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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유감
2016년 09월 23일 (금) 13:34:07 박형진 시인 .
올 추석은 연휴가 길어서였는지 손님 치르느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게 보내고 말았습니다. 날이 너무 오랫동안 가문 탓에 풀이고 뭐고 자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명절 쇤다고 집 주변을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해두고, 늦게 심은 깨가 아직 벨 때가 아닌데도 마르며 억지로 익는 것을 하나하나 베어내며 추석을 기다리는데 가장 먼저 서울에서 손님 네 분이 오셨습니다. 추석을 꼭 나흘 앞두고 였는데 내려와 보고 싶다는 약속을 작년부터 해둔, 제 딸애가 알바를 하다가 그만둔 음식점 식구들입니다. 또 저의 팬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의례 그렇듯이 명절이면 늘 저는 술을 한말씩 빚어놓고, 물론 평소에도 자주 빚지만 이들을 기다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고 아름다운데 이 술이라는 게 가운데 끼면 항상 예측 불가능한 일이 생긴다는데 문제가 있지요. 그게 뭐냐면 하룻밤 술 푸고 이튿날 간다는 사람들을 이별주랍시고 주저 앉혀서 한 잔 한 잔 또 한잔!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다고 한나절이 가고 하루가 가고 결국은 가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옹골지게 일주일을 엄마 아빠 옆에서 쉬겠다고 내려온 딸애가 애비의 술시중을 드느라 꼬박 옆에 붙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을 지어내느라 끼니 되면 걱정이 앞선 아내도 조금은 고충이었겠지요. 그러는 사이 깨는 익어서 뙤고요. 사흘째 되는 날 손님을 보내고 저는 또 술 때문에 몸이 고달 퍼서 한나절 누워 있었고요. 겨우 어떻게 추슬러서 오후에 조금 꼼지락 거리다가 그만두고 추석전날 오전부터 작심하고 다시 깨를 베는데 이번에는 서울에 나가 사는 깨복쟁이 고향친구가 가족들 다 대리고 찾아 왔습니다. 그것도 꼭 삼년 만에요.

깨고 낫이고 다 던져버리고 달려 나와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술 있겠다 명절장만이라 안주있겠다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또 나무 밑 평상에 손을 잡고 마주 앉아 한나절 신이야 넋이야 술을 마시고 딸애는 술심부름, 아내는 끼니대접! 그사이 깨는 뙤고 또 뙤어서 땅이 하얗겠고 덕분에 비둘기 놈들도 살판났겠지요. 집에서 빚은 술이어선지 많이 마셨어도 추석날 아침은 그럭저럭 견딜 만 해서 마을에 있는 큰형님 댁에 내려가서 차례를 지내고 조카들 손자들 휘몰고 산소에 성묘 다녀오고, 아 그런데 제 외갓집 사촌들이 왔지 뭡니까.

저에게는 외삼촌 두 분과 이모 두 분이 계신데 큰 외삼촌은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고 또 한분의 외삼촌과 이모님들은 다 이 근동에 사셨지만 이종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고 오직 고종간인 외삼촌의 손들과 잘 지내는데 그 사촌들이 떼거리로 온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는 좀 까닭이 있어요. 외갓집 할머니 할아버지의 산소가 제 사는 동네에 있어서 저희 아버지 계실 때부터 그 산소의 벌초를 우리가 했으니 명절인데 지들이 안 오고 베깁니까? 제 외사촌 중에는 저의 형도 있고 누님도 있고 또 누이고 있고 동생도 있어서 만나면 항상 옛날이야기로 판을 짜니 이 또한 술이 없을 리 없지요.

추석날도 종일 형님 댁에 앉아서 버티며 술을 푸는데 역시 제 딸애가 옆에서 술시중, 아내 역시 옆에서 덤성거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따져보니 꼭 일주일을 술로 자알 버텼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추석 다음날, 저도 처갓집을 가야 하는데 올해는 어쩐지 가기 싫어서 오래전부터 안식구에게 말해두긴 했습니다만 막상 명절이 되고 보니 안식구가 표정이 굳어지는군요. 짐도 많은데 버스로 가라니 그러겠지만 저는 이것 한 가지는 철저합니다.

명절에 차 운행 않기요. 하더라도 있는 정신을 다 끌어 올려서 오직 안전운전 또 안전운전! 뭣이 중헌디? 안전이여 안전! 이런 주의라 어차피 술 달고 사는 명절엔 차를 놔 버리자는 주장이고 명절에 사고 내는 사람을 불행한 사람 중에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안식구 생각은 그게 아닌가 봐요. 양손에 짐 들고 버스타고 내리기 싫은 것. 즈이 엄마랑 외갓집 갔다가 거기서 하룻밤 자고 서울로 가야하는 딸애도 안타깝긴 마찬가지인지 애비를 원망스럽게 보는군요.

일주일을 집에 있었어도 전혀 쉰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더 피곤하다면서요. 그런데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를 대려다 주지도 않고 버스로 가라며 안전이 어떻고 하며 타이르기나 하려는 애비가 좋겠습니까, 사실 내가 처갓집에 가기 싫어하는 것은 이제 나이 먹어서라는 것을 녀석은 모르겠지요. 결혼하고 지금껏 33년 동안을 줄기차게, 빼지 않고 다녀서 이제 내년이면 60살, 제 아무리 장모님이 계시다 해도 가기 싫으면 한번쯤 안 가는 것이지요.

저는 명절 뒤의 이 혼자 있음의 고즈넉한 시간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떠버세하던 물결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그 뒷 시간은 더 쓸쓸하고 적막하지요. 그러나 무엇이 더 소중한 일일까요? 나이 먹은 점잖은(?) 사위가 명절이라고 한복을 입고 처갓집에 가서 똑같이 나이 먹은 처남들과 같이 술잔 마주 드는 것, 아름답지 않은가요? 그러나 참 부끄럽게도 먹고사는 길이 달라서인지 생각이 달라서인지 옛날의 그 아름다운 모습은 한 끄트머리도 찾을 수 없고 강퍅한 현실이 자아내는 섭섭한 마음들만이 쌓여 인척들도 멀게만 느껴지고 정이 생기지도 보고 싶은 마음도 옅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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