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의 이아름(28세) 씨를 만나게 된 데에는 이전 소개됐던 졸업생들의 강력한 추천때문이었다. 특히 103호에 소개됐던 최선미 씨는 2학년 당시 이 씨의 조직배양실로 실습을 나오면서 인연을 맺었고 “그 누구보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며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아름 언니가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다”며 소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러 가지 이 씨를 소개하는 얘기들을 듣고 이 씨를 찾아간 길. 약간은 독하고, 억세게 보이는 여성농업인을 상상했다. 그런데 직접 만나 본 이 씨는 너무나도 앳된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꽃이 좋았던 여고생

이 씨는 전라남도 장흥에서 화원을 경영하시며 수생식물을 재배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어렸을 적부터 항상 꽃을 보고 자란 이 씨는 꽃에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씨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시골에서 농사짓고 산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시골에 살면서도 자신이 나중에 시골에서 살 것이란 상상을 전혀 하지 못했던 이 씨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본인은 시골에서 살지만 자식만은 도시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했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으로 광주로 전학을 가기 위해 임시로 상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됐다.
잠시동안이었지만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이게 내 길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꼈던 이 씨는 교복이 나오기도 전에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특별히 농사를 짓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시골에 살고 부모님이 농업에 종사하고 계시지만 다른 사람이 흔히 하는 농사가 아니어서 농사란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어요. 농업에서 아는 것이라고는 화훼분야가 전부였을 정도니까요. 단지 공부가 적성에 안맞아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막상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보니 차라리 농사를 짓는 것이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농업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이 씨. 너무도 당연하게 원예과에 들어갔다. 어쩌면 남들이 봤을 때 아무 생각없이, 아무 고민없이 결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씨는 그날 결심 이후로 농업인이 되겠다던 자신의 결정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드디어 찾게 된 ‘My way’

“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내가 나이가 조금만 젊었어도 배양일을 했을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배양일이 뭔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꼭 배양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나 모든 것이 이 씨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농업고등학교로 전학을 하다보니 다른 학생들보다 입학시기가 조금 늦춰졌고 그 바람에 배양실의 인원이 꽉차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아쉬움을 가득 안고 3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실습기간이 다가왔다.

“농업고등학교는 졸업 후 몇 개월간 의무적으로 실습을 나가야했어요. 이때가 기회다 싶었죠. 이 기회에 배양일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배양실로 실습을 나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어요. 결국 전남농업기술원의 배양실에서 실습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그렇게 그리던 배양실습을 하게 된 이 씨는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의 길을 찾자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대학도 들어가고 평범한 삶을 살길 원하셨던 부모님의 뜻을 뒤로하고 ‘한국농업대학(이하 한농대)’에 진학하게 됐다.
그리고 3학년이 되던 때 지금의 남편인 강호진(29세) 씨를 만나게 됐다.

또래들보다 한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유난히 듬직하고 어른스러운 강 씨의 모습에 반해 이 씨가 먼저 관심을 보였다. 주말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 이 씨의 용돈까지 챙겨주는 모습에 내 인생을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둘은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정말 바라던 일과 이상형의 반려자까지 동시에 찾게 된 이 씨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패기 하나로 극복한 고난

막상 결혼을 결심하자 난관이 많았다. 남편의 위로 형제들이 많은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금전적인 어려움이었다. 결국 둘은 결혼식을 미루고 우선 기반을 잡는데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나이가 어린데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었을까?

“그 때가 아니면 결혼을 못할 것 같았어요. 학교의 방침상 졸업을 한 후 의무적으로 정해진 기간동안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서로 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했거든요. 거기다 남편이 군 특례를 받기 위해선 졸업하자마자 후계자금을 지원받아야하는데 만약 지원을 받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흐지부지 다 써버릴 것 같더라구요. 둘다 어디에 투자할지 계획을 다 세워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지체할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당찬 결심으로 시작했지만 현실은 너무도 버거웠다.
시아버지가 김천에 땅이 있었지만 배양은 땅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후계자금을 6천만 원을 받아 시설에 투자했지만 턱없이 부족했어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는데 시부모님은 저희가 금방 망할 줄 아셨데요. 그래서 투자를 많이 안해주셨어요. 지금도 지금 배양실이며 집이며 저희들 마음에 들지 않아요. 지금 배양실에 창문이 여섯 개나 되는데 배양실은 온도나 습도에 변화가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창문이 있으면 안돼거든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나중에 망해서 정 할 것이 없으면 식당이라도 할 수 있게 창문을 내야 한다고 고집하셔서 할 수 없이 뜻에 따랐죠.”

이런 어려움 쯤은 별것이 아니었다. 금전적인 어려움보다 부부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정신적인 어려움이었다. 배양 일을 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시부모님에다 멀리 시집간 딸이 못마땅했던 친정부모님으로 인해 처음 몇 년간은 마음 고생이 심했었다. 특히 김천으로 시집을 가겠다고 결심한 딸이 괘씸했던 친정부모님은 1년동안 연락도 안하고 지냈다고 한다.

“시부모님도 마찬가지지만 친정부모님도 지금은 마음에 안들어하시지만 우리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시면 언젠가는 인정해 주실것이라 믿었죠.”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일

처음 남편이 배양실을 짓고, 자재를 구입하고 하는 1년간 이 씨는 대학 2학년시절에 1년간 실습을 나갔던 하남의 배양실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서 정말 본격적으로 일을 배워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사장님의 배려로 월급을 받는 대신 본인 물건은 직접 만들어서 가져가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결정은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배양은 씨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처음 3년간은 수입이 전혀 없거든요. 그런데 그 덕분에 다음해부터 수입을 낼 수가 있었죠.”
이런 얘기를 듣다보면 고생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은 듯 하다.

작업환경도 문만 열면 집이니 쉬고 싶을 때 맘껏 쉴 수 있고, 아무리 더운날에도 실내에서 에어컨바람 쐬가며 일하고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일정한 온도의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씨는 만약에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처음에 일을 할때에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해서 새벽이 되기전엔 잠을 자본 적이 없었어요. 아침부터 저녁 7시 반까지 화장실 두 번가는 시간과 점심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서 한번도 일어날 수가 없었죠. 또 한시간 동안 저녁식사를 허겁지겁 마치고 새벽까지 재배실 일을 해야만 했었죠. 코피를 쏟아가며 일을 했었지만 그 당시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좋기만 했어요.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해냈지 남의 일이었으면 절대 못했을 일이예요. 다시 그때처럼 일해보라면 아마 못할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나는 농업인

지금 현재 이 씨는 배양실 100㎡(30평), 순화온실 331㎡(100평), 재배온실 825㎡(250평)을 운영하고 있다. 경기 악화로 많이 줄긴 했지만 연매출도 1억여원 정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기에 현재에 100% 만족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한번도 꿈이 바뀐적이 없어요. 이렇게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늘 해요.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일이 좋아 일에 매달리다보니 아이를 낳고 작년에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반대하셨던 친정부모님도 이제는 그런 딸을 대견해하신다.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어보이는 이 씨 부부에게도 바라는 점이 있을까?
“지금도 물론 일이 쉽지는 않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편해진 거예요. 지금은 일요일엔 무슨일이 있어도 쉬려고 노력하고 일도 저녁 7시 전엔 끝내요. 또 여름에는 3일정도 휴가도 갖고 있죠.”
이말을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원래 결혼 전에 생각했던 삶이 있었어요. 일은 5시간만 하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삶이요. 딱 5년만 고생하자고 약속했는데 살다보니 벌써 5년이 지나버렸네요. 뭐 결혼 전 약속은 대한민국 남자들 다 안지키는 것 아니냐”며 “그래도 이번 5년 안에는 꼭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노력할 꺼예요”라며 이 씨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지금 집에서 조금 내려가면 남편이 어렸을때 살던 집터가 있어요. 이곳은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그곳에 예쁜 집을 지어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파티도 하며 살고 싶어요. 남편이 5년안에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니 한번 믿어볼 생각이예요”라며 이 씨도 남편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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