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 민둥산 밑자락에 위치한 한 농장. 농장 입구만 보면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농장답게 아담한 농장이 나올 것만 같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보면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왠만한 언덕만큼의 퇴비가 쌓여있는 퇴비공장이 농장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잡고 있고, 집 뒤에는 축사와 함께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넓은 밭이 펼쳐져 있다.

고랭지배추 99150㎡(3만평), 더덕 165000㎡(5만평), 가시오가피 8300㎡(2천5백평), 퇴비공장 1700㎡(5백평)에 축산 50두, 사슴 40두…. 과연 이곳이 부부가 둘이서 운영하는 농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곳은 바로 염영주(31세) 씨와 전영석(31세) 씨, 이 동갑내기 부부가 운영하는 ‘새농민농장’이다.


희생으로 여겼던 기회
“농촌에 사는 여자들이 흔히 하는 생각 아닐까요? 엄마처럼 살지는 안겠다는…”
염 씨에게 농업을 택한 계기를 물어보자 뜬금없는 대답이 나왔다.

“친정집이 경남 창원이예요.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지만 부모님의 바람대로 모두들 농사일보다는 공부를 택했었죠. 저도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어요. 힘들게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보면서 절대 엄마처럼 농사짓고 살진 않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고등학생 시절 염 씨가 상상하던 먼 훗날 자신의 모습은 조그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어렸을때부터 유치원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바꿔 본적 없다는 염 씨는 언니가 유아교육과에 진학해 유치원선생님이 되면서 그 꿈이 더 간절해졌다.

“언니가 온갖 만들기 재료를 가지고와 장남감이며 교육교재며 만들 때마다 제 공부도 다 내팽겨 치고 언니를 도와줬어요. 언니를 도우면서 ‘아, 정말 이 길이 내 길이구나’라고 확신을 하게 됐죠.”

그렇게 유치원선생님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염 씨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공부한 만큼 수능점수가 나오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재수를 택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던 시절, 아버지께서 염 씨에게 무엇인가를 건냈다.

“한국농업대학교(이하 ‘한농대’) 원서였어요. 당시 아버지는 농사일 때문에 농업기술센터의 도움을 많이 받고 계셨는데 거기서 한농대의 정보를 들으신거죠. 그리고는 바로 원서를 받아갖고 오신거였어요.”

당시 염 씨의 집안은 유치원 선생님이던 큰 딸을 비롯해 대학생 아들과, 재수를 하고 있던 딸,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는 고3 막내가 있었다. 대학생 자녀 3명은 아버지에게 너무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학비 전액 무료라는 한농대는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염 씨에게는 청천벽력일 수 밖에 없었다. 농사라니…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데 농대를 어떻게 가냐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웠어요. 그런데 집안사정을 고려해서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는 저의 그 선택이 ‘희생’이라고만 여겨졌었어요. 새로운 기회인 줄은 모르고요. 그때 정말 아버지와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울기도 많이 울었었죠.”

농사꾼의 길로 한발 내딛다
우여곡절 끝에 한농대 입학을 결정하게 된 염 씨는 마음을 다 잡았다.
“이왕 농업대학에 진학을 하게 됐으니 열심히 배워서 부모님의 일을 물려받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 꿈은 잠시 접어두는것 뿐이지 포기한 것이 아니라구요. 공부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언젠가는 기필코 내 꿈을 이룰꺼라구요.”

염 씨는 부모님의 일을 돕기 위해 과도 ‘채소과’를 선택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학교에 들어갔지만 막상 수업을 듣기 시작하자 막막한 생각밖에 안들더라구요. 정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교수님 말씀이 우리나라 말인지 외국말인지도 모를 정도였다니까요. 무슨 농약은 종류가 그리 많은지, 용어는 또 왜이리 어려운지… 이래서 졸업이나 할 수 있겠나 싶더라구요.”
그렇게 정신없이 1년을 보내고 염 씨는 충남 공주의 한 종묘농장으로 실습을 나가게됐다.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여학생을 받아주는 실습장이 많지 않아 대부분의 학생들이 농촌진흥청이나 농업기술센터로 많이 갔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우연히 여학생을 필요로하는 농장이 있어서 가게 된 거예요. 만약에 그때 저도 다른 학생들같이 농장이 아닌 진흥청이나 센터의 연구소로 갔다면 농업에 흥미를 갖기도 전에 포기했을 지도 몰라요. 그만큼 농장일이 재밌었거든요.”

시골에서 나서 자랐지만 농사를 제대로 접해볼수 없었던 그녀에게 씨앗을 만드는 일은 흥미롭고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배추씨앗을 키우면서 배추가 어떻게 자라고, 또 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눈으로 직접 보고 익히면서 염 씨는 농업의 매력에 빠져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처음 해보는 농사일이 힘들 법도 했을텐데?

“이상하죠? 농사일 자체에서는 힘들다는 생각이 안들더라구요. 저를 정말 힘들게 했던 건 힘든 일도 아니고 어려운 농업기술도 아닌 바로 ‘잠’이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야하는 시골생활에 적응하는데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아침에 벌떡벌떡 일어날 수만 있다면 농사일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렇게 점점 염 씨는 ‘농업인’의 길에 한발 내딛게 됐다.

농업인으로 만들어준 ‘콩깍지’
실습생활을 마치고 3학년에 진학하게 된 염 씨. 농사일에 익숙해지자 학교 생활은 즐거워졌다. 1년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염 씨는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됐다.

“당시 홍보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농업에도 익숙해지고, 학교생활도 즐거워지니까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즐거웠죠.”

사실 염 씨의 캠퍼스생활을 즐겁게 만들어준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남편 전 씨였다.

“당시 남편은 부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타고난 리더였었죠. 믿음직스럽고 어른스러운 모습에 반했었어요. 사귀고 얼마 안 있어 결혼을 생각하게 될 만큼 많이 좋아했었어요.”
당시 전 씨의 집안은 강원도 정선군에서 유명한 대농집안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염 씨의 마음은 전 씨에게 가 있었다.
“졸업을 하자마자 부모님께 결혼 얘기를 꺼냈어요. 아버지는 별 반대를 안하셨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좀 있었죠.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반대하셨던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나이도 어린 딸이 먼 곳으로 시집을 가겠다고 한 것도 부모님에게는 충격이었다. 거기다 농사짓는 사위라니… 그렇지않아도 몸이 약한 딸이 가서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부모님은 노심초사했다.

“그저 어짜피 이 사람과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하루라도 일찍 식을 올리고 시골생활에 적응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들었어요. 언니가 ‘결혼은 현실이다. 남자만 좋다고 결혼하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저를 설득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이렇게 사랑하는 남편이 옆에 있는데 이까짓 농사쯤이야… 란 생각만 들었죠. 남편만 곁에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애 타는 가족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염 씨는 단 하루도 떨어져 있기 싫어 농번기에 일손을 돕는다는 핑계로 강원도로 오곤 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염 씨는 드디어 농부의 아내, 아니 정식 여성농업인이 됐다.

실패도 두렵지 않다

염 씨 부부는 결혼을 하고 1~2년간은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농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농협조합장이 되고 시어머이가 군의원에 당선되면서 농장은 자연스럽게 염 씨 부부의 몫이었다.

“정말 힘들었죠. 워낙 농장의 규모가 크다보니 농사일 외에도 신경써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서로 힘이 들다보니 부부싸움도 잦아지게 됐죠.”

일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도시에서 학교를 나오고 도시생활만 즐기던 염 씨에게는 적막한 시골생활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친정집이 멀다는 생각이 들자 외로움이 더해졌다.

“말을 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줄 몰랐어요. 시내를 나가고 싶어도 운전도 서툰데다가 워낙에 거리가 멀어서 엄두가 나질 않더라구요. 거기에 남편이 4-H 활동을 시작하면서 외로움은 극에 달했죠.”
염 씨의 외로움 극복 방법은 바로 일이었다. 이를 악물고 일에 열중하며 외로움을 이겨갔다.

“시부모님이 고랭지배추로 성공을 하셨어요. 고랭지 배추의 성공을 발판삼아 축산과 퇴비공장 운영, 또 다른 여러 가지 작목을 시도하고 계셨죠. 시부모님이 시작하셨던 더덕과 오가피는 순전히 저희들의 힘으로만 재배했어요. 이미 자리가 잡힌 농사일을 물려받은 상태였지만 그 자리에만 머물수는 없었어요.”
염 씨 부부는 부모님이 쌓아오신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기로 했다.

당시 고랭지 배추 재배를 주 작목으로 하고 있던 염 씨 부부는 배추 재배를 줄이고 남편의 전공을 살려 축산을 주업으로 하기로 결심했다.

1년동안 50두였던 소를 200두 가까이 늘리면서 부부는 첫 도전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둘이서 소 200두를 키우며 퇴비공장 운영과 농사일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염 씨가 백기를 들었고 1년만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한번의 실패로 많은 것을 잃기도 했지만 그래도 도전을 멈출수는 없었어요. 부모님의 성공을 바탕으로 쉽게 사는 젊은이들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었거든요.”
올해 염 씨 부부는 고랭지 쌈 채소 재배에 도전할 계획이다.

농업·농촌을 책임 질 일꾼
염 씨 부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지 부모님의 농사를 물려받은 장한 젊은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장차 강원도, 아니 우리나라의 농업·농촌을 책임 질 미래의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현재 4-H 28대 중앙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어요. 덕분에 함께 하는 시간은 줄었지만 우리나라의 농업·농촌을 위해 뛰는 남편을 보면 나도 분발해야겠다는 자극도 되고 정말 자랑스러워요.”
말투 하나하나만 봐도 이젠 영락없는 여성농업인답다.

그렇지만 인터뷰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있었다. 바로 꿈을 접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맞아요.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예요. 제가 지금 해야하는 일이 농사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는 것 뿐이죠. 그렇다고 농사를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니예요.”
갑자기 염 씨의 말투가 들뜨기 시작했다.

“올해 둘째 아이를 가질 계획이예요. 아마 아이를 낳고 어느정도 클 때까지 몇 년이 흐르겠죠.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예요.”
염 씨는 아직 유아교육과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이 아니었다.

“농촌의 보육문제가 심각하잖아요. 그것을 한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나설 생각이예요. 공부를 해서 우리 마을에 정말 제 마음에 쏙드는 어린이집을 지어 제 아이들은 물론이고 이 지역 농업인들의 자녀들을 정말 도시 아이들 못지 않게 보살필 꺼예요.”

그 남편의 그 아내인 것 같다. 이런 염 씨 부부를 보니 우리나라 농업·농촌의 밝은 미래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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