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스파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마타하리’일 것이다.
그러나 마타하리가 명성을 얻은 것에 비하면 이상하리만치 덜 알려진 여성스파이들도 많이 있다.

그녀들의 스파이로서의 성취나 극적인 인생은 마타하리의 그것에 못지않다.
이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여성스파이들은 멀게는 프랑스혁명때부터 가깝게는 1950년 6.25전쟁 때까지 암약했던 네 명의 여성이다.

그녀들의 활약은 그러나 저마다 목적이 달랐다. 조국, 사랑, 복수, 신념, 영달(榮達), 어쩔 수 없는 운명에의 순응 등…
인생 자체가 서스펜스 드라마였던 그녀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파리의 밤, 여제(女帝)
무대의 조명이 켜지자 검은 여신이 나타난다.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걸친 것이라고는 두 다리사이의 빨간 비로도 천 하나뿐.

초콜릿 색깔의 눈부신 나신(裸身)은 조명에 반짝이며 농염한 실루엣을 자랑하고 있었다.
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남성들의 가슴속은 용광로처럼 이글거린다.
그녀의 춤은 아프리카 초원의 건강한 원시성을 연상케 했다.

격렬하면서도 유연한 몸놀림과 풍만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는 통통 튀는 임팔라를 보는 것 같다.
그녀는 표범 같은 카리스마와 함께 애완용 고양이 같은 귀여움을 갖추었다.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백댄서들은 조세핀의 매력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다.
‘아~ 저 몸을 한번만 만져볼 수 있다면’

조세핀과의 ‘격렬한 하룻밤’은 이 자리에 있는, 아니 파리에 사는 모든 남성들의 로망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성적(性的)에너지는 남성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지만 그녀의 춤과 노래에 몰입한 연약한(?) 남성들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람 팜팜! 루루루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래와 춤을 마친 조세핀이 손을 흔들자 그제 서야 객석에서는 터질듯 한 함성과 휘파람이 쏟아져 나왔다.
조세핀 베이커(1906. 6. 3~1975. 4. 12)는 세기말적 허무와 퇴폐주의가 난무하던 1920년대 파리의 밤의 여왕이었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가수와 댄서로 활동하던 조세핀은 프랑스 파리에 불어 닥친 아프리카 열풍을 타고 돈 좀 벌고자했던 수많은 흑인 연예인들과 기획자들의 권유로 프랑스에 건너왔다. 그때 나이가 20세.

조세핀의 성공은 자기 자신에게도 뜻밖의 일이었다. 미국과 달리 파리 사람들은 검은 피부의 자신에게 열광했다.
미국에서는 한갓 ‘깜둥이 댄서’였던 조세핀은 여기서는 ‘검은 진주 블랙 퀸’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검은 것은 천하다?
“저리 비켜. 깜둥이들이 어디서 길을 막고 있어. 재수 없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백인들에게 굽실거리고 주눅 들어 있었다.

조세핀은 1906년 6월 3일 미국에서도 가장 열악한 슬럼지역인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흑인들이 그랬듯이 지독한 가난과 무학(無學)이 대물림됐고, 그저 마음씨 좋고 씀씀이가 후한 ‘백인 주인님’을 만나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꿈이라면 꿈이었다.
‘이상해…커피도 검은 것이 좋고, 땅도 검을수록 기름진데…왜 검은 피부는 냉대를 받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망중한(忙中閑)조차 조세핀에게는 가져보기 힘든 호사였다.
조세핀은 입 하나라도 덜려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8살 어린나이에 백인집의 가정부로 팔려왔다. 백인 여주인은 조세핀을 엄청나게 학대했다.

‘백인 아이들이나 이웃들에게는 저렇게 친절한 주인님이 왜 나에게만은 그렇게 무섭게 대하는지 몰라…’
조세핀은 어느 날 백인 사모님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는 것을 들었다.
“스미스 부인. 댁의 하인은 좀 빠릿빠릿해요? 아유 우리 집 애는 왜 그렇게 굼뜨고 한 번 말하면 못 알아듣는지 원….”

“어머 걔네들에게 뭘 바라겠어요. 설마 그것들을 우리와 똑같은 만물의 영장으로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깜둥이들은 사람보다는 침팬지에 가깝답니다…”
“호호호호” 부인들은 일제히 웃어댔다.

숙소인 지하창고에는 쥐들이 들끓었고 한 겨울의 추위는 뼛속까지 저며 왔다.
너무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마구 털어댔다. 가슴과 엉덩이를 흔들고 돌리며 한참을 움직이던 조세핀의 몸은 어느새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어느새 웨이브가 되고 춤이 됐다.
조세핀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춤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1919년, 조세핀은 주인집을 뛰쳐나왔다. 떠돌던 조세핀은 어느 유랑극단에 들어가게 됐다. 어릿광대로 분하기도 하고 춤도 추면서 먹고 자는 것만 간신히 해결하다가 뉴욕까지 흘러들게 됐다.
뉴욕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여전히 깜둥이 계집이 춤 하나는 잘 춘다….그런 정도에 불과했다.

“조세핀…우리 프랑스로 가자. 거기는 지금 아프리카 열풍이래. 아프리카 춤과 노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 맹목적으로 빠져들고 있대. 이건 좋은 기회라고. 돈도 모을 수 있어. 무엇보다도 거기는 미국처럼 무조건 흑인을 냉대하지 않아. 거기선 우리도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그러나 이를 만류하는 동료들도 많았다.

“어차피 거기도 백인들의 나라야. 미국인들도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야. 이제 겨우 자리 잡은 아이가 어딜 가겠다는 거야. 어차피 검은 피부로는 어딜 가도 성공하지 못해.‘
그러나 조세핀은 결심을 굳혔다. 프랑스로 가자!

조세핀은 파리로 떠나기 전에 부모님을 찾았다.
“조세핀, 가서 건강하게 살아야한다. 엄마, 아빠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는 너만 잘 살면 돼” 부모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프랑스에 가서 반드시 성공할거야…..반드시’
조세핀은 그렇게 프랑스 행 배에 몸을 실었다. 1925년의 일이었다.

감격시대
조세핀의 성공은 파리에 온지 불과 몇 개월이 안돼서 터진 벼락같은 것이었다.
수개월 전만해도 미국의 천한 검둥이 댄서였던 그녀가 파리의 검은 여신이 됐다.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인종차별과 조세핀의 파격적인 춤을 비난하는 점잖은(?) 손님들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조세핀의 인기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지나지 않았다.

조세핀이 파리에 온지 1년이 지나자….파리 시내는 그녀의 공연 포스터로 도배가 됐고, 그녀가 입는 옷, 향수, 액세서리가 유행이 됐으며, 여성들은 조세핀의 머리 모양과 화장을 따라했다. 심지어는 하얀 피부를 햇볕에 검게 그을리는 여성들도 나타났다.

바야흐로 조세핀의 감격시대가 열린 것이다.
조세핀은 파리에 온 지 2년 동안 5만 통 가까운 팬레터를 받았고, 2천명이 넘는 선남들에게 구혼을 받았다.
그러나 조세핀은 자기 관리를 잘했다.

‘싸구려 댄서로 보이면 안 돼. 비싸게 굴어야 해. 나는 여기 파리 시민들에게 검은 여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여자야. 돈 많이 준다고 아무 무대나 덥석덥석 올라가서도 안 돼.
파리 시민들의 예술적 감각은 고상하지만 그만큼 변덕도 심하지. 내 인기도 언제 시들지 몰라. 그래서 내 모습을 너무 자주 보여줘서는 안 되는 거지.

배운 것은 없었지만 조세핀의 머리는 비상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할 줄 알았고, 기획사들과의 계약에서도 언제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그녀와의 계약을 위해 기획사나 공연관계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와의 계약은 일확천금이었던 것이다.
조세핀은 그렇게 ’비싼 사람‘으로 성공가도를 달려 나갔고, 성공을 넘어 프랑스에 흑인 문화를 하나의 주류 문화로 정착하도록 만든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슈퍼스타 조세핀 베이커…. 1920년대와 30년대 초중반을 관통하는 대스타 조세핀의 앞날은 장미 빛이었다.
현대 미술의 세계적인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조세핀의 공연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
“커피색 피부에 흑단 같은 검은 눈, 천국의 다리와 모두를 사로잡는 미소를 가진 여인”

내 조국 프랑스
30년대 들어서 서른을 향하는 조세핀은 더욱 무르익은 매력을 발산했다.
공연 무대 뿐 아니라 파리의 상류사회 사교계에서도 조세핀은 무시할 수 없는 명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세핀은 마침내 연예인의 이미지를 넘어서 문화인, 사교계의 히로인으로 성장했다.
조세핀 베이커가 빠지면 프랑스의 대중문화는 허전해 지는 것이었다.

1937년 31세가 된 조세핀에게 일생일대의 큰 선물이 주어졌다.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그래 내 조국은 이제 프랑스야. 나를 맞아주고 나를 인정해준 프랑스. 내 사랑 프랑스’
이런 조세핀에게 또 하나의 인생역정이 찾아온다.
그것은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부터 일어났다.

1940년 6월 독일은 전광석화처럼 파리를 비롯한 북부프랑스를 점령했다. 독일인들도 조세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세핀의 공연을 보기 원했다.

“거절하겠어요. 그들은 내 조국 프랑스를 짓밟은 더러운 자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내가 깡충 깡충 뛰며 엉덩이를 흔들고 춤을 춰야겠어요?”
단호히 거절한 조세핀은 비시 프랑스(Vichy France;당시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남부프랑스 지역)로 탈출했다.

그러나 2년 후 비시 프랑스도 독일군에게 함락했다.
프랑스는 암담했다. 프랑스의 위대한 문화와 예술도 무력 앞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세핀은 프랑스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프랑스에 와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나의 부, 나의 명성, 나의 예술…. 이 모든 것은 프랑스가 내게 준 선물이야. 나도 조국을 위해 뭔가를 보답해야 해.’

또 하나의 나
조세핀은 사교계에서 안면이 있던 프랑스 방첩부대장 출신 예비역 군인 자크 아코를 찾았다.
조세핀의 이야기를 들은 아코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정말 감격스럽고 고맙소. 당신이라면 프랑스를 위해 정말 중요한 일을 해 줄 수 있을 것이요.”
조세핀과 아코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건너갔다.

조세핀은 전쟁 전부터 알고 지내던 프랑스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고위관리들을 생각해 냈다. 그녀는 우연을 가장해 그들을 만났다. 그녀는 그들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 그들은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줄줄이 조세핀에게 늘어놓았다. 조세핀의 공략(?)은 노련하고 전략적이었다. 당시 남편이 있던 조세핀은 이탈리아 남성들의 애간장을 태우며 정보만 쏙쏙 빼냈다. 모든 정보는 프랑스군에게 유용한 정보로 프랑스 군이 흘릴 피를 막아주는 방탄복 같은 귀중한 것이었다.

“조세핀 양 또 하나 해줘야 할 일이 있소. 비밀 지령을 모로코와 비시프랑스에 있는 우리 레지스탕스(프랑스 독립군)에 전달하는 일이요. 할 수 있겠소?”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공연을 하면서 극장이나 바(bar)에서 은밀히 전달할 수 있어요.”
“들키면 끝장이요.”

“설마 나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냥 연예인이요, 사교계의 꽃으로만 알걸요 뭘. 설사 의심을 한다해도 내 은밀한 곳까지 뒤질 수는 없을걸요.”
“흠! 음 음…” 아코는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해댔다.

그녀는 포르투갈과 프랑스, 멀리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를 수도 없이 오가며 지령을 전달했다. 고된 여정이었고 늘 긴장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립돼 있는 자유프랑스군은 그녀를 통해 해외 곳곳의 프랑스 독립군과 연합군 측에 중요한 정보와 요구사항을 전달할 수 있었다.

긴장감과 육체의 피로가 몰려왔지만 조세핀은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랑스를 위해 헌신했다.
2차 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보다 안전하게 활동하기 위해 적십자에 들어갔다.
적십자에 들어가자 그녀의 활동 폭은 더욱 넓어졌다.
이 검은 피부의 백의의 천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프랑스 군 조차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일군들은 그녀의 활동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했다.
조세핀은 새 조국 프랑스를 위해 그렇게 3년간 일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서야 조세핀의 활약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했다. 조세핀에게는 무공훈장과 레지스탕스 메달이 수여됐다.

다시 여신으로
전쟁 후, 조세핀은 자신의 활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그녀는 전쟁기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자랑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너무나도 스무드하게 이루어진 그녀의 스파이 활동은 그래서 어떤 긴박감조차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점령군의 눈을 피해 기밀문서 전달이라는 위험하고, 불규칙적이며, 기약 없는 활동을 아무 조건 없이 3년간이나 해낸 ‘조세핀 베이커’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녀는 다시 연예인으로 돌아왔다.
1975년 69세에 이르기까지 조세핀은 무대 위에 올랐다. 그 해 4월 초 풍자극 ‘조세핀’을 마치고 내려오다 쓰러진 그녀는 수 일 후 숨을 거뒀다.
프랑스가 슬픔에 잠겼다.

TV는 그녀의 장례식을 생중계했고 프랑스 군은 그녀를 위해 21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연예인으로 프랑스에 건너와 새 조국 프랑스를 위해 스파이로 활약했고 전쟁 후 다시 연예계로 돌아와 평생 무대에서 살았던 조세핀은 프랑스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문화인이자, 불멸의 스파이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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