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한번 지어본 적 없고, 농사짓는 모습을 본 적도 없던 라빛나(29세) 씨가 농사를 택한데에는 부모님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또 농업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라 씨의 곁에는 항상 교수님과 선배·동기들이 있어 힘이 됐다. 또 지금은 친언니같은 사장님과 친자매같은 동료가 있어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라 씨를 농업계로 이끌어 준 사람들의 고마운 사연을 들어보자.


“요리밖에 몰랐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한국농업대학(이하 한농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라 씨에겐 요리가 전부였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일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음식과 가까워진 라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요리를 배우기 위해 대학진학을 미뤘고 요리학원에 다니게 됐다. 한식·일식·중식 자격증에 제과제빵 자격증까지, 정말 라 씨는 요리만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요리와 함께 부모님의 식당경영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요리사의 꿈을 키우던 라 씨에게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제안 하나를 했다.

“부모님이 땅을 조금 갖고 계셨어요. 농사에만 전념할 만큼 넓은 땅은 아니어서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지만 항상 농사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으셨었죠.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우연히 한농대를 알게 되신 거에요. 학교에 들어가 부모님의 그 꿈을 이어받으면 어떻겠냐고 물으셨죠.”

라 씨의 부모님은 항상 나이가 들어 식당일을 하기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농사를 짓고 싶어했다. 그러나 농사라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라 씨의 부모님 역시 농사를 한번도 지어본 적도 없고, 농사짓는 것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농사를 시작하기가 항상 두려웠었다. 그러던 중 한농대를 알게됐고, 자신들은 대학교에 들어가기엔 늦었지만 딸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 전부터 부모님의 귀농에의 꿈은 알고 있었지만 라 씨에게 그것은 단지 부모님의 삶일 뿐이었다. 단 한번도 자신과 결부시켜본적 없었던 농업을 권유받고 라 씨는 적잖이 당황했다.

“농업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라 당황된 거였죠. 제가 하고자 하는 꿈이 없었던 것도 아니구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4년동안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하나만 꿔오던 라 씨에게 농업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농업 초보자의 어려움
어머니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라 씨는 한농대로의 진학을 고려해보기로 했다.
“대학을 안가려던 것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어느분야든 인정받기 힘든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요리쪽에 경력이 좀 쌓이면 대학에 들어가 학위도 받아 전문가가 되려고 했었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과 설득에 대학생활도 즐길 겸 새로운 분야도 도전해 볼 겸해서 선택하게 됐어요.”

과를 선택하는 과정도 라 씨에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부모님이 하고 계신 작목이 있었다면 도움이 됐을테지만 라 씨가 아는 농사란 것은 그저 벼농사와 하우스, 과수원 일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라씨는 한농대에 화훼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고, 꽃을 키우는 것도 농업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됐다.

“화훼정도라면 저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용기가 생기더라구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보란듯이 잘 해내보자란 오기까지 생기더라구요. 젊음을 믿고 잠시 새로운 길을 한번 가보는 것 뿐 요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죠.”

그렇게 용기를 얻어 들어간 학교지만 첫 수업시간부터 절망의 연속이었다. 수업내용을 하나도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수업 내용이 복잡하다거나 어렵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아예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용어 자체가 너무도 전문적이고 어려워서 도대체 우리나라 말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서운한 생각이 들어요. 이제 다 알고 보니까 쉬운 말로, 쉬운 단어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거든요. 교수님들은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이 농업고등학교를 나와서 기본 지식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었나봐요. 알고보면 대부분이 저같은 학생들이었는데도 말이죠.”

절망 끝에 한줄기 ‘빛’
라 씨의 어려움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입학 당시 라 씨의 나이는 24세. 동기들보다 4살이나 많았던 것이다. 동기들은 오히려 괜찮았다. 나이 어린 선배들로 인해 서운한 일이 자주 생기게 됐다.

“1년동안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에 가졌던 용기는 다 사라져 버렸어요. 거기에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의 트러블은 학교생활을 지치게 만들었죠.”

결국 라 씨는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려고 결심했다. 지금 최선의 선택은 휴학이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휴학을 하려니 휴학을 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더라구요. 제가 한농대에 입학하고 저보다 더 기뻐하시며 기대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니 제 결심을 밀어붙이기가 힘들더라구요.”

그렇게 하루하루 휴학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휴학 시기를 놓치게 됐고 시간은 흘러 2학년 실습시기가 다가왔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제대로 된 농촌으로 실습으로 가서 농촌을 제대로 배우고 오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수님께 농장 실습을 신청했다.

“어떤 분야든 일 많은 농장으로 가게 해달라고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교수님이 절 한참을 보시더라구요. 아마 그 때 교수님은 저를 보면서 이 아이를 농장으로 보내면 정말 농업과 멀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란 생각이 들었었나봐요. 교수님은 ‘농장일은 여자가 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냥 여자도 아니고 너처럼 농사경험이 전혀 없는 여자가 농장에 가면 며칠도 못가서 포기할 것’이라군요.”

교수님은 ‘조직배양’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사실 라 씨는 조직배양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활동하는 일이 적성에 맞다고 농장에 가겠다고 고집하던 라 씨에게 3학년의 선배 한분이 ‘정말 괜찮은 일이니 경험이라도 해보라’며 적극 추천했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게 된 오산의 한 조직배양 농원에서 라 씨는 한줄기 ‘빛’을 보게 됐다.

요리사의 꿈도 잊게 한 ‘조직배양’
라 씨는 그렇게 남의 말만 듣고 어떤일인지도 모르고 일을 시작하게 됐다. 조직배양일이 어떤일인지 알게 되면서 라 씨는 기대보다 겁부터 났다고 한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일을 어떻게 하나 걱정만 되더라구요. 하루종일 앉아서 하는 일이 적성에 맞을 리가 없다고 단정지었죠. 10달만 잘 버텨보자란 심정으로 시작했어요.”
하루하루 일을 배워가면 갈수록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어찌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라 씨는 조직배양의 매력에 빠져만 갔다.

하루종일 앉아있어도 일하는 동안에는 지루할 틈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본인의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사장님이 조직배양에 대해 얼만큼 배우고 왔냐고 물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더니 오히려 잘됐다고 하시는 거예요.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새로 배우는 편이 쉽다면서요. 귀찮을텐데도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준 사장님 덕에 조직배양일이 더 재밌었던것 같아요.”

중간중간 다른 일을 하는 동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일은 안가르치고 허드렛일만 시키는 실습장이 많다고 했다. 또 같은 조직배양을 하는 친구 조차도 화장실 갈 틈도 안준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말들을 들으며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실감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일이 정말 재밌다고, 이곳 사장님이 너무 잘해줘서 학교로 돌아가는게 싫을 정도라고 얘기하면 믿지 않을 정도였어요. 전 진심이었는데 친구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죠. 사장님과 같이 일하던 언니들은 화장실은 절대 참으면 안된다고, 아무리 일이 밀렸어도 수십번 가고 싶으면 갔다 오라고 할 정도로 배려를 잘해줬어요.”
라 씨는 10달이라는 시간이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그래서 실습기간이 끝나고 개강하기 바로 전까지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 했다. 사장님에게 졸업 후 몇 년간 이곳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받고서야 라 씨는 학교로 돌아왔다.

새로운 꿈, 새로운 희망
조직배양으로 인해 농업에 적응을 하게 됐지만 아직 요리사의 꿈을 접은 상태는 아니었다.
“늘 고비고비가 있었어요. 그럴때마다 내가 고집을 부려 학교에 안들어오고 요리를 계속했다면 지금보다 낫지 않았을까란 고민을 많이 했죠. 그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이 ‘네가 만약 요리를 택했어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법’이라고 하셨어요. 그말을 들으니 힘이 나더라구요”

졸업을 하고 오산 사장님의 소개로 지금 일하고 있는 양재 화훼단지의 ‘예원조직배양실’에 오게 됐다.
“오산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곳에 사정이 생겨서 사람을 받을 수가 없게 됐어요. 다른 곳 같으면 그냥 안돼겠다는 말 한마디로 끝냈을 텐데 그 곳 사장님이 정이 많아서 절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여기 저기 알아보고 이곳에 추천을 했죠.”

이곳의 사장 정소영(33세)는 친 언니 같이 다정다감했다. 사장님만 보고 첫눈에 이곳에 정이 들어버린 라 씨는 망설일 것 없이 이곳에서 일할 것을 선택했다.
“마침 저 말고도 한명 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그때 머릿속에 은혜가 떠올랐죠.”

김은혜(25세) 씨는 라 씨와 7기 화훼과 동기다. 김 씨도 마침 졸업을 하고 창업을 할 기반 없어 여기 저기 알아보던 중이었다. 라 씨는 김 씨를 설득해 이곳으로 불러들이면서 이들이 말하는 ‘최상의 팀’이 만들어졌다.
“사장님이 작업장 근처에 기숙사를 만들어주셔서 은혜와 같이 생활하고 있는데 어찌나 편한지 오히려 집에 가면 ‘빨리 회사에 가서 쉬고싶다’란 생각이 들 정도예요.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친언니같은 사장님과 친동생같은 김 씨와 정말 하루하루 노는 기분으로 일한다는 라 씨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올해 후계자금 2억 원을 신청했어요. 지금 일하는 곳을 떠나긴 싫지만 언젠가는 창업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하자고 마음 먹었거든요. 창업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이왕 시작하는거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시작하라고 하시더라구요.”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부모님이 시설 건축과 자재 구입 등을 대신 해주고 있다.
라 씨는 본인이 해야할 일을 부모님께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이지만 미안한 만큼 더 열심히 배워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정말 지금까지 버텨왔던 것도 또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도 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 덕분인 것 같아요. 제가 생각했을때 전 좋은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인복이 많은 것을 보면 제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나봐요.”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