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혁 분 천안시생활개선회 회장

  
 
  
 
천안의 대표적인 축제인 ‘흥타령축제’. 볼거리 먹을거리 많다고 소문난 흥타령축제에서 천안시민의 발길을 잡아끄는 부스가 있다. 천안시의 농특산물로 개발한 요리를 선보인 천안시생활개선회의 부스였다. 천안시생활개선회가 이처럼 천안시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이같이 단시간에 생활개선회를 천안시를 대표하는 여성농업인단체로 이끈 인물이 바로 권혁분(52세) 회장이다.


시골처녀 같지 않았던 시골처녀

권 회장은 농사꾼 부모님 밑에서 자란 1남 4녀중 장녀다. 흔히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골의 큰딸은 농사일 도우랴, 동생들 돌보랴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지경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권 씨는 좀 남달랐던 큰딸이었나보다.

“형제 중에 제가 제일 일을 안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도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많이 시키는 편이 아니었지만 저는 유독히 어렸을때부터 농사는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시집도 당연히 도시로 나가 살 줄 알았죠. 농촌에서 나서 자랐지만 농촌은 제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권 씨는 당연하게 서울로 올라갔다. 혼자 서울에서 2년간 직장생활을 하던 권 씨가 걱정됐던 부모님은 천안으로 내려올 것을 권했고, 그래서 권 씨는 22살 되던 해에 다시 천안으로 내려와 농협에 취직을 했다.

“농협에 근무하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당시 남편의 집도 농사를 짓고 있지 않아서 농사일은 상상도 못했죠. 연애를 하고 결혼 생각까지 하면서도 결혼해서 직장을 다니든지, 살림을 하든지 할 줄만 알았죠.”
3년간의 연애 끝에 둘은 결혼을 결심했다. 당시는 남녀가 같은 직장에 다니면 당연하게 한쪽이 그만둬야하는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권 씨는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막상 결혼을 결심하고 보니까 막막하더라구요. 정말 사람 됨됨이 하나 보고 결혼을 결심했는데 결혼이란 것이 현실이잖아요. 아래로 시동생들이 6명이나 있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되신 시아버지는 아무런 일도 안하고 집에만 계시더라구요. 부모님이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셨죠. 반대가 극심했어요. 사실 저도 시집의 상황을 보고 좀 당황스럽고 걱정되긴 했지만 부모님이 워낙에 반대를 하시다보니 부모님 설득하느라 다른 걱정을 할 겨를이 없더라구요.”
그렇게 도시처녀보다도 더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처녀는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집에 맏며느리로 들어가게 됐다.

용기 하나로 밀어붙인 농사

“직장도 관두고 남편의 수입으로만 생활해야하는데 막막하더라구요. 시집장가 안간 시동생이 줄줄이 있고 편찮으신 시아버지까지 계시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시집오기 전에도 음식한번 해본적 없고 집안일 한번 도운적 없던 철없던 제가 맏며느리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더라구요.”

이대로 막막해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권 씨는 주변에 조언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한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그렇게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니다 보니 길이 생기더라구요. 아는 분이 싼 값에 땅을 빌려줄테니 농사를 한번 지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구요. 할수 있을까 없을까란 생각도 하기전에 하겠다고 덜컥 일을 맡아버렸죠. 내가 생각해도 간도 참 크지… 돈 한푼 없이 대출을 받아서 3천평이나 되는 밭을 임차받았어요.”

땅을 빌리면서도 어떤 농사를 지어야 할지조차 몰랐던 권 씨는 당시 주위에 포도 시세가 좋아 포도 과수원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고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힘들었죠. 두통약을 거의 매일 먹다시피 하면서 농사를 지었어요. 그 와중에 시동생이 농사를 짓겠다고 해서 빌린 땅이 반을 시동생 앞으로 떼어주기까지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죠.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당찬 행동을 했나 지금도 신기해요.”

땅도 없는 상태에서 농사도 지어보지 못한 사람이 혼자서 농사를 짓겠다고 한 결심이 정말 대단했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그때 일을 신기해 한다고 한다.

“아마 지금 다시 그같은 상황이 오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찌 그렇게 무모했는지… 지금도 익숙하게 농사 짓고 있는 내 모습이 느껴질때면 참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 포도농사로 시동생 6명 시집·장가 보내고 아버지 장례치르고… 큰일들 모두 치러냈어요. 이제 맏며느리 답죠?”

자신도 몰랐던 능력

농사일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집안의 큰일도 다 치르고 난 1994년. 그 당시 권 씨는 이미 부녀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권 씨에게 생활개선회 활동의 기회가 생겼다.

“저도 몰랐는데 제가 생각보다 외향적이더라구요. 농사며 집안일이며 몸이 녹초가 되도 단체 활동을 할때면 힘이 솟는게 느껴져요. 지금도 농업기술센터의 생활개선계장님을 볼때마다 ‘난 이게 체질인가보다’고 얘기하곤 해요.”

부녀회에서 6년간 활동을 하다 생활개선회에 가입을 하게 됐다. 당시 천안시의 생활개선회는 읍면별로 조직화가 돼있지 않아 군단위로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권 씨가 성거읍의 회장직을 맡게 됐다.
“의욕이 생기더라구요. 이미 조직화 돼서 자리잡은 곳의 회장을 맡았으면 그런 마음이 안들었을 꺼예요. 그런데 내가 한번 이 조직을 활성화시켜보자라는 생각이 드니 의욕이 솟더라구요.”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활동하는 권 씨를 보고 처음에는 마을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있었다고 한다.
“아직 농촌은 보수적이잖아요. 그런 어르신들 눈엔 제가 나서는 여자로밖에 안보였던 모양이예요. 남편이 벌어다준 돈을 차곡차곡 모아 살림할 생각은 안하고 혼자서 농사를 짓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살림 내팽개치고 바깥으로 나도는 것이나 다 마음에 안드셨던 모양이예요.”

그러나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성거읍회장을 맡고 나서 권 씨는 농악대를 조직하고 농악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엔 시끄럽다고 하시던 동네분들도 마을 회관에 악기를 구비해놓고 마을 행사때나 농번기때마다 연주하는 회원들을 보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또 당시는 흔치 않던 선진지 견학을 주도해 회원들을 결집시켰다.
“생활개선회에서 활동하면서 제 스스로 몰랐던 추진력과 리더로서의 능력을 발견하게 됐어요. 생활개선회는 저 스스로를 찾게 해준 제 삶의 은인인 셈이죠.”

충남, 아니 전국을 무대로…

이제 권 씨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보인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도 벅차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권 씨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포도 농사가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을 만큼 농사일에 적응했어요. 그래서 올해에는 미술을 전공한 딸의 조각품으로 농장 한켠을 꾸며서 체험농장을 만들어볼까 해요. 아마 힘도 들고 손도 더 많이 가겠지만 도전을 한다는 생각에 설래기까지 해요.”
그 뿐만이 아니다. 작년에 그토록 호응이 높았던 흥타령 축제였지만 권 씨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포도가래떡, 포도식혜, 오이전… 정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더라구요. 그래서 올해는 더 색이 예쁜 포도가래떡을 비롯해 더 많은 개발 음식을 선보이고 싶어요. 올해는 작년보다 더 성대한 축제가 될꺼예요. 기대하세요.”
처음에 권 씨는 농사도 남들하는것에 반만, 활동도 그저 남들 하는 만큼만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추진력을 미처 알지 못했을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천안시생활개선회를 충남 최고, 아니 전국 최고로 만들 욕심에 쉬는 시간도 아깝다고 한다.
한번 맡은 일은 끝장을 보고야 마는 자신의 성격을 알고 나서 성격 때문에 두배로 힘들게 사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왜이리 바보같이 사나’란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마음을 다 잡아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봉사하면 내 자식들에게 그 공이 돌아가겠지…. 또 내가 열심히 활동하는 만큼 농촌의 여성 한명이라도 더 깨우쳐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없던 힘도 생기더라구요. 아무래도 저 생활개선회 체질인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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