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다혜(29세) 씨는 동안이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중학생인줄 알 정도다. 한국농업대학(이하 한농대)를 졸업한 농사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시 쳐다본다. 순진하고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 누구의 도움없이는 아무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을 비롯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녀가 일궈놓은 모든 것들을 살펴보면 저런 뚝심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할 정도다. ‘여성농업인 맹다혜’란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는 그녀의 삶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혜 씨, 길을 잃다…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살림을 하시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맹 씨. 그런 가정에서 맹 씨도 평범한 꿈을 꾸며 사는 여고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맹 씨는 천안에 위치한 한국기술교육대학 응용화학과 99학번으로 대학 새내기가 됐다.
“어려서부터 생물이나 화학같은 과목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응용화학과를 선택했어요. 졸업을 해서 뭘 하고 싶다든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어떤 것을 공부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들은 전혀 하지 않은채 한 결정이었죠. 그게 큰 실수였던 것 같아요.”

맹 씨는 한 학기를 마치면서 왠지 모를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이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재미가 없더라구요. 그렇게 제가 좋아했던 과목이었는데도 전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어요. 이대로 그냥 시간이 흘러 졸업을 한다고 해도 이 분야에서는 제가 할 일이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등록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구요. 왠지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다른 길을 선택할 겨를도 없이 휴학을 결정했어요.”

맹 씨가 휴학을 결정했을 때, 맹 씨 집안에는 갑작스런 일이 벌어졌다. 천안에서 직장을 다니시던 맹 씨의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시고 귀농을 선택하신 것이었다.

“난리도 아니었죠. 어머니는 농사는 커녕 시골에서 사는 것 조차도 할 수 없다고 버티셨어요. 어머니의 끈질긴 반대에도 아버지는 꿋꿋이 결심을 밀고 나가시더라구요. 결국 가족들 모두 아버지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맹 씨의 가족은 홍성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

우연히 찾은 ‘새로운 삶’
그렇게 온 가족이 귀농을 결심하고 맹 씨는 열심히 아버지를 도왔다. 아버지를 도와 홍성으로의 귀농을 준비하면서 맹 씨는 가슴속에 자신도 모르는 기대감과 희망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대학교에 들어가 자신이 좋아하던 과목을 공부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농사를 지어야지, 나도 시골로 시집와 살아야지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이 설램이 무료한 삶에서 오는 새로움에 대한 작은 반응일 뿐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맹 씨는 아버지와 함께 흙을 만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그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과 행복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맹 씨와는 달리 아버지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지나면서 약간의 후회가 느껴졌었나봐요. 당시 아버지가 귀농을 차근차근 준비한 것이 아니었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에 대해 대처하기가 힘이 드셨더라구요.”

귀농을 하기 위해서는 농사지을 땅부터 준비를 해야했다. 그런데 맹 씨의 아버지는 있는 돈을 털어 부지를 사고 집을 지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지을 땅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밭을 임차해 고추농사를 시작했지만 첫 농사에서 수입이 날 리가 만무했다.

“아버지는 모르셨던 거예요. 농사란 것이 처음 시작하고 몇 년동안은 투자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한다는 것을요. 1년이 지나도록 수입이 없다보니 많이 지치셨나봐요. 1년만에 아버지는 농사를 포기하셨죠.”
아버지가 농사를 포기하시자 맹 씨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아버지께 자신이 농사를 지어보겠노라고 설득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시 도시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왕 빌린 땅이니 남은 기간동안이라도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난리가 났죠.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까지도 절대 안된다고 반대를 하시더라구요. 그래도 그땐 이미 농사의 매력에 푹 빠져 다른 일을 생각하기도 싫었어요. 도시에 나가 직장을 다니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지더라구요.”

맹 씨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년간 농사를 지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맹 씨는 집을 나와 독립을 하게 됐다.

힘든 일상속에 찾아온 ‘희망’
집을 나온 맹 씨는 일자리를 알아봐야만 했다. 농사를 짓고 살길 원해도 땅을 빌릴 돈이며 살집이며 아무것도 준비가 안됐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예산귀농학교’란 곳에서 간사를 뽑는다는 정보를 듣게 됐어요. 그 길로 당장 지원했죠. 기숙사까지 제공한다고 하니 저에겐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농업·농촌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 수 있을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 월급을 못받기 일쑤였고, 친환경 인증을 대행해주는 업무를 맡다보니 어마어마한 서류에 깔려 죽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기숙사 생활을 하다보니 돈이 급하게 필요하거나 그렇진 않았지만 재정상태가 안좋다보니 근무환경도 좋을 수가 없었어요. 직원들도 많이 부족했구요. 그러다보니 혼자서 몇사람 일할 몫을 해야할 경우가 많았어요. 2년동안 배운것도 많았지만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그처럼 힘든 일상이었는데도 2년이란 시간동안 맹 씨가 일을 그만두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바로 지금 맹 씨의 옆에서 항상 힘이 돼주고 있는 예비신랑 봉 주(42세) 씨였다.

“제가 간사를 보고 있을 당시 아저씨(맹 씨는 봉 씨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 교육생이었어요. 처음에는 나이도 많고 무섭게 생겨서 조금 멀리했는데 알면 알 수록 믿음직스럽더라구요. 그래서 사귀기 시작했죠.”
봉 씨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맹 씨는 힘든 일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또하나의 ‘희망’이 맹 씨에게 찾아왔다.

“우연히 한농대를 알게 됐어요. 처음부터 입학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호기심이 생기더라구요. 단지 호기심에 전화를 걸었는데 저의 얘기를 들으신 한 교수님이 예산까지 찾아와 설득해서 입학을 결심하게 됐어요.”
당시 예산에서 사과 과수원을 늘 보아오던 맹 씨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과수과를 선택했다.
맹 씨는 2학년 시절 이스라엘로 실습을 나갈 정도로 열성적인 학교생활 3년을 보냈다.

“이젠 당당한 여성농업인”
“졸업을 하고 우연히 복숭아 과수원을 빌릴 수 있게 됐어요.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복숭아도 괜찮을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어요.”

과수원은 밭과는 다르게 땅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나무까지 빌려야하기 때문에 전해의 이력을 잘 살펴봐야만 한다. 만약 이전 해에 병이라도 걸렸다면 올해도 그 병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꽃필때까지만해도 정말 행복하고 좋았는데 잎이 우거지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자마자 벌레들이 들끓고 병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구요. 나중에 알고보니 전해에 천공병을 앓았던 나무더라구요. 처음 몇달동안 아저씨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가 생활비 문제로 아저씨가 다른 일을 시작하면서 혼자 농사를 맡게 됐는데 정말 막막했죠.”

그렇게 한해 농사를 망치고 맹 씨는 오기가 생겼다. 다른 과수원을 빌리기보다는 지금 처한 상황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굳은 마음을 먹은 맹 씨에게 다른 기회가 생겼다. 과수원 주인이 과수원을 폐원하고 밭으로 만든 것이다. 맹 씨에게 미안했던 과수원 주인은 2년간 무상으로 임차해 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서운하긴 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추를 심기로 결정을 했죠. 그런데 과수원을 하던 땅인데다 노지에서 고추농사를 짓기란 쉬운일이 아니었어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죠.”

결국 맹 씨는 후계자금을 신청했다. 1억 1천만원을 받아 7천만원으로 땅 5700㎡(1천7백평)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 하우스를 지었다.

“땅을 사고 나니 이제는 부모님도 농업인으로 인정을 해주시더라구요. 처음에 저를 이해하지 못했던 친구들 조차도 땅을 샀다는 말에 부러워하구요. 이제 정말 당당한 농업인이 된 기분이예요.”

“희망이 있어 이미 반은 성공한 셈”
맹 씨는 지금 농업기술센터의 시범사업으로 총 6동의 고추 비가림 하우스를 짓고 있다. 아마도 올해부터 제대로 된 농산물 수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땅을 사는 과정도 그렇고 지금 하우스를 짓는 과정도 그렇고 무척 힘들었어요.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하우스도 마무리 되가고 하니 여유가 생기더라구요. 여유가 생기다 보니 내가 정말 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들면서 희망이 생겼어요. 이것만 해결하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무리가 되가니 하고 싶은 일들이 또 생기더라구요.”

하고 싶은 일들이 수두룩하지만 당분간은 고추농사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한다. 3~4년 동안 고추농사로 어느정도 수익을 올려 돈을 좀 모으고 싶다고 했다.

“할일이 무척 많아요 오빠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준다더라구요. 전자상거래를 시작해보라구요. 아마 그렇게 되면 수익이 좀 더 늘지 않을까 생각되요. 돈을 좀 모아서 내년쯤엔 농장 가운데 예쁘게 집을 지을 생각이예요. 집을 짓고 나서 결혼도 해야죠. 아저씨가 나이가 많은데 저 때문에 자꾸 결혼을 미뤄서 조금 미안하거든요. 고추로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고나면 제가 개발한 허브 상품도 판매 해볼까해요. 제가 전부터 허브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농촌에 있다보면 사방에 허브예요. 쑥도 허브고 냉이도 허브고 산에 있는 약초들도 다 허브 천지예요.”

욕심도 많고 할 일도 많다. 아직 하우스도 다 안지은 상태인데다 고추농사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할 일이 산더미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이 희망이 있다는 말이잖아요. 이제 시작이지만 희망이 있어서 반은 성공한 것 같아요. 남들한테 당당하게 보일 것은 없어도 이미 부자가 된 것 같아서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성공이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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