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두배목곡농원’. 이곳은 한국농업대학교(이하 한농대)를 졸업한 신현아(35세) 씨와 최시훈(35세) 씨가 운영하는 과수원이다. 이미 부산에서는 유명해져 각종 지역방송과 신문에 소개가 됐다고 한다.
한발 늦게 찾아온 여성농업인신문과의 만남. 여성농업인신문 덕분에 소식을 들을 수없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고마웠다며 자신의 모습도 후배들이나 선배들이 보고 반가워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에 대한 염증
신 씨는 27살이 되던 때 한농대에 입학했다. 동기들과 7살이나 차이가 났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을 때는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전남 장성 출신이예요. 장성은 아시다시피 광주와 인접해있어요. 저희 집도 광주와 가까워 학교를 광주에서 다녔어요.”

수도작과 축산을 하셨던 부모님 때문에 시골에서 살았지만 신 씨의 주 생활무대는 도시였다. 특히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셨던 부모님 덕분에 신 씨는 시골에 살면서도 농사일 한번 해본 적없는 도시 아이로 자랐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유전공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농촌생활이 좋다든지, 도시생활이 좋다든지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졸업을 하게됐고 신 씨는 서울에 있는 환경약품제조 회사에서 미생물배양과 폐수처리약품 분석 기술자로 근무하게 됐다.

“회사가 신도림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 근처로 집을 얻어 생활했죠. 당시 신도림은 도시 빈민층이 모여살던 곳이었어요. 그곳에 살면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삶이 도시 빈민층의 삶이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당시 제가 봐오던 농촌에서는 자기 능력껏 열심히만 일하면 여유있게 살 수 있었거든요. 그곳에 섞여 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패배의식이 자라나 점점 무기력해지고 답답함이 생기더라구요. 나라고 저 사람들처럼 안되라는 보장이 있나란 생각도 들구요.”

공기좋은 곳에 살면서 생활은 편리한 도심에서 하던 신 씨는 그런 도시의 각박함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익숙해지기는 커녕 점점 불안감이 쌓이더라구요. 거기에 폐수처리약품사업이 사양길을 걷고 있어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었구요.”

이대로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신 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농대로 인해 생긴 귀향의 꿈
“전망있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불안감이 생기더라구요. 그렇지만 계속 늦었다, 늦었다 이런 생각만 하고 있다가 정말 늦어버릴 것 같았구요. 일을 저질러보기로 결심했죠.”

과감히 회사를 그만둔 신 씨는 뭔가 한발 앞서가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전공학과에서 미생물을 배우며 늘 농업과의 연관성을 찾았던 신 씨는 대학교때부터 자신이 농업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스무살때부터 난 농사짓는 사람과 결혼해 농촌에 살겠다고 노래를 불렀어요. 친구들이 다들 미쳤다고 그랬었죠.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제가 농사를 짓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시골로 돌아가리라는 꿈이 있었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농대대학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대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 눈에 띄인 ‘한국농업대학교’.

한농대를 알게 된 신 씨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이왕 농업쪽으로 인생을 결정했다면 현장에서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거기에 2학년때 해외 실습의 기회까지 주어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생각들이 싹 사라지고 오직 머릿속엔 ‘한농대’만 남았어요.”
신 씨는 결심을 굳히고 부모님께 자신의 결정을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한농대를 나오면 농사를 지으며 살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걱정은 했지만 신 씨의 결정에 대해 특별히 반대는 하지 않았다.
“어렸을때부터 부모님은 자식들의 결정에 잘 따라주시는 편이었어요. 자식들의 선택에 대한 믿음때문이었겠죠.”

그런데 입학을 하고 ‘채소과’를 택했던 신 씨. 그 결정에 대한 이유가 궁금했다.
“제가 한농대를 선택했을때는 저 혼자서라도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죠. 수도작이나 과수, 축산은 좀 힘들것 같더라구요. 화훼엔 통 관심이 없었고….

저에겐 채소가 딱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신 씨의 한농대 생활은 시작됐다.

중국에서의 첫 만남, 그리고…
2학년이 되고 신 씨가 꿈에 그리던 해외실습기회가 주어졌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 과수과에서는 여학생들에게 해외실습을 안보냈었거든요. 채소과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었어요.”

신 씨는 중국으로 실습을 떠났다. 그렇게 원했던 해외실습이었기에 1년이란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실습기간이 끝나갈 무렵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 당시 공로연수로 온 3학년 선배들이었다.

“한농대는 바로 위의 기수와는 얼굴을 볼 수 조차 없어요. 1학년때는 2학년 선배들이 실습을 가고, 또 다음해엔 우리가 실습나가고, 그 다음해엔 선배들이 졸업하고…. 그래서 위 기수와 함께 할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그 중에 개인적으

로 알고 지내던 선배 한명이 같이 왔더라구요.”
하루동안 같이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며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신 씨. 그러나 그날의 만남에는 신 씨가 모르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날 모임을 주도했던 선배가 저와 신랑을 소개해주려고 자리를 마련했더라구요. 그것도 모르고 노느라 그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못봤었죠.”

그렇게 한국에 와서 졸업식날 정식으로 소개를 받았고, 남편 최 씨와 1년간의 연애가 시작됐다.
“학교는 수원이고 신랑 집은 부산이다보니 자주 볼 수가 없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웠죠. 아마 그때 자주 못봐서 결혼하게 된 것 같아요.”

신 씨는 그렇게 원하던 해외실습에서 평생의 반려자까지 만나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

끝나지 않은 도전
결혼을 하고 부산에 내려와서 신 씨 부부에게 닥친 모든 일들은 하나하나가 도전이었다.
“저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남편도 아직 배우는 입장이라 아직 둘이서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아요.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계속 배워가면서 하는 거죠.”

부모님이 일궈놓으신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일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판로를 뚫는 일부터 새로운 사업계획을 세우는 일 등 모든 것이 도전이었다.

“한농대의 덕을 많이 봤어요. 젊은 사람들이 농대를 졸업하고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까 관심들을 많이 갖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기회들이 많이 주어졌어요.”

부산농업기술센터에서 실시한 농산물직거래 온라인쇼핑몰 입점에 선정돼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직거래 판로가 뚫리게 됐다. 또 같이 입점된 50개 농가와 함께 오프라인 행사들을 개최하면서 홍보 방법 등을 터득하게 됐다.
“아직 멀었지만 판로를 뚫는 걸음마 단계는 통과한 것 같아요. 이런 방법으로 점차 확장시켜나가야겠죠.”
어느정도 판로가 뚫어지자 신 씨는 또다른 욕심이 생겼다.

“요즘 배 농가들이 기본적으로 배즙을 생산해서 팔고 있어요. 저희도 마찬가지구요. 배즙을 판매하는 곳이 워낙 많다보니 차별화가 필수죠. 저희도 오가피 배즙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어요.”

그런데 배즙 판매에 문제가 있다. 현재 신 씨가 판매하고 있는 배즙은 정식 식품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판매를 할 수가 없다. 그렇다보니 입소문으로밖에 판매를 할 수가 없어 판매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올해 저희 땅으로 도로가 지나가면서 토지 보상을 받을 것 같아요. 그 보상금으로 배 가공공장을 설립하고 정식 식품허가를 받을 생각이예요. 공장이 설립되면 배즙뿐만 아니라 배 고추장, 배로 만든 빵 등 여러 가지 식품을 개발해볼 생각이예요.”

그리고 신 씨에게는 올해 도전할 또다른 목표가 생겼다.
“요즘 농촌에 교육농장의 개념이 생겼어요. 단순한 체험농장이 아닌 아이들이 와서 농업에 대해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느끼고 가는 농장이죠. 우리 농장을 교육농장으로 꾸미기 위해 올해 교육을 받을 계획이예요.”

한발, 한발 차근차근
최 씨와 결혼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왔을때 신 씨는 두려움이나 불안감보다는 희망과 설램이 강했다.
“부산이란 도시가 굉장히 매력적이더라구요. 우선 날씨부터가 따뜻하고…. 실제 농촌생활을 겪어보진 않아서 아마 시댁이 정말 첩첩산중 시골이었다면 결혼을 망설였을지 몰라요. 하지만 차 타고 15분만 나가면 해운대가 나오면서도 막상 이곳은 정말 산속에 들어와 있는 경치고…. 도시사람들이 원하는 전원의 삶이 이런게 아닐까 싶더라구요.”

부산 자체의 매력과 시댁의 좋은 경치로 인해 신 씨의 농촌 적응은 수월했다.
“결혼한 지 5년이나 됐지만 아직 걸음마단계라고 생각해요. 아직 해야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아직 젊으니까 서두르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밟을 생각이예요.”

아마 올해가 지나면 ‘행복두배목곡농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배 가공공장을 설립하고 교육농장을 위한 교육장도 만들어야 하고…. 아마 많은 것이 변할 꺼예요. 그렇게 되면 이곳을 우리의 평생 직장으로 만들까 해요.”

지금 신 씨는 도시에 집을 얻어 나가 살까 고민 중이라고 한다. 시부모님도 자기 자식들도 이곳에서 키운것을 늘 후회해서 신 씨 부부에게 나가살라고 하신다고 한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곁에 있는것도 좋고 이런 전원생활에서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같이 살고 있지만 큰아이가 더 크기 전에 교육문제 때문이라도 도시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도시에 살면서 출퇴근을 농촌으로…. 새로운 개념의 전원생활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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