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여성 인권, ‘무슬림’ 여성 지위에 새 지평 열다

  
 
  
 
여성의 인권이 서구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제3세계나 중근동지역의 이슬람 문화권에 꽤 많은 여성 지도자가 활약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생활수준이 어느정도 높아진 터키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만 해도 아직도 시골에서는 아버지, 오빠 또는 친척들에 의한 명예살인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그 나라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어떠한지 극명한 예로 드러난다. 이번 시리즈는 제3세계 혹은 개도국에서 온갖 핸디캡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여성 지도자로 활약했던 못 말리는(?) 여장부들의 이야기다. 단, 아웅산 수지는 야당 투사로 권력을 잡아 보지 못했고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베나지르 부토가 야만적 테러로 불귀의 객이 된지 불과 20일이 채 안됐다. 라왈핀디 지역에서 집회를 마친 그녀는 머리와 심장을 저격당해 사망했고 범인은 폭탄을 터뜨려 자살했다. 파키스탄에서의 베나지르 부토의 족적(足跡)은 여성으로선 모든 것이 모험이자 신기원(新紀元)이었다. 고인(故人)의 명복을 빈다.

피는 못 속여
‘흠~ 제법이군. 저렇게 침착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내다니….’
줄피카르(아버지)는 딸의 능력에 새삼 놀라고 있다.

때는 1971년. 줄피카르는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대를 파견하자 외교관 역할을 하기 위해 UN으로 날아와 이 문제를 놓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때 하버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베나지르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학교를 휴학하고 조수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 일처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정치적 센스와 유연한 대인관계는 난다 긴다 하는 세계 각국의 능구렁이 외교관들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복잡하고 끼어들기 싫은 제3세계의 국경분쟁은 흔쾌한 결론이 나질 않는다. 강대국들은 이 문제에 대해 ‘원만히’ ‘적정하게’ ‘평화적으로’라는 입에 발린 소리들만 하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 줄피카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지만 이 복마전 같은 외교전쟁을 경험하면서 베나지르 부토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정치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줄피카르는 수 년 후 파키스탄의 총리에 오르게 되는데 베나지르의 어머니 ‘누스라트 부토’ 역시 파키스탄 인민당의 당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정치가로서의 피를 물려 받은 것 같다.

미국, 영국에서 공부
베나지르는 1953년 6월 21일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줄피카르와 누스라트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파키스탄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던 탓에 유복한 생활을 했고 교육도 제대로 받았다. 이슬람 문화권인 파키스탄임을 감안하면 베나지르의 부모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버드 대학 4학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생전의 베나지르의 회고담이다.
그녀는 1969년부터 하버드대학 라드클리프 칼리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학사학위를 딴 베나지르는 여기서 공부를 멈추지 않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했다.

“정치, 경제, 철학을 공부했어요. 세계 각국에서 날아 온 명석한 학생들과 토론하며 국제 감각과 이슬람을 넘어선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지요. 옥스퍼드 시절의 가장 큰 성과라면 역시 1976년 옥스퍼드 유니언(Oxford Union)에서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의장에 선출돼 활동한 것입니다.”(베나지르 부토)

옥스퍼드 유니언이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옥스퍼드시의 논의단체다.
미국과 영국이라는 서방세계 최고 대학에서의 공부는 베나지르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놓았다.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 줄피카르가 1967년에 창당한 파키스탄 인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국민들의 꾸준한 지지를 확보했다. 줄피카르는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이었던 ‘칸’과 때론 대립하고 때론 협력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1971년 칸이 민선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자 마침내 파키스탄 최초의 민선 총리에 오른다. 이후 줄피카르의 정치행보는 숨막히게 돌아간다.

대통령 칸이 사임하자 그의 뒤를 승계해 대통령에 올랐고, 1977년에는 다시 총리로 재선된다. 이 시기에 즈음해 베나지르는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그러니까 1977년 7월까지가 아마도 부토 일가에게는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했던 시기였으리라.
그러나 파키스탄의 고질적 병폐인 정치 군부는 이 일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77년 7월 부토 가문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친다.

“육군 참모 총장 하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어머니)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건가요?”(베나지르)
“아버지는 이미 그들에게 잡혀갔다. 우리 가족도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됐다.”
“그저 아버지에게 별일이 없기만을 바랄 수밖에… 알라여 도와주소서.”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줄피카르는 국가변란, 살인, 무능, 부패 등 온갖 구정물을 다 뒤집어쓰고 1979년 군부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만다.
베나지르는 가택연금을 당하다가 풀려나면서 정치에 뛰어들어 본격적인 반정부활동을 했고 이로 인해 1981년부터 3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줄피카르가 없는 동안 아버지가 만든 파키스탄 인민당은 어머니 누스라트가 이끌었다. 1984년 풀려난 베나지르는 유럽으로 가서 파키스탄 인민당을 원격 조종했다.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베나지르는 야당 당수로서 아버지를 죽인 하크 장군에게 선전포고 했다. 1986년 파키스탄에 돌아와 전국을 누비며 하크에 대항했던 베나지르는 1986년 독재자요 아버지의 원수인 하크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시 일어설 때가 됐다.”

마침내 총리에 오르다
삼십대 초반에 불과했던 베나지르는 젊고, 혁신적이고, 세련돼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와는 또 다른 신선함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갔다. 오랜 유학생활에서 얻은 학식과 대중을 휘어잡는 언변, 연설능력은 국민들로 하여금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조차 잊게 하는 것 같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여자가 설치는(?)것을 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개했지만 베나지르의 대중적 인기는 나날이 올라갔다.
1988년 총선에서 파키스탄인민당이 승리하면서 베나지르 부토는 마침내 파키스탄 최초의, 전 이슬람 권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오른다. 이때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1984년 야당당수에 오르고 1988년 첫 여성총리에 오르는 동안 그녀에게 정치적 행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총리 취임 1년 전 세 살 연하의 자르다리와 결혼했고 ‘빌라왈’을 비롯한 세 아들을 낳았다. 빌라왈은 부토의 총리 취임 3달 전에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비할 자가 없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아들을 얻은 베나지르의 기쁨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성도 아버지 성이 아닌 어머니 성 부토를 붙여주었다.

그러나 총리로서의 행보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각에서 일하던 장관들이 줄줄이 부패에 연루되면서 ‘부패정부의 수장’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듬해 총리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통령이 그녀를 해임한 것이다.

롤러코스터 인생
1990년 총선에서는 참패를 당했다. 다시 3년 후 총선에서 승리한 베나지르는 1993년 10월 19일 두 번째로 총리에 오른다. 1996년 11월 5일 사임하기까지 그녀의 정치역정과 인생은 롤러코스터에 다름 아니다.
부토 일가 특히 베나지르 시대의 부패상은 역겹기까지 하다. 역시 어지러운 나라에서 정치를 하려면 막대한 비자금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일면에는 남편 자르디리의 추잡한 탐욕이 있었다.

‘미스터 10%’. 남편이 모든 관급공사에 커미션 10%를 공공연히 요구한다고 해서 붙여진 수치스런 별명이었다. 그러나 베나지르 역시 1999년 망명길에 올라 최근 돌아와 죽음을 당하기까지 불법자금 세탁, 스위스은행의 비밀금고에 쌓인 막대한 돈, 전투기 구매에서 커미션을 챙겼던 비리 등이 불거져 나오며 오점을 남겼다.
베나지르 부토가 8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2007년 10월 18일 다시 파키스탄을 찾은 것은 현 대통령 무샤라프와의 밀약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런 저런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무샤라프는 부패혐의로 고발된 부토를 사면해 주어 귀국길에 오르게 했다. PPP(파키스탄 인민당) 당수인 부토가 2008년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에게 권력을 나누기로 약조했다는 것이다.

죽음, 그리고 엇갈린 평가
2007년 10월 칼라치에서 연설하던 부토는 자살폭탄테러를 당해 무고한 생명 140명이 사망했으나 본인은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부토는 멈추지 않았다.

파키스탄 곳곳을 누비며 유세를 계속했다. 그러나 운명의 12월 27일은 피할 수 없었다. 라왈핀디에서 연설을 하고 차에 오른 부토는 차 밖으로 몸을 내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때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한 사내가 총을 발사했고 두 발이 부토의 머리와 가슴에 맞았다. 이윽고 범인은 폭탄을 터뜨려 부토와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 수 십 명을 사망케 했다. 부토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결국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베나지르 부토는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진 파키스탄의 여성 지도자이다. 그는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 최초로 정부 수반에 올랐고 두 번이나 역임했다. 아직도 그의 파키스탄 인민당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녀는 그녀의 지지자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순교자’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졌고 해 놓은 일도 그다지 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또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율법을 어긴 사악한 여인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베나지르 부토에 대한 평가는 아직 조금 더 시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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