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응봉면 증곡리, 대중교통도 다니지 못하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을 한참 따라가야 나오는 이곳에 ‘예산여성농업인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특별히 규모가 크지도, 특별히 주목 받지도 못하는 이곳이지만 농촌의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겠다는 각오는 대단하다. 묵묵히 항상 그 자리에서 누구든 기댈 수 있는 곳이 되고 싶다는 ‘예산여성농업인센터’. 조강옥(49세) 대표에게 이곳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연히 알게된 여성농업인센터
조 대표가 센터 운영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참 남달랐다.
“대부분의 센터들을 보면 여성농업인단체를 통해 시작하거나, 어린이집 운영을 위해 시작하거나, 지역 주민의 필요에 의해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저는 홍성여성농업인센터를 보고 정말 의미있는 사업이라고 생각되더라구요.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됐죠.”

당시 조 대표는 11570㎡(3천5백여 평)의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부모가 농사짓는 모습을 보며 자란 조 대표의 세 아이들은 당연하게 농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홍성에 위치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이하 풀무학교)를 알게 됐고 첫째 아이에게 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그렇게 시작된 풀무학교와의 인연은 올해 셋째아이를 입학시키면서 지속됐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학부모들과 만남이 잦아지면서 홍성여성농업인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학부모와 알게됐다.

몇 번의 왕래를 통해 홍성여성농업인센터의 안정순 대표와 친분을 쌓게 됐고 안 대표에게 센터 운영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좋은일일꺼란 생각만 가지고 설득에 넘어갔어요. 그러나 단순하게 봉사활동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준비를 하면서 알게된 여성농업인센터는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했어요. 수익사업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들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힘겨웠던 개소 과정
예산여성농업인센터는 다른 센터들보다는 늦은 시기인 2005년에 개소했다. 이미 그때는 2001년 시범적으로 실시되던 4개의 센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무작정 뛰어들었던 조 대표는 준비를 하면 할수록 어려움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받을 곳조차 마땅치 않아 막막했다. 조 대표는 이렇게 골치아픈걸 왜 나보고 하라고 했을까 하고 홍성의 안 대표를 살짝 원망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홍성센터가 없었다면 저희도 공주처럼 중간에 포기해버렸을지도 몰라요. 서류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농사만 짓던 아줌마가 하기 힘든일 투성이었거든요.”
또 조 대표가 힘들었던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홍성여성농업인센터가 위치한 홍동면같은 경우는 마을사람들 전체가 먹거리의 소중함을 알고 환경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예요. 그러다 보니 자기 마을에 대한 애착심도 아주 뛰어나죠. 그래서 운영위원이 내실있게 구성돼 있어요.”

그 모습을 보고 혼자가 아닌 함께 한다면 그리 힘들지 않을꺼라 생각했다는 조 대표는 운영위원을 꾸리는 일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예산은 과수원을 하는 농가가 많다보니 다른 농촌지역에 비해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편이다. 그러다보니 다들 힘들게 사업을 꾸리는 일보다는 자치센터나 농업기술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교육에 참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소장 혼자 준비하려니 개소 과정이 정말 힘겨웠다.

“지금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까워서라도 못 그만두겠더라구요.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마다 그때 힘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마음을 다잡죠.”

단 한사람의 여성농업인을 위해서라도…
흔히 농촌지역을 문화·복지의 사각지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잘 찾아보면 도시 못지 않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경우가 많다 .

“농업기술센터나 주민자치센터를 이용할 수 있는 여성농업인들은 혜택을 많이 받는 편이예요. 오히려 도시 주부들보다 더 좋은 혜택을 받는 경우도 있죠. 그러다보니 예산을 지원받는 그곳의 교육을 받다가 여성농업인센터의 교육을 받으면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죠.”

상황이 이렇자 조 대표는 계속해서 더 좋은 교육, 질 높은 프로그램을 진행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게 됐다. 그러다 보니 ‘돈’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부정기 사업에는 따로 예산이 책정돼있지 않아요. 그렇다고 여성농업인들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우리 힘으로 자금을 마련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사업이 양말 판매였다. 공장에서 양말을 대량으로 구입해다 싼 가격에 판매하는 사업이었는데 이 조차도 아무거나 여성농업인들에게 판매할 수가 없어 질 좋은 양말로 준비했다.

“처음에는 워낙 싼 양말들이 시중에 많다보니 잘 안팔렸어요. 그러다 사가신 분들이 정말 질 좋다고 입소문을 내줘 판매가 많이되기 시작했죠.”

그 덕에 자부담금이 충당됐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교육을 준비해도 이미 수준이 높아진 여성농업인들에겐 아직 부족했다.
남들이 다하는 교육으로는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게된 조 대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언론에서 농촌의 성공사례가 많이 소개되다보니 농촌의 어려운 사람들은 도시 빈민층보다도 소외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시내로 나와 교육도 받고, 취미활동도 하라고 부추길 수만은 없었죠. 그래서 찾아가는 교육을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의욕이 앞섰던 조 대표는 거의 매일 마을을 돌아다니며 교육을 했다.
매일 이마을 저마을 돌아다니며 교육을 진행하고 센터업무도 봐야하다보니 거의 12시가 다돼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가 교육 하나만 진행하려해도 몇 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매일 몇시간씩 따라하다보니 운동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몇 달 그렇게 운영하다 보니 몸은 몸대로 지치고 집안 꼴도 엉망이 되갔다.

“한참 그렇게 일하다보니 보람은 느낄 사이가 없이 의구심만 들게 됐어요.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지…. 이러다가 센터 운영자체에도 회의를 느끼게 될까 두렵더라구요. 이래서는 안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법을 바꿔야 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조 대표는 직접 모든 것을 진행하던 이전 방식을 바꿔 신청하는 마을의 운영위원이나 부녀회장에게 모든 진행을 일임하고 ‘서포터’역할만 충실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번 일을 진행하다보니 혼자서 진행할 때보다 운영도 수월하고 교육 참여도도 높아졌으며, 교육 성과도 높아졌다.

“늘 리더십 교육이다 지도자 교육이나 열심히 준비했었는데 그것보다 이 방법이 훨씬 좋더라구요. 이런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키워지고, 운영위원들과 부녀회장들이 그 마을마다 중간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어요.”

이렇게 예산여성농업인센터는 찾아가는 교육을 통해 농촌의 문화·복지의 사각지대도 해소하고 농촌의 여성 지도자, 지역 리더를 양성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

결혼이주여성도 모두 여성농업인
예산여성농업인센터가 어린이집과 방과후 교육보다도 더 열성을 다해 진행하는 사업은 바로 결혼이주여성사업이다.

“처음엔 이런 사업을 할 생각조차 없었어요. 그때만해도 저조차도 결혼이주여성들을 낯선 이방인 정도로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던 중 예산여성농업인센터 어린이집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다른 아이들과 외모가 남다른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의 자녀였다.

그 아이는 외모만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입맛과 습관, 문화 전체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빨간색 음식은 맵다며 방울토마토조차 먹지 않던 아이 때문에 조 대표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알고보니 그 아이 엄마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이까지 음식을 안먹였더라구요. 주말지나서 오면 변비에 시달리고 일주일 내내 고생해서 낫게 하면 또 반복되고…. 이렇게 하다가는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근본부터 바꿔야 했어요.”

그래서 조 대표는 그날로 대전의 한국어강사 교육을 신청했다. 한달간 5시에 퇴근해 7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는 교육을 받고, 12시에 귀가하는 일상을 되풀이 해 한국어교육 자격을 취득하게 됐다.
그리고 예산 지역 최초로 결혼이주여성 상시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지금은 희망의 시기”
처음에 어려웠던 시기를 잘 극복하고 지금 어느정도 자리가 잡혀가고 있는 예산여성농업인센터지만 아직 어려움이 많다.
올해 난방비를 비롯한 급등한 물가에도 불구하고 예산이 동결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포기할 조 대표가 아니다.

“매년 풍물·악기 교육을 진행하고 공연까지 하고 있어요. 모두들 공연을 위해 연습하다보니 열의도 뛰어나고 성과도 대단해요. 이런 모습을 보고 한 가지 사업도 중단 할 수가 없겠더라구요. 예산이 없다면 만들어보자란 생각에 문예진흥기급에 예산을 신청했고 예산을 확보하게 됐죠. 이런 식으로 제가 조금 더 뛰면 많은 여성농업인이 행복해질 꺼란 생각이 들어요.”

조 대표는 이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10년째 상담교육을 받은 것도 모자라 올해는 대학원 노인복지과에 진학해 노인 집단상담을 진행할 계획이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후회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일을 하다보니 해야할 일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일도 해야하고 저일도 해야하고… 이러다 보니 좌절하고 있을 시간도 부족해요. 해야할 일들이 넘치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기더라구요. 할 일이 많다는 것, 이게 바로 ‘희망’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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