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생활개선회 김납생(49세) 회장을 만난 날.
수줍은 듯 볼에 홍조를 살짝 띈 해맑은 미소가 참 아름다웠다. 부끄럼을 타는 소녀같은 모습의 김 씨를 보고 인터뷰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청산유수같은 말솜씨에 다시 한번 얼굴을 살피게 된다.
김 씨는 이처럼 생활개선회를 만나고부터 농촌생활은 물론 성격까지 개선(?)됐단다.



농사는 안 지을 줄 알았는데…
농사는 부모님이나 짓는 줄로만 알았던 평범한 여고생 김 씨는 졸업하자마자 도시로 나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농사일도 싫었지만 자신의 성격이며 외모며 농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김 씨와 농촌과의 인연은 뗄레야 뗄 수가 없었나보다. 왜 그 많은 남자 중에서 조상형(50세) 씨가 눈에 들어왔던 것일까?

“같은 동네에 살다보니까 오며가며 어릴적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고등학교도 같은 곳을 나왔구요.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는 오빠·동생사이일 뿐이었는데 왜 직장을 다니던 당시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시작된 연애. 그때만해도 농사는 절대 안짓겠다던 김 씨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그였지만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과감하게 헤어질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남편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고 있었어요. 그래서 만나면서도 항상 불안해했죠. 그런 제 마음을 아는 남편은 지금은 아버지가 힘들어 하셔 돕는 것이라며 결혼하게되면 개인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었죠. 그 약속만 굳게 믿었어요.”

그러나 금방 농사에서 손을 떼겠다던 조 씨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만 둘 생각을 하지 않았고 김 씨의 불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었던 김 씨는 결국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조 씨에게 선언했다.

“남편은 저와 헤어질 생각도 못하면서도 농사일을 포기하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보고 시아버지가 나서시더라구요. 저 같은 며느리를 놓칠 수 없다며 내가 책임지고 농사 못 짓게 할테니 아들과 결혼만 해달라고 하시더라구요.”

김 씨의 시아버지는 결혼만 하면 주유소를 차려서 독립시키겠다고 김 씨에게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약속도 한 순간이었다. 그 말만 믿고 결혼을 했지만 시부모님 두분이서만 할 수 있는 농사일이 아니었기에 남편이 쉽게 손을 털고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가면서 점차 김 씨도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주유소를 차려주시겠다고 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있다면 다른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시집살이
“지금 젊은 사람들을 보니 아이를 갖고 나면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고 쉬더라구요. 지금은 오히려 그 것이 당연해보이지만 저 때만해도 농촌에서 아이를 가졌다고 집에서 편히 쉴 수 만은 없었어요.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했지만 농사일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죠.”

새댁이라고, 임신 중이라고 해도 바쁜 농번기에 어느 누구도 농사일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김 씨지만 한번도 안해 본 농사일이 손에 잡힐 리가 만무했다.

정말 힘들었겠다는 물음에 “말도 마라”며 운을 뗀 김 씨.
“농사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시집와서 제일 고생했던 것이 뭐냐고 물으면 지금도 주저없이 ‘밥’이라고 외칠 정도였어요.”

당시 농사일에 서툴렀던 김 씨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힘든 농사일이 아니고 바로 식사준비였다. 아침·점심·저녁을 비롯해 새참까지 하루 4번을 준비해야하는 밥상 때문에 김 씨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결혼 전에는 몰랐는데 집안에서는 군대같은 생활을 고집하시더라구요. 자신이 정해놓은 규칙과 스케쥴에 정확히 맞춰서 생활하는 습관을 가지셨어요. 특히 그 중에서도 식사시간 엄수를 특히 강조하셨는데 농사일에 조금이라도 집중하다가 식사시간이 조금이라도 늦게 되면 그 날 하루는 난리가 났었죠.”


시간을 맞추기도 힘들었지만 거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바로 시집 와 신부수업을 받을 틈이 없었던 김 씨는 요리는커녕 밥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진밥에 된밥에… 밥이 제대로 된 적이 거의 없었어요. 잘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밥이 더 안되더라구요. 정말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정도로 밥이 늘 안되서 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죠.”


그렇게 10년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김 씨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아버지의 시집살이에 시달리게 됐었다.

당찬 여성농업인이 되기까지
둘째 아이를 낳고나서도 시골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김 씨는 큰 결심을 하게됐다.
“시부모님과 남편 몰래 아이 못낳는 수술을 했어요. 아이까지 더 생기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았거든요. 몰래 한 수술이라 표시를 낼 수가 없어 수술 후 며칠간은 쉬어야 하는데 쉬지도 못하고 일을해 허리가 지금까지도 좋지 않아요.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힘든 농촌생활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적응이 됐다.

“농사짓는 일이라면 끔찍이도 싫었는데 시부모님을 도와 남편과 농사를 짓다보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더라구요. 열심히만 하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비젼이 있을 것 같았죠.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해주는 농업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자 김 씨 스스로가 농업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우연히 생활개선회를 알게됐어요. 그 당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생활개선회원들을 대상으로 일감갖기사업을 지원해 주고 있었거든요.”

본인이 지은 농산물을 가공해서 판매까지 할 수 있다면 농업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당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한 사업은 김 씨를 위한 맞춤 사업이라고 생각됐다.

그길로 김 씨는 당장 생활개선회에 가입을 하고 일감갖기사업신청을 했다. 김 씨가 도전했던 것은 바로 ‘울외장아찌’였다.

“당시 울외, 깻잎, 마늘 농사를 지었었거든요. 울외는 장아찌용으로 재배를 하는데 항상 재배를 하면서도 내가 직접 장아찌를 만들어 팔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닿았던 거죠.”

그렇게 시작한 장아찌 사업. 시작이 힘들었을 뿐이었다. 막상 시작하고 나니 시작한 것 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점점 사업 확장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해도 겁이 많아 내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하기가 꺼려지더라구요. 남편도 어차피 시작한 일이니 내 이름으로 시작하라고 설득했지만 당시는 큰 책임을 지는게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만약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당당하게 제 이름을 걸텐데…”라며 웃는 김 씨.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지금 ‘신동전통식품’으로 이어져 이제 김 씨도 사업경력 15년의 당당한 여성농업인 CEO가 됐다.

타고난 회장님
김 씨의 단체활동 경력은 그 누구보다 화려하다.
새마을부녀회 회장 4년, 농가주부모임 회장 6년, 생활개선회 회장 4년…. 경력만 보면 김 씨의 나이가 60세는 넘어야 할 것 같다.

“젊었을때부터 이상하게 회장직을 맡게 되더라구요. 처음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았을 당시 36세였는데 그때 모임에서 제가 가장 나이가 어린 편이었어요. 그렇게 회장직을 맡기 시작하자 회장제의가 계속 이어지더라구요.”
농촌생활에 적응도 잘 못하고 수줍음 많고 나서기 싫어하는 김 씨가 어떻게 회장직을 계속 맡을 수 있었을까?

“워낙에 집중력이 뛰어난 편이예요. 남들은 뛰어나다못해 심하다고까지 표현하더라구요. 한번 단체활동을 시작하면 그 모임을 최고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어요. 그렇게 활동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회원들의 믿음을 샀던 것 같아요.”

김 씨는 회장직을 맡으면서 그 전보다 집안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집안일이며 바깥일들을 서둘러 끝내요. 집안일이 다 끝나지 않으면 절대 나가지 않았죠.

여자가 바깥으로 돌더니 집안꼴이 엉망이더라는 소리는 듣기 싫었거든요. 그렇게 단체활동을 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낮잠 한 번 자본 적이 없어요. 남편이 제 모습을 보고 타고난 회장님감이라고 농담반 진담반 놀리더라구요.”
아무리 철인소리를 듣는 김 씨지만 이 생활이 처음부터 익숙했던 것은 아니다.

새마을부녀회장 임기를 끝내고 농가주부모임 회장직을 맡았을때만해도 후회가 밀려왔다고 한다.

“몸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신경쓸 일이 많다보니까 내가 왜 이 직책을 맡았나 싶더라구요. 그래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책임감 때문에 대충대충 임기를 때울 수도 없었구요. 제 성격 때문에 지레 죽겠다 싶어서 농가주부모임 회장 임기가 끝나면 당분간 회장은 커녕 단체생활도 접으려 했었어요.”

그러던 김 씨에게 생활개선회 회장직이 맡겨졌다. 단체생활까지도 그만두고 싶다던 김 씨는 왜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일까?

“생활개선회잖아요. 아무리 여러 단체에서 활동해봤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생활개선회만큼 모범이 되는 단체가 드물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생활개선회장직만은 뿌리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지금껏 4년동안 김 씨는 목포시생활개선회장직을 맡아왔고, 회장 임기가 끝나며 평회원으로 돌아가 계속 활동할 계획이다.

모두를 변화시키는 작은 아이디어
목포시생활개선회는 다른 시·군 생활개선회에 비해 드러나는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맞아요. 그 뿐만 아니라 목포시에서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단체였어요. 다른 단체에 있을때도 그렇고 회원으로 활동할때도 그렇고 정말 모범적이고 좋은 단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회장직을 맡고 나서 활성화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씨가 회장을 맡기 전 회원수가 120명에 불과했던 목포시생활개선회가 4년이 지난 지금 2배 가까이가 늘어난 235명이 활동하는 단체가 됐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목포시에서도 여성단체 중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여성단체가 됐다.

“다들 비결이 뭐냐고 많이들 물어오세요. 그건 제 리더십이나 다른 능력때문은 아니예요. 그냥 회원들 모두가 묵묵히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지역행사때마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시의 홍보도우미 역할을 자처했을 뿐이예요. 그냥 열심히 활동하니까 자연스럽게 입지가 높아지더라구요.”

김 씨는 이 모든 것이 회원들의 노력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사례만 살펴봐도 김 씨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가 있었다.

“매년 목포시생활개선회에서는 고부간 정나누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요. 그 전에는 작은 규모로 조용히 진행했는데 제가 회장을 맡고 나서부터는 300명을 초청해 규모를 키워갔죠.”
규모를 키우면서 어떻게 하면 행사의 취지를 살리고,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김 씨는 한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늘 상은 받는 사람만 받게 되잖아요. 효부상도 주위에서 알아주는 사람들에게만 주고…. 저는 생각을 달리 해봤어요.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면 어떨까? 하구요.”
김 씨의 아이디어는 대 성공이었다.

좁은 목포시내에서 효부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효부상을 받은 사람은 남들의 이목때문에라도 효부가 되야만 했다. 그렇게 지역 분위기까지 바뀌는 행사를 주최한 생활개선회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올해 김 씨는 임기 마지막해를 맞았다. 뿌듯한 날도 많았고 아쉬움도 많았던 4년이었다.
“올해는 정말 다른해보다도 더 열심히 해 목포시생활개선회를 전남 최고의 생활개선회로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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