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협상체결 반대를 외치던 여성농업인이 있었다. WTO를 반대하기 위해 멕시코까지 날아가고 삭발까지 감행했던 여성농업인이 있었다.

각종 농민시위때마다 목청 높여 군중들을 독려해 남성농업인들까지 압도하던 여성농민이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살기좋은 농촌, 인정받는 농업인을 만들겠다고 외치는 몸집은 작지만 당찬 여성농업인. 그녀는 바로 최옥주(42세) 씨다.


한국의 니체를 꿈꾸던 문학소녀
학생운동부터 시작해 농민운동까지 사회운동으로 일관된 삶이었지만 그런 최씨도 학창시절에는 소설과 글에 빠져있던 문학소녀였다. 특히 독일 철학에 관심이 많아 학교를 졸업하면 독일로 유학을 가 독일 철학을 공부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최 씨의 꿈을 이루게 도와주질 않았다. 최 씨는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당시 이 씨가 살던 곳은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살던 빈민지역이었다.
최 씨의 집도 당시 그곳에 다른 집들처럼 빈민층이었고 특별한 기술도 없이 상경한 부모님들의 벌이로는 7남매를 포함한 9식구가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최 씨가 보기에 도시에서의 삶은 벌어도 벌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이었다. 결국 언니 오빠들은 하나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만 하는 현실은 너무도 당연했다.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언니,오빠들을 보면서 최 씨는 어린 마음에도 사회적인 모순을 보고 느낄 수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사회의식이 싹트게 됐다.

그러나 나아질 가망이 없어보였던 집안형편은 부모님과 형제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됐다. 7남매 중 6번째 딸이었던 최 씨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 둘 때 즈음에는 여유가 생겨 대학진학을 할 수가 있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최 씨는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다.

“제가 특별하게 공부를 잘해서도, 특별하게 잘나서도, 또 특별하게 귀여움을 받고 자라서도 아니었어요. 그저 운이 좋아서 대학에 들어가게 됐는데 배움에 목말라 했던 다른 형제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일이었죠.”
이런 형편이었으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을 하는 최 씨의 모습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필연적인 농민운동과의 만남
독립적인 성격과 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해져 최 씨는 등록금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한학기를 마치고 공장에 들어가 등록금을 벌기로 결심한 최 씨는 복사기를 만드는 공장의 부품생산라인에서 일을 하게 됐다.

하루에 8시간씩 단순작업을 반복하다보니 본인이 공장의 부품이 된 것같이 느껴졌다. 노동의 참 의미와 기쁨을 느끼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계획은 등록금을 버는 것이었지만 이왕 공장을 나가는 것 노동자와 호흡하면서 노동운동도 해보자고 생각했었는데 노동자체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최 씨는 2년간의 공장 생활을 통해 노동이 본인과 맞지 않다는 것만 알게 됐다.
항상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던 최 씨는 복학하자마자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학생운동에서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농활(농촌활동)’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농민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라의 탄압에도 농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최 씨가 처음으로 농활을 갔던 곳은 전남 화순. 최 씨는 사진전과 교육을 계획하고 내려갔다. 농활팀은 청년반, 부녀자반, 아동반 등으로 분반을 나눠 활동을 했었고 최 씨는 청년반 반장을 맡았었다. 마을의 청년들과 술마시고 토론하며 호흡하다보니 농촌이란 곳이 자신들이 깨우쳐야 할 곳이 아니라 자신들이 배워할 할 곳임을 알게됐다.
농촌에 매력을 느끼게 된 최 씨는 그날부터 농촌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여대생 강원도를 일깨우다
농활을 다녀와서 이 씨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나중에 농민운동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여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총여학생회장에 선출됐고, 서울 북부지구 여대협 회장을 맡으면서 농민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졸업을 앞두고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할 시기에 최 씨는 농활의 기억과 여학생회 활동이 더해져 여성농민운동에 대한 생각이 굳어지고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농촌으로 들어가는 일은 난관에 부딪쳤다. 최 씨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1년 동안 대학생들의 농활사업을 돕기로 했다.
농활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해 지역답사도 하고 학생 교육도 하면서 당시 전농의 전신인 농민운동연합의 부장직을 맡고 있던 남편을 만나게 됐고 2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됐다.

1991년 최 씨는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강원도 춘천으로 내려왔다.
당시 강원도 지역은 농민운동을 ‘빨갱이’ 취급하던 터라 여성농민회는 커녕 농민회도 조직이 되지 않고 있던 실정이었다.
최 씨는 강원도에 가자마자 여성농민회원들을 모아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전여농에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조직을 활성화 시켰다.

휴전선이 가깝다보니 반북 이데올로기가 다른지역에 비해 심해 낙후될 수 밖에 없었던 강원도도 최 씨의 노력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전여농은 관변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여성농민단체에 비해 어려움이 많아요. 지원도 없는데다가 항상 투쟁에 선봉에 서기 때문에 관의 탄압과 주변의 시선을 감수하며 활동해야하기 때문에 회원 확보도 어렵고 관리도 어려워요. 그에 비하면 강원도 지역은 시작은 늦었지만 탄탄한 편이예요.”

농민운동의 선봉에 서서
강원도의 조직이 탄탄해 졌을 때 즈음 최 씨는 전여농 활동을 시작했다. 전여농의 감사를 거쳐 조직교육장, 사무총장까지 이 시기부터 최 씨는 여성농민운동만이 아닌 우리나라 전체 농업인들을 위한 농민운동 선봉에 섰다.

“전여농이 2002년부터 여성농업인들의 정치참여를 주장하며 각종 토론회와 교육을 진행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여농이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죠. 그 당시에 전여농활동에 참여하다보니 당연하게 선봉에 서게 되더라구요.”

2003년 6월. 최 씨가 전여농의 조직교육장을 맡고 있을 당시 한국과 칠레가 FTA 협상을 논의하고 있었다. 최 씨는 전여농의 도 상임위원 이상 간부들과 함께 국회 앞에서 한·칠레 FTA 반대 투쟁을 벌였다. 시위 도중 삭발식까지 감행했던 최 씨. 농민운동가이기 앞서 여성으로서 삭발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당시 저는 나이가 서른 후반 밖에 안됐었어요. 간부들 중에 젊은 편이었죠. 오십이 넘은 회장님들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보고 삭발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부끄러워했던 것 자체가 부끄러워지더군요. 그날 흘린 눈물은 제 머리가 잘려나가는 것이 서러워 흘린 눈물이 아니고 그런 결심을 할 정도로 절박한 우리 여성농민들의 마음이 안쓰러워 눈물이 났었어요.”
머리를 자른 후의 반응은 어땠을까?

“주위 사람 모두들 제가 농민운동을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크게 놀라거나 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오히려 대견하다고 힘을 주시는 분도 계셨어요. 가족들도 제 계획을 들었을때는 아무말도 없었어요. 단지 작은 아들이 시간이 지나고 농담반 진담반 ‘다시 또 삭발하면 가출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얼마나 뭉클했는지 몰라요. 그렇게 싫었으면서도 엄마의 뜻이었기에 참아준 것이 고마워서요.”
그런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에 힘을 얻어 최 씨는 더욱 농민운동에 열을 올렸다.

지도자에서 봉사자로…
최 씨의 지금까지의 삶은 누군가를 일깨우고 선도하는 지도자의 삶이었다.
덕분에 최 씨와 남편은 6년째 주말부부로 지내오고 있다.
“번식우 40두를 키우며 오이 하우스를 하고 사료용 옥수수를 키웠어요. 둘 다 농민운동을 하다보니 유지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2년씩 번갈아가면서 중앙회 활동을 하기로 약속했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과 춘천에 떨어져 살게 됐네요.”

혼자서 농사를 지어야 하니 일반 원예농은 꿈도 꿀 수가 없어 결국 오이농사를 접고 고추농사로 바꿨다. 이제는 혼자서 소 관리하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무서워서 소 근처에도 못가던 최 씨가 이제 소들과 대화를 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6년간 한사람이 관리하다 보니 운영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작년에는 마을 이장으로까지 선출돼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수동면 최초의 여성이장이었다.

“처음에 제의를 받고 남자분들게 아마 다른 마을에서 그 마을엔 남자가 그렇게도 없냐는 놀림을 받을수도 있는데 그걸 감수 할수 있겠냐고 물었었죠. 그랬더니 만장일치로 그러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최 씨가 만장일치로 이장직을 맡은지 벌써 1년이 됐다. 마을이나 주변에선 성공적인 인사였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올해는 이장일을 더 열심히 하고, 고추 하우스 자리에 조사료용 보리를 심어볼 계획도 세우는 등 최 씨는 당분간 농사와 마을일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세상이 최 씨를 가만 둘 리가 없다.
“올해 남편의 임기가 끝나서 내려오면 둘다 당분간 농민운동은 쉬고 농사에 전념해 보기로 했었는데 뜻대로 안돼네요.”

최 씨는 올해 전여농의 추천으로 민노당 비례대표 후보로 결정이 됐다.
“아마 선출이 되면 또 주말부부 신세가 되겠죠.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것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어볼 생각이예요.”
살기좋은 농촌, 농업인이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최 씨. 그녀의 일념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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