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8일 원주시생활개선회에 신임 원정식(54세) 회장이 취임했다. 너그럽고 여유있는 얼굴에 웃을때 두볼에 깊게 패이는 보조개를 보면 해맑아 보인다.

웃는 얼굴이 얼굴에 배어있어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처럼 보인다. 원 씨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세상의 때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고생없이 산 사람이라고 여길수도 있는 얼굴이다.

원 씨가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의 사연많은 인생이지만 이렇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은 바로 네 아이들과 종교의 힘, 그리고 생활개선회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맏며느리’
스무살이 되던 해. 농부의 딸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던 한 시골 처녀는 부모님의 주선으로 결혼을 하게됐다.

“이미 양가 집안에서 결혼을 약속한 상태에서 선을 보게 됐어요. 오빠가 장가를 가면서 올케가 들어오고 위로 언니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다보니 부모님이 결혼을 서두르셨어요. 그 당시에는 부모님이 시집을 가라하면 군소리 않고 가야했지만 남편될 사람의 나이가 8살이나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집 안가겠다고 떼를 썼었죠.”

부모님 세대때만 해도 여자가 연상이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원 씨의 부모님도 어머니가 3살이나 연상이었다.

당시 원 씨의 어머니는 “여자는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 귀여움 받고 사는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원 씨를 설득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콧방귀나 뀌고 들은 척도 안했을테지만 실제로 나이 어린 남편과 살면서 따뜻한 보살핌 한번 못 받으신 어머니의 말이라 안들을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왔어요. 시집을 와보니 시댁이 종가집이더라구요. 시어머니는 물론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아야했어요. 농사도 친정하고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짓고 있었죠. 농부의 딸이라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농사일을 돕기는 했어도 그냥 조금 거드는 정도일 뿐이었지 워낙에 형제들이 많고 올케까지 있다보니 농사일을 제대로 경험도 못해 본 상태였죠.”

갑작스럽게 종가집 맏며느리가 되고 원 씨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살림도 워낙 큰데다가 시할머니에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려니 그 자체로도 너무 버거웠다. 그러나 바쁜 농촌생활에서 못하겠다고 손 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동네에서 처음으로 외국에서 송아지를 들여와 낙농업을 했었죠. 요즘 낙농가들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전체 낙농업 중 5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소득이 많았어요. 소득이 많았어요. 소득이 많은 만큼 일도 어마어마했죠.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시 전엔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진정한 맏며느리로 거듭나다
그렇게 하루하루 적응 하는 일 자체도 버거웠던 원 씨에게 또 하나의 고비가 닥쳤다.
바로 첫째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아이를 가지면 아이를 낳고 2~3년은 당연히 쉬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농사일은 켜녕 집안일도 안하지만 그 당시엔 임신했다고 쉬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아이 낳는 바로 전날까지도 일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시할머니도 시어머니도 다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것이었어요.”
그래도 그 당시에는 젊었기 때문에 힘이 넘쳐 해가 모자라서 일을 못했지 힘들어서 일을 못하지는 않았었다. 당시 원 씨를 괴롭혔던 것은 힘들고 많은 일이 아니라 바로 ‘잠’이었다.

“아이를 갖고 나니까 잠이 무섭게 쏟아지더라구요. 어른들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낮잠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신발을 들고 장롱속으로 들어가 5~10분 정도 눈을 붙이는 것이었죠. 그때는 그 쪽 잠이 얼마나 힘이 됐던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는 몇배로 더 열심히 일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열달만 고생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원 씨의 고생은 끝이 아니었다.

“손이 귀한 집안이예요. 대대로 독자 집안이거든요. 특히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가 난리에 북으로 끌려가시면서 집안에 남자가 오랫동안 없었죠. 그런데 제가 첫아이를 딸을 낳은거예요. 어른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렇다 보니 특별히 구박하시는 것도 아닌데 부담이 많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힘든데도 바로 다음해에 또 아이를 가졌죠.”

그렇게 원 씨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편안함 보다 집안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종가집 맏며느리가 돼가고 있었다.

온실 속 화초, 세상 밖으로
88년 어느날, 시어머니가 6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남편을 잃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던 며느리가 먼저 간 것에 충격을 받으신 것일까? 88세의 나이에도 정정하게 농사일까지 하시던 시할머니가 시어머니가 세상을 뜬지 1년만에 돌아가시게됐다.

“친정어머니보다도 더 의지하던 어른들이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니까 기댈 곳이 없더라구요. 평생 곁에 계실 줄 알았었는데… 지금도 두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고 무거워요. 이 좋은 세상, 같이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때문에요. 힘들게 일만하며 앞만 보며 살다가셨거든요.”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8년전 어느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남편마저 저 세상으로 가고 만 것이다. 어른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의지할 곳이라곤 남편 밖에 없던 원 씨에게서 하늘은 남편마저 빼앗아가버렸다.

“남편이 갑자기 그렇게 세상을 뜨고 정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큰아들이 군대에 가버리고 막내아들마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독립을 하게 됐어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주저앉아 울기만 하면서 2년을 보냈어요.”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큰 딸이 원 씨를 일으켰다. 큰딸의 도움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원 씨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을 대신해 이것저것 살피다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주민등록등본조차 발급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거죠. 시내에 나가서 각종 서류를 처리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정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왔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처음 접해본 사회생활에 원 씨는 상처도 많이 받고 실망도 많았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강원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생활개선회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와 아이처럼 하나하나 세상을 배워가고 있던 원 씨에게 갑작스런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시내에서 은행일을 보고 있는데 평소에 알고 지내던 분이 제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시더라구요. 복지회관에 어떤 회의가 있는데 같이 가보자는 것이었어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끌려가 단상앞에 섰는데 저를 보더니 모두들 박수를 치는 거예요. 문막읍생활개선회장으로 선출됐다는 거였어요. 당시 저는 생활개선회라는 단체가 있는 것도 몰랐을 때이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그렇게 얼떨결에 읍생활개선회장직을 맡게 된 원 씨는 처음으로 접해본 단체생활에 약간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이왕 맡은거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를 털어 밥을 사먹여가며 임원진을 구성하고 회원을 모집했어요. 회의 한번 진행하기 위해 보통 40~50통의 전화는 기본으로 해야했죠. 그렇게 3년간 고생했더니 회원들도 늘어나고 기금도 1백만 원이나 모이더라구요.”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에는 원주시생활개선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새로 얻은 삶을 보람있게…

“생활개선회를 만나면서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삶과 인생,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죠. 생활개선회에 가입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제 삶의 질도 향상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나같은 여자도 세상에서 할 수 있는일이 이렇게 많구나란 생각이 드니까 자신감과 힘이 생기더라구요. 스스로 자신감이 생기다보니까 대인관계도 좋아졌어요.”

무엇보다도 원 씨가 생활개선회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보물은 바로 ‘삶의 목표’가 생겼다는 점이다.
“남편을 잃고 세상 사는 이유가 없다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그런데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면서 저에게도 아직 삶의 목표가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새 삶을 얻은 거죠.”
원 씨는 우선 원주시생활개선회를 강원도 최고의 생활개선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밥그릇이 10개일때와 100개일때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가 엄청나요. 그래서 우선 회원을 많이 확보해 결집시키는데 집중할 생각이예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활개선회에 힘이 생길테고, 어떤일에 한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당당하고 힘있는 단체가 되지 않을까요?”
또 원 씨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넒은 곳으로 가서 모든 능력을 발휘해 여성농업인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같은 사람도 이렇게 할 일이 많은데 다른 여자들은 어떻겠어요. 여성농업인들을 세상으로 끌어내 나와 같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고 싶어요.”
원 씨는 막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란다.

“사람은 생명이 있는 한 풀뿌리 하나라도 가꾸고, 자신을 닦아서 빛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예요.”
원 씨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할 계획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복지센터로 활용해 홀로 사는 노인분들을 모시고 살고 싶다고 했다.

“생활개선회를 통해 봉사활동을 하면서 베푸는 삶이 얼마나 보람있고 즐거운지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남은 평생을 베풀면서 그 즐거움만 만끽하며 살고 싶어요. 이런 새로운 인생을 열수 있게 도와준 우리 아이들과 힘들 때 힘이 되준 종교생활, 무엇보다도 나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준 생활개선회는 내 생애의 은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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