준다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마침 돌아오는 주초에 전국에 걸쳐 비가 온다니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하여 아내와 함께 오늘은 양파 심을 곳에 비닐 씌우는 일을 했습니다. 양파비닐은 폭이 넓어서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혼자는 할 수 없습니다. 비닐 통속에 줄을 넣어서 양쪽에서 잡고 끌고 다니며 비닐을 펴야 되고 삽으로 흙을 펴서 여러 군데를 많이 눌러 주어야합니다.
늘 같이 하는 일이지만 올해는 안식구가 더 힘들어 하는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나이는 저보다 한 살밖엔 어리지 않지만 생일이 빨라서 저랑 도긴개긴이고 농사를 짓고 살아도 거칠고 힘든 일을 얼마 해 봤어야지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저처럼 일이 뼈에 박힌 게 아니어서 애를 삭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같이 일하다보면 종종제가 애성받이가 돼서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살살 구슬리고 달래기도 합니다.
오늘도 역시나 노타리한 밭에 돌이 많이 있다는 둥 깻 대가 마구 삐져나와서 짜증난다는 둥 인상을 찌푸리며 삽질을 하는데 봐 허니 여간 어설프고 하찮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것들이 다 남편 탓인냥 말을 하는군요. 저는 늘 아내사랑 하는 마음이 넘쳐서(!) 웬만하면 거친 일은 덜 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양파비닐도 바람에 날리지 않을 정도로만 널찍널찍 달아나며 흙을 누르고, 그렇게 해서 1차로 비닐 펴는 것만 아내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내는 다른 하고 싶은 일 하라고 보내고 본격적인 마무리는 제가 하는 거지요.
그래 오늘도 역시나 아내를 살살 달랩니다. 반절도 하지 않았는데 반절도 더 했다고 너스레를 떨어줄고 한 두룩 비닐을 씌우고 나면 조금씩 쉬라고 저는 세 번이나 감나무 밑에 가서 홍시를 따는 척 했답니다. 이런 줄 나이 먹어서 곰살갑지도 않은 저 마누라쟁이가 알기나 할랑가요? 일이 거의거의 끝나갈 즈음에는 “보소, 옛말에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 하다고 하더니 인제 거의 다 끝나지 않았남?” 말했더니 그제는 얼굴이 조금 펴지고 생기가 돌고 웃음기마저 띄고, 원내 참 내원!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려.
저한테 쌀을 사다 자시는 분들의 쌀 주문이 들어와서 엊그제는 나락 방아를 조금 찧어 왔더랬습니다. 그런데 올해 나락농사 수월하게 지었다고 속으로 생각했더니 그 말 대접인지 그만 방아 찧는 데서 사달이 났습니다. 제가 사는 면에는 정미소가 두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미소들이 나락 건조기를 돌리느라고 지금처럼 벼를 벨 때는 방앗간을 돌리지 않는 겁니다. 암지나 나락 다 베어서 건조 끝난 다음에야 방아를 찧으므로 11월 달이나 돼야 하는데요, 저처럼 조금씩 나눠서 빨리 찧어야 하는 사람은 애가타지요. 소비자들의 주문을 빨리 들어주어야 하니까요. 올해도 할 수 없이 다른 지역의 방앗간을 수소문해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이웃면의 한곳에서 찧어 줄 테니 나락을 가져오란 말을 들었습니다. 얼씨구나 하고 제 차에 1톤 마대자루 하나를 싣고 득달같이 달려갔죠. 그리고는 무탈하게 방아를 찧어왔습니다. 집에 와서 40kg 쌀자루를 열어서 20kg으로 나누는 작업을 하려는데 그런데 쌀이 이상했습니다.
어째서냐고요? 올 들어 처음 방아 기계를 돌렸던 것인지 그 안에 있던 것들이 섞여 현미에는 뉘가 태반이고 현미 백미 가릴 것 없이 쥐똥이 태반이고 벌레집이 반절이고 쥐가 쏠아서 제집을 지은 온갖 비닐 조각 마대자루 조각이 이루 말할 수가 없던 것입니다. 이건 도정한 쌀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쓸어 모은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었어요.
하늘이 노랬습니다. 좋은 내 쌀은 어디가고 이런 것이 왔는가 싶어서요. 아까 방앗간에서 쌀을 받던 사람이 연방 쌀을 손에 퍼 올려 보고 고개를 비틀더니, 쌀이 이렇게 나오면 무슨 조처를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처음에 한번 상태를 봤는데 괜찮은 듯 했고 또 그 방앗간의 주인을 잘 알고 있고 그곳에서 찧는 게 처음이 아닌 것이라 태평 믿고 있었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방앗간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도로 가져 오라는군요. 석발기에 넣으면 깨끗이 골라진다고요. 그러면 아까 처음에 하지 왜 그랬냐 했더니 일꾼이 일을 잘 못한 거라고 그러는 군요, 주인의 나이 제가 알기로 예순아홉이고 그 부인과 일꾼 한명이 들러붙어 방아를 찧으므로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이건 참, 그 바쁜 때에 쌀을 싣고 두 번씩 왔다갔다해야했던 웃지도 못할 이야기, 다시 하려니 다시 어이가 없어집니다. 어쨌거나 농사지어서 처음 쌀 방아를 찧어왔다고 저녁을 햅쌀로 밥을 지어 먹으며 아내와 제가 서로 마주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박형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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