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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랑스, 신교도 6천명 대 학살의 주도자… 카트린 드 메디치
검은 베일을 입은 우아한 왕비, 천국이요 지옥이라는 극단의 평가
2008년 03월 19일 (수) 11:36:54 박재호 pjaehool@nongupin.co.kr
  
 
  
 
카트린 드 메디치(Caterina de’ Medici, 1519. 4. 13~1589. 1. 5)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 프랑스 왕비다. 이탈리아 왕족 출신인 그녀는 14살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가에 시집와 왕비가 됐고 10명의 자식을 보았으며 아들들이 왕위에 오르자 영민한 머리와 정치 감각으로 프랑스 정가를 원격 조정했다.

카트린은 정치 뿐 아니라, 당시로는 이탈리아에 비해 다소 뒤쳐졌던 프랑스의 문화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 프랑스인들의 식탁에서 포크가 일반화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패션 감각까지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차분하면서도 맑은 목소리를 가졌던 우아한 왕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가졌으며 명석한 판단력과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독특한 협상력을 겸비해 대신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를 암울하게 했던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오랜 전쟁도 왕비는 슬기롭게 중재하며 나라의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절묘한 정치력을 발휘 했다.

그렇다면 카트린 드 메디치가 ‘마녀’ ‘피에 굶주린 학살자’ ‘피범벅의 왕비’등으로 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572년 8월 24일 새벽에 자행된 이른바 ‘성 바르톨로메오 축제날의 대학살’의 명령자가 바로 카트린 드 메디치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6,000여 명이 신교도들이 무차별적으로 살육됐던 것이다.


교황의 기도

‘저 아이야 말로 바람 앞에 촛불과 같아. 저 아이마저 하느님이 데려가신다면 ‘위대한 자, 로렌조’라 불리던 메디치 가(家)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혈통마저 끊어지는 거야.’

교황(敎皇) ‘레오’는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어린 카트린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유럽의 정신적 지주요, 하느님과 인간의 통로로 추앙받는 교황인 자신도 저 연약한 목숨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신의 가호를 바라는 수밖에...

교황은 기도 하고 기도 하고 또 기도했다. ‘하느님이시여 제발 저 아이를 살려주옵소서.’
교항 ‘레오’는 카트린의 아버지 ‘네무르’ 공작의 삼촌이었다.
‘우리 가문의 유일한 끈인 이 아이마저 죽는다면 로마에서 나의 영향력도 확 줄어들 것이다… 이 아이는 반드시 살아야 해’
아이는 여러 날 동안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더니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얘 야 살아줘서 고맙구나.’
‘레오’ 교황은 몇 년 전 자기 조카인 ‘네무르’가 30대 중반이 넘어서도 결혼 할 생각이 없자 프랑스 왕가 쪽에 중매를 걸었다. 가문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결혼에 시큰둥하던 네무르는 웬 일인지 흔쾌히 결혼에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네무르와 프랑스 왕족인 ‘마들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됐다.
그러나 결혼 7개월째가 되던 어느 날, 네무르는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며칠을 못 넘기고 사망한다. 이 때 마들렌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과 한숨 속에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 역시 해산 며칠 만에 유명을 달리한다. 아비와 어미의 얼굴조차 모르는 아이에게 교황은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도록 배려했으나 역시 부모의 정을 전혀 모르고 자라는 아이는 어딘가 그늘져 있었다.

‘가여운 녀석.....’ 교황은 종손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며 왔다.
‘저 녀석은 우리 가문의 유일한 핏 줄이다. 저 아이가 죽는 다면 세상에서 우리가문의 영향력은 사실상 소멸되는 거야...’
그런 아이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 살아 주었으니 교황의 감격과 감사는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슴에 돋는 가시

교황은 카트린의 결혼을 서둘렀다.
‘어떻게든 빨리 이 아이를 혼인시켜 후손을 보게 해야 한다.’
교황의 중매가 안 될 리 없었다. 14살의 카트린은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해야 했다.
결혼식의 화려함은 필설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화려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틀린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흥 이탈리아에서 돈 놀이로 부자가 된 가문의 계집이 여기 프랑스 궁정엔 왜 들어왔대?”(메디치가는 유럽의 왕가와 교황청에 까지 융자해 줄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과시했다.)

“글쎄 말이야. 저 촌스러운 이탈리아 억양 좀 보라지...”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도 찍 소리 못 하는 걸 보면 자기 주제는 좀 아나보지?”
궁정 안의 사람들은 왕세자비인 카트린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았다.

질시와 경멸, 냉대와 묘한 거리감이 그녀를 외롭게 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으나 여러 명의 여자들과 놀아나고 있던 남편은 그녀에게 아무런 정도 주지 않았다.
카트린은 결심했다.

‘그래!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돼. 왕세자비라고 건방지게 굴어서도 안 돼. 내가 그들과 동화되는 거야. 프랑스 억양을 익히고 그들의 풍습과 생활을 존중하고 입에 안 맞는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는 거야.’

어린 신부의 놀라운 통찰력과 자기 절제였다.
카트린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남편의 정부(情婦)인 ‘푸아티에’하고도 낯 하나 붉히지 않고 담소를 나눌 정도의 내공까지 갖춘 성숙한(?) 프랑스 왕세자비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 구석, 저 먼 어딘가에는 뭔가 모를 한(恨)과 원망의 가시가 자라나고 있었다.

프랑스 정치의 핵으로

남편 앙리 2세가 프랑스 왕에 즉위한 것은 1547년의 일이다.
당시 프랑스는 카톨릭인 구교와 카톨릭에 반기를 들고 나선 신교(‘위그노’라 부른다.) 사이에 끝없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근 40년 가까운 종교 내전 동안 프랑스는 둘로 양분돼 국력의 통합이 어려웠다.
왕의 능력은 바로 이 분열된 프랑스를 어떻게 봉합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종교를 빙자한 왕가와 귀족집안끼리의 힘겨루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말이 종교분쟁이지 사실상 권력 암투였던 것이다.

“왜람 된 말씀이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여러 번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카트린은 명석했다.

그녀는 당대의 대학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수 십 번씩 읽어 다 외웠다 할 정도로 지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지적, 학문적 능력은 남편의 그것을 능가해 때론 남편의 무능을 보다 못하고 조언하기도 했으나 앙리2세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앙리2세도 서서히 카트린의 진가를 알게 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보니 그래도 왕비만큼 똑똑하고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도 없었어. 수많은 여인들을 품에 안았지만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었지. 왕비가 하는 말은 틀린 게 없어.’

10년 동안 아이가 없던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줄줄이 태어났다. 카트린은 무려 열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메디치 가에 내려오던 치명적인 병약함의 원인이었을까? 아이들은 대부분 단명했다.
카트린은 앙리2세의 인정을 받으며 서서히 프랑스 정치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막후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음울했던 어린 시절과 14살에 프랑스에 시집와 겪었던 외로움 속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벗으로 알았던 것은 각종 역사서, 철학서, 정치학 개론 등 막대한 량의 서적이었다. 그 속에 담겨져 있던 고금(古今) 석학들의 쟁쟁한 이론과 목소리가 다져 놓은 그녀의 실력이 바야흐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지적 왕비, 맹목적 어머니

1559년 남편 앙리 2세가 죽자, 왕위는 그들의 첫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이어받았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둘째 아들 샤를 9세가 10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카트린은 더 똑똑한 셋째아들 앙리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둘째 아이는 왕위를 지켜낼 강단이 없어.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곧 왕위를 빼앗기고 말거야. 나는 왕위에 대해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단단한 터전을 만들어 셋째에게 왕위를 잇도록 할 거야. 셋째야 말로 자기 왕위를 빼앗기지 않고 제 형제자매들을 끝까지 보호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야.’

그녀는 왕위에 오른 둘째 보다는 셋째를 더 신뢰했다.
둘째가 미워서가 아니라 셋째가 자식들의 버팀목으로 더 믿음직했던 것이다. 힘들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카트린은 어린 자식들을 줄줄이 앞세우면서 공황 상태가 누적됐다. 자식이 떠나갈 때마다 심하게 황폐돼 갔고 남은 자식들을 극도로 과잉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권이고 뭐고 자식들의 안전이 우선이야.’
‘신교도건 구교도건, 교황이건 유럽의 어떤 왕이건 내 아이들, 이 프랑스 궁정의 주인들을 해 하려는 자들은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남편 앙리2세가 죽고 난 후 프랑스의 종교전쟁은 더 심해졌다.
신교도의 맹주 위그노 파는 사실상 프랑스의 또 하나의 제왕이었다.
그러나 카트린은 신구교도의 갈등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을 때 마다 절묘한 중재와 외교술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

때론 교황청의 힘을 빌리고 때론 이웃나라의 개입을 허용하면서 둘로 쪼개질 것 같은 프랑스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프랑스의 위기는 내 아이들의 위기다. 나는 구교도지만, 내 아들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신교도와의 제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누가 됐건 무슨 상관인가? 우리 왕가를 존중하고 내 아들을 왕으로 인정하며 충성을 맹세하는 자와는 누구라도 손잡을 수 있어.’
카트린의 ‘아들 지키기’는 눈물겨웠다.

그녀는 이지적이고 현학적인 여성이었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맹목적인 ‘과잉보호’ 어머니, 자식을 마마보이로 만드는 그리 현명치 못한 여성이었다.

검은 베일의 살인마

카트린은 스페인과 영국의 막강한 왕실과 결혼 동맹을 맺으려고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다. 그들과 사돈을 맺어 놓으면 프랑스 왕권도 안정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카트린은 첫 딸 엘리자베스를 스페인에 시집보낸 후, 둘째 아들인 프랑수아 2세를 영국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시키고자 했다. 이 결혼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급해진 카트린은 16살에 불과한 막내 알랑송을 사십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남들의 시선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구교도인 프랑스 왕실이 신교도의 선봉장인 영국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하려고 하다니....

‘그토록 현명했던 카트린 왕비가 어떻게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이런 공감대가 프랑스와 유럽에 퍼져나갔다. 카트린은 정말이지 자식들 문제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이성을 잃어갔다.

둘째아들 프랑수아 2세는 점점 신교도의 수장인 콜리니 제독을 신임하게 된다.
신교도들의 혁명성과 진보성은 카톨릭을 믿는 왕실에게는 위협이 된다.
‘이래서는 안 돼. 프랑수아는 점점 콜리니 제독의 꼬임에 빠져 들어가고 있어. 왕위가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아이들이 위험해 진다.’

카트린의 눈에 점 점 신교도들은 왕권을 장악해 들어오는 ‘침략자’로 보였다.
카트린은 승부수를 던진다.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없으면 없애버리는 게 낫겠다.’
‘나의 아름다운 딸, 프랑스의 자랑 ‘마르그리뜨’(여왕 ‘마고’라는 영화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그 여인이다.)가 ‘앙리 드 부르봉’과 결혼할 것이다.’

그녀는 신교도들이 왕으로 받드는 부르봉가의 앙리와 딸 ‘마르그리뜨’를 결혼시킨다고 발표했다.
세기의 결혼이 될 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6천명이 넘는 신교도들이 파리 시내로 모여들었다. 마침 ‘성 바르톨로메오’ 축제 기간이라 신교도와 구교도 간에도 축하의 덕담이 오갔다. 이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피가 피를 부르는 적으로 살아 왔던가?

카트린은 그 오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천사의 대리인처럼 보였다.
결혼 축제동안 백성들에게 보여준 그 우아한 미소와 친절한 모습.
그러나 1572년 8월 24일 새벽, 모두가 긴 축제기간동안의 피곤에 지쳐 곤히 잠들어 있을 그 시각에 왕비의 명령이 떨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신교도들을 모조리 살육하라. 한 명도 단 한명도 살아남게 해서는 안 된다.’
그날 한 나절의 무차별 살육으로 파리의 세느 강은 신교도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메아리 치고 처참한 주검이 거리에 널 부러 졌다.

카트린은 활짝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는 하루아침에 그들을 모두 학살했다.
“남김없이...하나도 살려두지 말고!” 왕비의 명령은 단호하고 추상같았다.
시내의 구교도들은 군인들과 합세해 무자비한 살인마들로 변했다.

죄 없는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지옥 같은 모습을 카트린은 성 위에서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이 대학살 이후 한 축이 부러진 프랑스는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훗날 프랑스 왕위는 카트린의 바람대로 셋째 아들 앙리 3세가 이었고 프랑스는 혼란 없이 강력한 왕조를 유지했다. 일부 학자는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비정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대학살 말고는 프랑스를 위해 대체로 잘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 시인도 있다.

“그녀는 천사이자 악마...그녀가 갈 곳은 천당이자 지옥...”
그러나 하루 새에 제 나라 백성 6천명을 죽인 그녀의 대학살극은 그녀가 악녀요 살인마로 불리는 데 어떤 변명도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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