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바다에 나갔습니다. 바다를 보러간 게 아니고 여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갯것’을 하러 간 것입니다. 더 풀어 말씀드리면 갯가에 사는 여러 생물들, 이를테면 게나 고동, 굴을 따러 간 것입니다. 조수 간만의 차이를 나타낸 것을 이곳에서는 ‘물때’라고 하는데 그 물때표가 나와 있는, 수협에서 발간된 달력을 보니 이번사리가 물이 많이 나가더군요. 마침맞게 지금은 겨울의 한 중간이라 갯것들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을 때입니다.

아침을 조금 일찍 먹고 바구니 호미 그물망 따위를 준비해서 잔뜩 부푼 마음으로 바다에 나갔습니다. 오늘은 무엇이 됐던 한바구니 주워 올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말이지요. 바다에 나갈 때는 보통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저조기’ 약 한 시간 전쯤에 갑니다. 그래야 물이 빠지는 곳을 따라가며 갯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시간정도 물이 완전히 빠지는 지점까지 갯것을 하다보면 어느덧 바구니가 차고, 물은 다시 밀물로 바뀌어 들기 시작하죠. 물이 한번 바뀌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오는 거라 갯것을 할 수 없습니다.

빠지는 물은, 그러니까 썰물은 그 속도가 완만해서 드러나는 바위틈마다 살피며 게 고등들을 줍고 조개를 캐며 굴을 따기 적당합니다. 물이 많이 빠질수록 그 바위 밑에서 먹이 활동을 하던 녀석들은 종류가 많아지며 양이 많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감처럼 물이 점점 빠지는 곳마다 이곳저곳 숨어있는 놈들이 눈에 뜨입니다. 이번에는 특히 게가 많았습니다. 바위 밑 펄 속에 숨어있지만 저같이 경험 많은 사람의 밝은 눈을 피할 수는 없지요. 그래 민꽃게라고도 하고 박하지라고도 하는 돌게를 참말 신이 나게 많이 잡았습니다.

갯것도 말이지요. 사람마다 다 하는 방법이 다르답니다. 어떤 사람은 물속을 더듬어 게만을 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굴을 찾아서 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조개만을 캐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각기 많이 자라는 데가 정해져있어 자기 취향에 따라 그곳을 찾아 나섭니다. 또 어떤 분은 톳이나 청각 따위를 찾아 헤매기도 하는데 제 보기에 취향의 문제기도 하지만 어떤 반찬을 만들어 먹고 싶으냐의 문제인 듯합니다. 제가 하는 방식은 이것이 다 어우러진 종합세트입니다. 원하는 것을 찾다가 없으면 사람들은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저는 일 년을 통틀어 가끔 한 번씩만 바다에 가기 때문에 빈손으로 오기 싫어서 종합세트인 것입니다. 저는 먼저 고동을 줍습니다. 고동은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이라 사람들이 헤피 보는데 이 고동이야말로 주어다 삶아 놓으면 좋은 군입정도 되고 까서 한데 모으면 들깨 갈아 붓고 즙 나물하기에 딱 좋습니다.

그래서 고동부터, 흔하디흔하니까 그것도 큰 것만 골라서 줍지요. 고동을 주우려면 우선 자세를 낮춰서 바위 밑 틈새를 세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바다에 딱 붙어서 한 몸이 돼가다 보면 그때부터 고동은 물론이거니와 그 속에 숨어있는 해삼이며 소라며 게며 이곳사람들이 ‘왕짱구’라고 하는 성게며 눈을 뜨고 있는 각종 조개구멍들이 보이죠. 그러면 손은 이것을 줍고 저것을 파며 눈은 또 다른 것을 쫓아 갑니다. 들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물이 빠지는 곳마다 이것저것 숨어있는 게 이렇게 많이 보이니까 손 시린 것도 어느덧 잊어버리고 몸에서는 땀이 납니다.

바구니는 어느덧 묵직해지며 그 무게만큼이나 마음도 스스로 대견해집니다. 그리고 어연 어떤 성취감으로 차오르지요. 이제 물이 바뀝니다. 지구와 달의 인력이란 게 정말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물이 완전히 빠지고 나서 약 십분 정도 엄청난 우주적 정지가 지속되다가 물이 하번 들기 시작하면 그 속도는 걷잡을 수 없고 그사이 숨죽이며 기다렸던 미쳐 눈에 띠지 않았던 모든 생물들은 일제히 눈을 뜨며 꿈틀대는 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쯤해서 그만 멈춰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았던 그것들은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행위는 그 지점에서 타협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 새로 먹이활동을 하기 위해 눈뜨는 그것들을 죽이는 것은,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해보지요. 바닷물이 많이 나가서 인간이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시기는 일 년을 두고, 산술적으로는 한 달에 두 번이니까 스물네 번이지만 실은 열 번이 채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곱 번 정도이지 않나 싶어요. 그 기간이면 대략 두 달에서 한 달반인데 그 정도는 가만히 둬야 바다가 다시 생명을 품어서 키울 수 있는 겁니다.

바닷가에 사는 분들은 이것을 느낌으로 압니다. 채취해서 먹고사는 몇 만 년 전쯤부터 발현된 우리의 유전자가 지금도 도구 없이 맨손으로 자연에 접근할 때 그것은 우주질서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아는 것이며 더 나아가 신과의 접속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무분별합니다. 물때표를 어떻게 아는지 온갖 곳에서 온 사람들로 바다는 초만원이고요. 잡지 않아야 할 것들을 잡아서는 버리고 가기 일쑤더군요. 채취행위가 끝난 후에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위에 앉아 생명가진 것을 내 안에 담는다는 그 조심스러움을 왜 생각지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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