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 흩어진 2천 년 전 조국을 다시 세우다

  
 
  
 
다 죽여도 좋다
“즉각 출격하시오. 철저하게 두들겨 주고, 남김없이 퍼 붇고 오시오.”
골다 메이어 수상의 명령은 결연했다.
1973년 수상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특수부대 요원들은 요르단의 베이루트에 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본부를 기습했다.

군대를 보낸 골다 메이어 수상은 홀로 집무실 책상에 앉아 지난해의 끔찍했던 악몽을 상기했다. 1년 전인 1972년은 독일의 뮌헨에서 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게릴라들이 올림픽 선수촌을 덮쳐,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단 11명을 납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자 않자 이스라엘올림픽 선수 11명을 모조리 살해하고 말았다.

‘으음~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두통이…. 그래 우리 용감한 군인들이 철저히 응징하고 올 거야.’
골다 메이어는 다시 성경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원수를) 갚으리라.’(로마서 12장 19절)

요르단과 시리아를 향해 날아간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전폭기는 무려 75대. 이를 막으려고 출동한 시리아 전투기 3대는 이스라엘기의 요격으로 일찌감치 불덩이로 사라졌다.

그날 시리아와 요르단에 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기지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황불로 멸망해버렸다는 고대 전설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처럼 파괴됐다.
무차별로 퍼 붇는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기지들은 초토화되고 66명이 즉사했으며 팔다리 잃은 자 수백이요, 크고 작은 부상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여기서 그칠 수 없소. 우리 선수들을 죽인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은 지구 끝까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모조리 색출해 응징할 것입니다.”
이후 35명의 암살대상자는 이스라엘의 전설적 정보조직 모사드에 의해 한 명 한 명씩 제거됐다. 골다 메이어는 이런 여성이었다.

미국 이주에서 결혼까지
골다 메이어는 옛 소련연방의 하나였던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1898년 3월 3일 태어났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공포에 젖어 살았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유럽 땅에 무시무시한 ‘포그룸’이 찾아올 거라고 말씀하셨다. 밖에서 문이 쉽게 열리지 않도록 두터운 나무판을 문에 덧대시곤 했다.”고 회고했다. 포그룸이란 한 인종에 의한 타 인종의 압제나 말살을 의미한다.(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말살정책도 일종의 포그룸이다.)

“아버지는 공포에 짓눌려 사느니 고향을 떠나자고 하셨다. 우리 가족은 1906년 미국의 밀워키로 이민 갔다.”(골다 메이어)

아버지는 목수로, 어머니는 식품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골다 메이어는 6년간 ‘4번가 학교’라는 특수학교를 다녔는데 성적이 우수했다.(현재 이 학교는 골다 메이어가 다녔었음을 기념해 학교이름을 골다 메이어 학교로 바꿨다고 한다.)
골다 메이어가 14살이 됐을 때다.

“얘야 도저히 너를 뒷바라지할 형편이 안 되는구나. 여자로서 그만큼 배웠으면 됐잖니? 이제 학교는 그만 다녀라. 좋은 혼처가 있다니 결혼하는 게 어떠니? 그게 입을 하나라도 더는 일이다.”(어머니)
“우리는 새로운 기회와 운명을 찾아 머나먼 이곳까지 왔어요. 그럴 바에야 지금껏 고생한 건 무슨 소용인가요? 나는 죽어도 그렇게는 못해요.”

골다 메이어는 집을 뛰쳐나와 가출해서 1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들은 골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골다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모리스 메이어슨’이라는 수수한 남자와 연애해 결혼했다.

이십 대 초반에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꾸린 골다의 삶은 미국의 평범한 주부로 평안히 살아가면 될 그런 인생이었다.

팔레스타인 이주와 가정불화
그러나 1921년 골다는 가족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팔레스타인으로 가겠어요. 다시 옛 가나안 땅(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에 유대인의 나라가 건설된다는 ‘시온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겠어요.”

“너 지금 제 정신이냐? 유대인들이 로마에 망해 흩어진지 이천년이 다 되가는 세월이 흘렀다.”(아버지)
“당신 미쳤소? 도대체 이 좋은 곳을 두고 피가 튀고 총탄이 난무하는 위험한 땅에 왜 간단 말이오.”(남편)
하지만 골다의 결심은 확고했다. 골다와 가족은 ‘중동의 화약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젠장~ 이런 황무지가 없어. 여기서 뭘 해 먹고 산단 말인가? 아이들 교육은 또 어떻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성에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어.”
남편의 불평은 일상생활이었다.

골다는 유대인노동총연합을 비롯한 유대인조직에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정치적 입지도 조금씩 넓혀나갔다. 전세계의 근본유대주의자들의 꿈인 ‘이스라엘의 재 건국’은 골다의 신념이자 이상이었다. 골다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남편과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 골다와 남편은 잦은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별거로 이어졌다. 1951년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골다 부부는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건국, 시온의 영광을 이루다
남편과의 관계는 소원했으나 골다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다.
골다에게 이스라엘의 재건국은 신앙과도 같았다. 그녀야말로 시오니즘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그녀는 조국(아직은 국가는 없었지만)을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했다.

그녀가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 온 지 거의 27년이 지난 1948년 5월 15일, 마침내 이스라엘은 옛 가나안 땅이요,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의 나라를 재 건국했다.

옛날 이스라엘의 최후의 저항군이 로마군에 의해 진압된 후, 서기 70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민족의 세계유랑생활 2천 년 만에 다시 나라를 세우는 세계역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재 건국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등 강국의 보이지 않는 개입 또는 방해 속에서도 세계 요지에 숨어있던 유대인의 막강한 정보력과 자본력과 세계 각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숨어있는 시오니즘 주의자들의 만들어 낸 현대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서기 676년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만주벌판에 다시 나라를 세우고 “우리가 고주몽의 후손이요~”라고 한다면 믿어지겠는가 말이다.

새롭게 탄생한 조국에서 골다는 분골쇄신의 각오로 일했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노동 총리, 1956년부터는 공사로 일했다. 골다의 주 임무는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유대인들을 위한 복지와 일자리 분배였다.

강철 여인, 수상에 오르다
1960년의 어느 날이었다.
건강검진 결과를 설명들은 골다는 의사에게 몇 번이고 다짐시켰다.
“절대로 이 사실이 알려지게 해선 안 됩니다. 내게서 림프종이 발견됐다는 것을 아는 간호사들도 각별히 주의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강철 같은 체력을 과시하며 밤샘 일도 마다않던 골다였지만 몸은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1965년이 되자 병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1969년이 되자 골다는 기자들을 불렀다.

“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군요. 병을 앓은 지 10년 가까이 됐네요. 이제 제 나이도 70이 됐고 몸은 안 아픈 데가 없을 정도로 쇠약해 졌답니다. 조국을 위해 나름대로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오늘부로 정계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말년을 편히 쉬고자 합니다.”

골다의 발표는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노구에 저 아픈 몸을 이끌고 그렇게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니….

그러나 골다는 편히 쉴 팔자가 못됐다. 그해 이스라엘의 ‘애쉬콜’ 수상이 급사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대립은 그야말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었다. 여차 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험악한 국제정세 속에서 여론은 이미 은퇴를 선언한 골다의 경험과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애쉬콜 수상의 뒤를 이어 골다 메이어를 이스라엘 수상으로 임명한다.
‘그래 나는 죽을 때까지 나라에 봉사해야 할 운명 인가봐….’

이스라엘 위한 최후의 선택
골다에게 수상직은 확실히 체력에 부쳤다.
육체적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도 골다는 주변 중동국가와 소련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위협 속에서 이스라엘이 살아남기 위한 외교적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쪽은 역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밖에 없어….’
그렇게 수상으로 일한지 3년째 되던 1972년, 뮌헨에서 올림픽 대표 팀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게릴라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전술했던 대로 골다는 초강경자세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이스라엘과 중동국가들의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는 세계인의 우려 속에서도 골다는 조용히 전쟁을 준비했다. 이스라엘보다 100배는 크고 20배가 넘는 군사들을 보유한 중동국가들은 지난 제1, 2,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당했던 그때의 그들이 아니었다.

절치부심하며 전력을 강화한 중동국가들은 막강한 군사대국으로 탈바꿈 해 있었던 것이다.
철의 여인 골다 메이어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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