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묵은해를 끝내지도 못하고 새날이 와 버렸습니다. 새해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쯤부터는 우선 술부터 좀 끊어 보려 했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보내고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너무도 많이 술 먹을 핑계거리가 생겨나더군요. 우선 사람을 만나서 1년 동안의 관계를 정리하고 바로 잡고 새해에는 좀 더 나아지자는 다짐들을 할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려니 하루에 몇 차례씩 막걸리 집을 드나들지 않을 수 없고 저녁 먹을 시간을 어겨서 돌아와 그냥 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카운트다운 하듯 남은 시간은 하루하루 줄어들고요.

제가 몸담고 있는 모임도 내년의 일들을 두고 서로 마음을 맞춰가야 할 것들이 많아서 연말 핑계 대고 자주 만나야 했으니 그 또한 술이 따라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지고 이런 일 저런 일이 엉키고 풀리고 새로 생겨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루에 술 먹는 시간만 네다섯 시간씩이어서 나중에는 생각되기를 술을 먹기 위해 이런 핑계 거리를 만들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러저러 묵은해의 끝 날은 어디서 해넘이 축제한다고 굿을 쳐 달래서 거기 어울렸다가 마지막코스 노래방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눈 번쩍 뜨고 있어도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판국에 ‘해처럼 돋는 마음축제’는 못할지언정 무슨 얼어 죽을, 올 일 년을 잘 한 것이 뭐가 있다고 해넘이 축제랍니까? 돈 받고 쳐주는 굿이라 치기는 쳐도 속으로 제 자신에 대한 불만까지 겹쳐 노래방에서 돌아올 땐 토하듯 욕지기가 나왔습니다. 역시나 저녁을 생략하고(!) 몽롱한 의식 속에 잠이 들었다가 오줌이 마려워 깨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어이쿠 제 뒤통수를 치면서 새해가 시작되었음을, 느끼며, 끝내는 서글퍼지기까지 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재작년까지만 해도 연말이니 성탄이니 새해니 해서 남들 제아무리 굿을 하고 다니는 듯 요란해도 저는 돌과 같은 심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웬일인지 연말이 다가오자 자꾸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이었어요. 그래 이것도 나이 탓이려니 여겨서 나름 한 일주일 정도는 술을 끊어 주어 주변정리정도는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새 기분으로 뭔가를 시작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싶었지요. 이랬는데 그만 술을 더 먹게 되었으니 새벽에 깨어 일어나 제 자신과 맞대면 하고서 앉아 있는 마당에 왜 아니 서글프겠습니까? 밤을 새운 사람들이기 십상일, 그들의 차 소리가 밤새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계속 되는 걸로 보아 저만 잠들어 있었구나 하는 생각.

물 한바가지를 마시고 났어도 새날은 새날이되 끝내지 못한 헌 날이 자꾸만 저를 붙들었습니다. 좀 생뚱하지만 서도요 저에게는 참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그게 뭔고 하니 남에게서 온 물건, 예를 들면 편지부터 시작해서 선물, 택배들을 잘 뜯어보지 못한답니다. 핸드폰은 물론이거니와 전화도 쓰기 싫어해서, 그 즉물적인 것이 싫어서, 쓰지 않고 대신 편지를 고집하는데 제 편지 세 번쯤에 한번은 오고야마는 그 편지를 저는 아까워서 뜯지를 못합니다.

뜯어버리면 아니 볼 수 없고 보고나면 파랑새가 날아가 버린 듯 싱겁기도 해서 차라리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게 낫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물도 마찬가지지요. 포장된 그 상태, 배달된 그 상태를 보고 있고 싶지 풀어 헤쳐져 와해 되어버린 그 상태는 참 싫더라고요. 그래서 늘 그것들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바라보면서 궁금해 하고 흐뭇해합니다. 특히 편지는 더 심해서 몇 달씩 차근차근 책상 앞에 쌓여있어요. 그 편지의 답을, 그리고 책을 새로 냈다고 보낸 분들에게도 뜯어본 후의 답을, 이번에는 한 일주일 마음먹고 마무리 하려고 했습니다. 책상에 조용히 앉아서 고즈넉하게 놓인 난화분이나 바라보면서요.

그러나 제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새로운 날은 시작되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이라 이것을 받아 들여야만 합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해왔던 저만의 셈법으로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 새로운 시작처럼 새해 새 결심을 합니다. 올해는 술 좀 조금 마시렵니다. 많이 먹게 돼도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라고 이유를 다른 것에 떠넘기며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글도 많이 쓰겠습니다.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것인데 올해에는 다른 나라 말 한 가지를 배워서 익히렵니다. 내나라 말과, 말이 담고 있는 정신과, 문화가 남의 나라 말로는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하는 그 복잡한 정신적 회로를 경험하고 그것을 머리에 담고 싶습니다. 이렇게 결심하니 마음이 이제 한결 가벼워지고 묵은해가 잡은 발목이 헐거워져서 떨쳐버릴 것 같군요.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생각을 이렇게 스스로 정리하니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참된 자아가, 결국은 다 부질 없다지만 이것인가 생각됩니다.

변함없이 새가 날고 안 듯 모른 듯 집 주변의 풀이 크고 아침저녁으로 굴뚝에 연기가 오르고 아는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고, 후회하고, 무언가 결심을 하는 일상은 사실은 언제나 새날인데 우리는 그것을 굳이 분별하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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