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생활개선회 김인련(50세) 회장은 기억조차 나지않는 어린시절부터 “농촌으로 시집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논 66000㎡(2만여평), 산 16500㎡(5천여평)을 큰 빚없이 운영하고 있다.

또 아들,딸 모두 제 갈길을 찾아 안정된 삶을 꾸리고 있지만 김 회장도 한때는 농촌생활을 ‘지옥’같다고 느낄 만큼 농촌생활에 적응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김 회장에게 ‘가족들의 사랑’과 ‘생활개선회’는 지금껏 버틸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자 다시 태어나도 농촌에 살겠다는 결심을 서게 해준 힘의 원동력이었다.


신문이 이어준 사랑

결혼 전 대구에서 나고 자란 김 씨는 ‘지역 유지’의 딸이었다. 김 씨의 집은 문중집안으로 물려받은 땅이 많아 창고를 지어 임대업을 해 농촌에 살았지만 농사일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도시 처녀’였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농촌으로 시집가서 평생 농촌에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을 정도로 농촌을 사랑했던 김 씨에게 농촌은 좋은 공기를 마시며 한적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다.

그런 김 씨에게 운명의 장난같은 일이 일어났다.
대학을 휴학하고 집에 잠깐 내려와 있던 어느 날 김 씨는 거실에 놓여있던 신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농사는 짓지 않았지만 땅이 많아서 그런지 면 농협의 이사직을 맡고 계셨어요. 그래서 집으로 ‘농민신문’이 들어왔었죠. 그전에는 집에 신문이 펼쳐져 있어도 쳐다도 안봤는데 그날은 유독히 눈에 띄더라구요.”

그렇게 뭔가에 이끌리듯 신문을 집어 든 김 씨는 신숙승(53세) 씨의 기사를 읽게 됐다. 그 신문에는 당시 강원도에서 주최한 ‘청소년대상’이란 시상식에서 수상을 했던 신 씨의 성공사례가 실려있었다.

“남편이 당시 고등학교때 들어놨던 적금으로 병아리를 사서 닭을 길러 그 닭을 판돈으로 돼지를 사고, 또 돼지를 길러 판돈으로 소를 사면서 축산을 시작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송아지를 한 마리 사서 산을 넘어오면서 펑펑 울며 이렇게 소리질렀다고 그러더라구요.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이야기를 읽고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몰라요.”

신 씨는 고등학교 2학년 되던 때 큰아버지가 사업에 크게 실패하면서 집안 전체가 어려워졌고 신 씨는 결국 학교까지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농사를 시작한 신 씨는 ‘반드시 성공해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를 악물고 농사에 전념했다고 한다. 신 씨는 그렇게 병아리 판돈으로 시작해 어느덧 소를 16마리까지 불렸었다.

“요즘 젊은 사람도 이런 반듯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구나하며 아버지와 기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그 기사 말미에 앞으로의 포부와 계획, 희망 등에 대한 남편의 이야기를 읽고 어찌나 가슴에 와 닿았던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 길로 김 씨는 신 씨에게 격려의 편지를 쓰게 됐고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운명과 같던 남편과의 만남

김 씨는 “참 이상하죠. 그 전엔 그보다 더 감동적인 사연을 봐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왜 그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하며 갸웃거렸다.

신기한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당시 김 씨의 친정집은 중앙에서 직접 신문이 배달되기 때문에 바로 받아볼 수 있었지만 신 씨의 경우 농협으로 신문이 운송되면 각자 집으로 신문을 배송하는 시스템이어서 배송이 늦을땐 2주일 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신 씨는 김 씨의 편지와 함께 신문을 받아보게 됐다.

“아마 신문이 먼저 배달됐거나 제 편지가 조금 늦게 배달됐다면 후에 배달됐던 많은 다른 격려 편지들에 묻혀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는데 같이 배달되는 바람에 남편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운명의 힘이었을까? 신 씨도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답장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6개월간 편지를 주고받게 된 두 사람. 당시 김 씨 아버지께 편지도 보여드리고 신 씨에 대한 얘기도 나눴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애틋한 감정이 생기면서 편지의 내용도 달라지기 시작했고 김 씨는 더 이상 둘의 편지를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제가 아무리 농촌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어도 부모님은 제가 농촌으로 시집가서 농사를 지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대학공부까지 가르치셨던 거죠. 그렇게 곱게 키운 딸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일어서는 시골 총각과 연애를 한다고 하면 까무러치실게 분명했기 때문에 굳은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부모님께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편지로만 사랑을 나누던 김 씨는 편지를 주고받은지 8개월만에 대구에서 개최된 지도자대회에 참석하러 내려온 신 씨와 만나게 됐고 신 씨에 대한 마음을 결심하게 됐다.

이상과 현실

김 씨는 신 씨와의 결혼을 결심하면서 시댁에 인사를 가게 됐다.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올라온 강원도의 시댁은 김 씨가 꿈꾸던 농촌의 생활과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김 씨는 낡고 허름한 집을 보고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집안에 한발을 들여놓은 순간 정성껏 청소돼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실망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마당에 풀한포기 없고 집안에 먼지 한 톨이 없었어요. 표시가 날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된 집을 보고 ‘내가 도대체 이 집안에 뭐길래 나 하나 온다고 이렇게 정성을 들이셨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정성에 감동해 다른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이 집안의 사람이 돼야겠다’란 생각밖에 안들더라구요.”

그렇게 결심을 굳혔지만 친정부모님의 반대로 결혼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듯 부모님도 결국 딸의 뜻을 꺾지 못했고, 둘은 알게된 지 1년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렇게 살고 싶던 농촌에서 그렇게 결혼하고 싶던 남자와 결혼해 행복할 것만 같던 김 씨는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게 아닌데’란 생각이 들었다.

“제가 생각했던 농촌생활이 아니었어요. 결혼을 하면 당연히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고 출퇴근하듯 농사짓는 남편 뒷바라지 하며 산책삼아 취미삼아 농사일을 거두는 생활을 하게 될 줄 알았죠.”

그런 김 씨에게 직접 부딪친 농촌 생활은 그의 말을 빌자면 ‘지옥’ 같았다고 한다. 결혼 하자마자 아이를 갖고 그 후 3년간 아이만 키우며 일을 하진 않았지만 시어머니가 일 하시는 모습을 보고 내가 장차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숨이 막혀왔다고 한다.

결혼하고 이제 그만 포기하고 도시로 가자고 남편을 몇 년간 설득했었다.

“일 한만큼 소득이 있는 그 당연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철이 없었어요. 전원생활만 꿈꿨지 그 전원생활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나도 두손을 걷고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던 거죠. 결혼 후 5년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보냈어요.”

앞서가는 신(新)여성

그렇게도 적응에 힘들어하던 김 씨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시부모님의 사랑이었다.
“시어머니가 제가 시집오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구요. 제가 인사오던 날 대문밖에서 두꺼비가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더니 부엌안에 들어와서 멈추더래요. 그래서 이게 무슨 징조인가 하고 내쫓지 않으셨데요. 그런데 그 두꺼비가 사람이 와도 도망도 안가고 며칠씩이나 머물다 가더래요. 그 말씀을 해주시면서 제가 들어온 날부터 집안 형편이 나아지는 속도가 배는 빨라졌다고 그러시면서 ‘복덩이’라고 고마워하시더라구요. 그 말씀을 듣고 있으니 도망갈 궁리만 하던 제자신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어떻게 해서든지 꼭 적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렇게 애쓰는 김 씨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남편 신 씨는 아내에게 ‘농업기술센터’를 추천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교육을 받다보면 쉽게 농촌에 적응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때문이었다.

김 씨가 농업기술센터에 다니면서 농촌생활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도와준 단체는 바로 뿌리교실이었다. 지금의 한여농의 전신인 뿌리교실에 가입해 활동하게 됐고 김 씨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에 회장직을 맡게 돼 12년 후까지 모임을 이끌었다.

당시 농업기술센터에서는 생활개선이란 명목아래 수많은 교육들이 진행됐었다.

“개발요리를 비롯해 병조림, 장신구 등을 배우고, 여러 가지 교육을 받으며 점점 농촌생활에 적응해 갔어요. 나중엔 저처럼 적응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니까요.”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촌생활에서 상상도 못했던 것들을 배워 내놓으니 집안 어르신들이 너무도 좋아했다. 지점토, 한지공예 등을 배워와 집을 꾸미고 새로운 요리법을 배워 어느새 김 씨는 동네에서 으뜸가는 신여성이 돼있었다.

회원 모두 자신만의 무기 갖길…

당시 생활개선회는 새마을부녀회원만 가입할 수 있어 젊은 층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부녀회원들이 활동하다보니 생활개선회는 다른 단체에 비해 교육도 활발하고 사업규모도 컸다. 그래서 뿌리교실활동을 하면서도 생활개선회를 항상 동경해왔다.

1996년에 생활개선회가 사단법인이 되면서 젊은 층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그 무렵 한여농도 생겨 뿌리교실의 회원들은 하나같이 한여농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김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생활개선회에 가입했고, 그 열정을 인정받아 가입과 동시에 면 총무직을 맡게 됐고 그 이듬해에는 시 총무직까지 맡게 됐다.

“젊은시절부터 동경하던 생활개선회에 가입하는 순간 평생의 꿈을 이룬듯 한 느낌이었어요.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아요. 남들이 인정 안해줄지 몰라도 나름대로 고비고비 어려운 일이 많았었는데 생활개선회가 아니었다면 그 모든 고비를 넘기기 힘들었을 꺼예요.”
생활개선회는 김 씨에게 그 자체만으로 큰 힘이 됐고, 오늘날의 김 씨가 있도록 버팀목이 돼준 단체였다.
“저는 생활개선회원이 단순히 회원으로서만 활동하길 원하지 않아요. 여성농업인들을 대표하는 단체인데 적어도 자신의 동네에서 만큼은 계몽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늘 회원들에게 자신만의 무기 한가지씩을 가지라고 강조해요. 그 무기라는게 별게 아니예요. 나는 풍물은 자신있다든지, 나는 뜨개질은 자신있다든지, 천연염색, 공예 등 얼마나 분야가 많아요.”
이렇게 말하는 김 회장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을까?
“한과면 한과, 한지공예면 한지공예, 또 현재 강동면에서 3년째 풍물놀이를 배우고 있어요. 저는 그 분야의 전문가는 되지 못하지만 제가 배운 모든 것들은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어요.”
김 씨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올해 강릉시에 농촌대학이 설립돼 1기생으로 강릉시생활개선회 임원들 모두 등록을 마쳤다. 임원들이 모범을 보여 대학1년과정을 수료해 회원들에게도 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김 씨는 생활개선회 임원들에게 무조건 1년에 한가지씩을 교육을 이수하자는 제안을 했다. 임원들이 솔선수범해 모범을 보여야 회원들을 이끌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년에 떡·한과반을 시작으로 올해는 폐백·이바지 반을 이수하기로 했다.
“생활개선회를 만나고부터 제 삶이 변한것 같아요. 농사꾼으로서의 삶이 죽도록 싫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시 태어나도 다시 농촌에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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