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생활개선회 남상숙(53세) 회장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새벽에 일어나 밤 늦게 까지 일하는 그의 생활 습관은 결혼 하고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는 남 회장. 죽어도 농사는 안짓겠다던 천방지축 소녀가 버섯으로 승부를 걸어보겠다고 야심찬 다짐을 하는 여성농업인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 스토리를 한번 들어보자.


농사가 죽도록 싫었던 소녀

6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난 남 씨는 어려서부터 농사가 지긋지긋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수도작을 했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같이 농사일을 도왔는데 이상하게도 농사일은 익숙해지지가 않더라구요. 그렇다고 부모님이 힘들게 일을 시킨 것도 아니었고 형제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이유없이 농사가 싫었어요.”

그렇다고 특별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든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든지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저 농사가 ‘죽도록’ 싫었을 뿐이었다.

“언니, 오빠가 워낙 열심히 일을 도왔었고, 동생들도 나름대로 요령 안피우고 일을 돕고 있어서 마음의 부담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조차 없는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농사가 죽도록 싫은데…”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뛰쳐나오듯이 서울로 올라왔고 사촌언니가 운영하던 속옷매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당시 유명 속옷회사 직영점을 운영하던 사촌언니의 사업수완이 워낙 좋아 사업은 날개를 단듯 성공가도를 달렸고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다.
어린 나이에 큰 돈을 벌게 된 남 씨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 너무 큰 돈을 벌게 되니 돈 귀한 줄 모르겠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잘 될 때 얼른 돈을 모아 내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장사가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밖엔 안들었으니까요.”

그렇게 장사에도 싫증을 내고 있던 철없는 남 씨의 나이는 벌써 25 세. 또래들은 이미 결혼해 아이 엄마가 됐을 때였다.

드라마같은 결혼 스토리

본인은 그다지 결혼에 대한 필요성도, 다급함도 못 느꼈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외지에 나가 혼자 살고 있어 항상 안쓰럽고 걱정스러운 딸이 혼기마저 놓치고 있자 부모님이 직접 발벗고 나섰다.

“당시 시골에서는 22살이 결혼 적령기였어요. 그러니 25살은 노처녀 중에서도 노처녀였죠.”
그래서 부모님은 남 씨와 상의도 없이 선자리를 주선했고 끌려나가듯 나간 그 곳에 앉아있던 남자는 남 씨의 이상형과는 한참 거리가 떨어진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자리를 비우시고 그 남자의 눈치를 봤죠. 그랬더니 그 남자분도 저랑 비슷한 처지였던것 같더라구요. 서로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합의’를 보고 웃으며 헤어졌어요. 그리고는 그 날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죠.”

그리고 한달이 지난 어느 날. 남 씨에게 청천벽력같은 전보가 도착했다.
약혼식이 내일로 잡혔으니 늦지 않게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전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결혼은 보름 후로 잡았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란 말도 적혀있었다.

“머리가 멍해져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그 남자의 얼굴과 이름조차 생각이 안나는거예요. 부모님은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잘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날을 잡으셨던 거죠. 그날 밤새 잠 한숨 못자고 울기만 했어요.”

남 씨는 퉁퉁부운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로 약혼식장에 가게 됐고 그렇게 옛날 드라마에서나 일어날것같은 말도 안돼는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한번에 찾아온 행운과 불행

준비가 안돼있기는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을 올리고도 서먹했던지 남편은 결혼식을 하고도 한달씩 출장을 갔다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 정이 들기가 더 힘들었다.

그러던 중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게됐다. 남편의 잦은 지방 출장도 그 때문임도 알게됐다. 그 와중에 첫 아이가 들어서게 된 남 씨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게 됐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살면 안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결혼식도 올렸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계속 이렇게 불평만 하고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아마 늦게나마 철이 든 것 같아요.”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남편 뒷바라지를 시작한 남 씨는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뛰어들었다. 부업도 해보고 직장도 다니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모아 난생 처음으로 부천에 49.5㎡(15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해 드디어 ‘내 집’을 갖게 됐다.
부천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남편은 회사를 그만뒀고 둘은 오락실과 당구장을 개업했다.

“정말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할 것 같았어요. 돈을 긁어모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가게를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32㎡(40평)이 넘는 단독주택도 구입하고 자가용까지 몰고 다녔으니까요.”

이제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던 때,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다. 갑자기 직원이 돈 문제로 사고를 일으키고 당구장이 망하는 등 안좋은 일이 겹치기 시작했다.

“당구장을 접고 시작한 야채도매업도 일이 잘 안됐어요. 그러던 중에 아이아빠가 새벽에 야채를 받아오던 중에 교통사고를 냈죠. 피해자가 사망하게 되면서 둘다 갑자기 도시에 대한 정이 떨어져버렸어요.”

아무리 도시에 대해 정이 떨어졌어도 어린시절 외에 도시에서만 살아온 남 씨가 다시 시골로 내려가기는 힘들었다. 과연 그곳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란 걱정도 됐다.

“친정엄마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아인 절대 시골에서 살 수 없는 애다. 데려가면 자네만 고생할 것’이라며 남편을 말렸어요. 그렇지만 남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고 시댁이 있던 온양(지금의 아산)으로 내려왔죠.

독한 마음 먹고 살아온 30년

남편을 따라 내려온 시댁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산으로 둘러쌓여있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것은 하늘 뿐이었다. 이런 곳에 고립돼 엄한 시부모님 모시고 살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당시 시부모님은 표고목 사업을 하고 계셨어요. 표고목 사업은 산속에서 작업을 해야해서 남편은 집을 나가 따로 산밑 숙소에서 생활해야했죠. 남편과 떨어져 시부모님을 모실 생각을 하니 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굳게 결심을 했죠.”

남 씨는 시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남편과 함께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3년간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독립을 할 작정이었다.

굳은 결심을 하고 산으로 들어왔는데 표고목 작업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굵은 원목을 하루에 몇 만토막을 날라야했어요. 새벽 3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하면 쉴 틈이 없었죠. 거기다 여자는 저 혼자 뿐이라 화장실 한번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가야 했어요. 그 때 너무 힘들게 일해 지금도 허리를 못 쓰고 있어요.”

하루종일 그렇게 남자들과 일하고 숙소에 들어와 양말을 벗으려고 하면 물집들이 터져 양말과 살이 다 달라붙어 있었다. 겨우겨우 떼어내고 물로 씻으면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잠도 부족한데다 계속 힘을 쓰는 일을 하다보니 남 씨는 뼈만 앙상하게 마르고, 매일 밤 코피를 사발로 쏟았다. 발바닥이며 손이며 몸에 성한 곳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농업기술센터(당시 농촌지도소)의 소장님이 소문을 듣고 남 씨를 찾아왔다.
“그 때가 92년이었어요. 아산으로 내려온지 3년째 되던 해였죠. 그렇게 힘들게 일만 하지 말고 센터로 나와 교육도 받고 사람들도 만나고 하라더라구요. 생활개선회 가입을 권하면서 젊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안쓰러워하더라구요.”
그렇게 남 씨는 생활개선회와 인연을 맺게 됐다.

평생을 건 느타리와의 인연

어느정도 기반이 잡히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뼈 힘 쓰는 일은 더 이상 안하고 싶더라구요. 지금도 허리를 못쓰긴 하지만 젊은 나이에도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본 결과 느타리 버섯으로 작목을 바꾸기로 결정했죠.”

버섯이라면 자신있었기 때문에 어떤 버섯이든 별 문제 없을꺼라 생각했던 남 씨 부부는 결심을 한 순간부터 당황스럽기까지했다. 후계자금을 신청해 시설 두동을 건축하고 기계와 장비를 임대해 준비는 갖췄지만 재배하는 기술을 익히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표고버섯 재배와 느타리버섯 재배는 방식부터 달랐다. 균이라고 다 같은 균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의 3년간은 벌어들이는 액수보다 투자하는 액수가 더 컸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와중에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게 됐어요. 돈 들어갈데는 많아지고 일은 생각만큼 잘 안돼고…. 일이 힘들어지다보니 부부싸움도 잦아지더라구요. 표고목작업을 할때 그렇게 힘들때도 그런 생각을 안했는데 남편과 사이가 안좋아지면서 심적으로 힘들어지니까 이럴때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구나 싶을 정도였죠.”

남 씨 부부는 이보다 더 힘든 일도 겪어왔는데 이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시 일어서자고 다짐했다. 시간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고 남들 잘 때 일을 하면 분명히 남보다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결혼해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4시간 이상을 자 본적이 없어요. 낮잠이란 것도 없었구요. 지금도 그 생활이 몸에 익어서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 지금은 6동의 시설에 330㎡(100평)이 넘는 배양실을 갖추고, 한 살림에 납품을 하게되면서 판로에도 안정을 찾게 됐다.

느타리에 내 전부를 걸겠다

“지금도 친 언니가 나를 볼때마다 신기하다고 말해요. 그렇게 농사도 싫어하고 철없던 제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하다나봐요.”
그렇게 시골이 싫었던 남 씨는 이제 시골을 벗어나면 숨도 쉬지 못한다고 한다.

“가끔 일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면 코가 답답해지면서 머리가 아파와요. 하루만 자도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어요. 젊은시절 내가 살던 곳이었는데도 지금은 그렇게 낯설 수가 없어요.”
신기한 일은 그 뿐만이 아니다. 평생 하고 싶은 일도, 좋아한 일도 없던 남 씨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꿈이 생긴 것이다.

“제 꿈은 두가지예요. 하나는 한 살림에서 판매하는 느타리 버섯 전 물량을 우리가 납품하는 것이구요. 또 하나는 느타리버섯을 이용한 가공식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거예요. 이건 생활개선회 덕분에 생긴 꿈이에요. 생활개선회가 아니면 꿈도 못꿨을 꿈이거든요.”

작년 처음으로 열린 아산시음식경연대회에서 생활개선회가 대상을 수상했다. 대상을 차지한 요리는 ‘찹쌀로 만든 쿠키와 케이크였다. 당시 아산시의 각종 호텔과 대형 식당에서 출전을 했는데도 당당하게 생활개선회가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요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생활개선회 덕분에 각종 요리법과 가공법도 교육받았구요. 생활개선회에서 전수받은 실력을 통해 음식분야로 진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느타리버섯이 인생이 전부가 돼버렸다는 남 씨. 남 씨가 느타리버섯계의 최고가 될 날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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