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협상 타결로 인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사료값 인상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는 축산업계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젊은 여성농업인이 있다. 한국농업대학(이하 한농대)를 졸업한 김미현(37세) 씨는 이렇게 어려운 이때에 한우 사육을 시작했다.

지금은 암소 2마리가 전부인 현실이지만 앞으로 ‘횡성 한우’를 대표하는 축산농가가 되겠다는 꿈만은 원대하다.


반항심으로 더 거부했던 농업

정말로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중학생 김 씨에게 뜻밖에 사건이 벌어졌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김 씨의 아버지는 부모님의 뜻으로 도시로 나왔었지만 농업에 대한 꿈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니 자신의 꿈은 잠시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참던 김 씨의 아버지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귀농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수원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김 씨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가 없었다.

“제가 농사를 짓겠다 아니다는 생각할 문제도 아니었어요. 농업인이라는 직업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걱정한 것은 강원도에서 학교를 다닐 것인가 수원에서 학교를 다닐 것인가 이문제 뿐이었어요. 농촌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절대로 강원도로 갈 수 없다는 어머니의 고집덕에 원치 않는 전학은 가지 않아도 됐었죠.”
그렇게 김 씨의 아버지는 홀로 강원도로 향했다.

하지만 그토록 시골생활을 원했던 김 씨의 아버지도 농촌에 적응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지금도 농촌이 많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 외부인이 들어와 살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살던 횡성군 강림면엔 하루에 버스가 1~2대밖에 다니지 않을 정도로 고립된 곳이다보니 외부인에 대한 텃새가 남달랐죠. 그러다보니 익숙치 않은 농사일에 적응하는 것보다 마을사람들과 동화돼 살아가는 일을 더 힘들어하셨어요. 너무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보다못한 어머니도 결국 강원도로 가셨죠.”

어머니까지 강원도로 가시고 김 씨와 남동생은 수원에서 자취를 하게됐다. 김 씨의 아버지는 그런 자식들에게 강원도로 오라며 끊임없이 설득했고, 특히 김 씨가 농고로 진학해 자신의 농사를 이어받길 간절히 원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김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도 의문이지만 왜 그 당시 남동생도 있는데 굳이 제가 농사를 물려받길 원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끊임없이 ‘농고를 가라, 농대를 가라’ 설득하셨죠. 제가 농사짓기를 그토록 거부했던 것이 농사자체가 싫어서도 아니었고 농사일이 힘들기 때문도 아니었어요. 너무 심했던 아버지의 강요때문이었던 같아요. 일부러 더 엇나가려고 다른 진로를 결정했죠.”

김 씨는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아버지가 원하시던 서울대 농과대학이 아닌 연세대에 지원했다. 과도 당시 전망이 있었던 산업환경과를 선택했다. 전문직을 갖게되면 더 이상 아버지의 강요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김 씨는 서울에 있는 환경기술연구소란 곳에서 근무하게 됐다. 2년정도 근무하던 중 우리나라에 IMF가 터졌다.

“IMF가 터지면서 회사사정이 안좋아졌어요. 그래서 좀 쉬면서 다른 일을 알아보자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강원도로 내려왔죠.”

잠시 쉬자는 생각에 아버지 농사를 돕던 김 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농업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잠시 머리나 좀 식히겠다던 김 씨는 그렇게 1년 반이란 시간을 농사일을 하며 보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던 김 씨의 아버지는 딸이 농사짓는 모습을 1년 넘게 지켜보면서 농사를 물려줄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어느정도 농사일에 적응한 김 씨에게 한농대 입학제안을 했다.

“친구들이 이런 아버지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친구들 뿐만 아니라 주위분들도 자식이 싫다는 일을 그토록 끈질기게 고집하시는 것도 그렇지만 다른 농사짓는 사람들을 보면 자식들이 농사짓겠다고 할까봐 걱정하는데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딸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하시는 아버지가 이상하다고들 했어요. 처음엔 저도 그 때문에 거부했는데 무조건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제대로 알아보자는 생각에 입학을 결심했죠.”

김 씨는 이왕 농업을 택한 것, 아버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채소학과를 선택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차차 농업을 알게된 김 씨는 2학년 캐나다 실습을 다녀와 농업에 대한 확신을 갖게됐다.

“캐나다에 가서 두 곳의 농장에서 일을 했어요. 그 중 첫 번째 농장이 있던 지역은 석유가 나는 곳이라 대부분의 농가가 석유업에 종사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었죠. 그런데 그것이 그곳만의 특성이 아니었어요. 농기계가 발달하고 사람 손이 많이 필요치 않게 되면서 이른바 ‘투잡’이 보편화 됐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업이 주 수입을 압도하는 부수입이 되면서 일반인들보다 소득이 높고 생활수준도 높아서 우리나라처럼 천대받지 않아요. 오히려 CEO로 인정을 해주고 있었죠. 그걸 보면서 한농대 졸업생이 앞장서서 우리나라를 농업인이 인정받고 사는 나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농업에 대한 책임감과 확신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저도 농업인이 돼있었어요.”

자타공인 ‘여성농업인’

졸업을 앞두던 2002년. 아버지의 소개로 김 씨는 남편 강영대(45세) 씨와 선을 보게됐다.
“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사람이 이 지역 사람이고 농사를 지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감이 생기는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나봐요.”
소개를 받고 4개월만에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중장비업을 하는 남편은 스스로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농사일을 물려받겠다는 큰형을 위해 양보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축산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김 씨는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과 둘이 함께 농사를 짓는다면 제가 조금 편해지겠죠. 하지만 저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요. 캐나다에서도 봤지만 둘이 함께 농사를 전념하는 것보다 주된 수입원이 있으면서 농업으로 부수입을 올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일을 계속 해주길 원했어요.”

그래서 강 씨는 지금까지도 중장비 일을 하면 농사일을 돕고 있다.

처음 결혼하고 김 씨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자신의 2천㎡(6백평) 규모의 밭에 복분자를 재배했다. 지금은 아버지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독립을 해 자신만의 농업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아직은 수매로 판매하고 있어요. 작년에 처음으로 복분자주를 담가서 주변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아봤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더라구요.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복분자주를 담가볼 생각이예요. 그래서 작년에 후계자금을 받아 밭을 더 샀어요. 그곳에도 복분자를 재배하고 있는데 올해는 횡성 토종 복분자를 심어보려구요. 지금은 고창종이거든요. 내년에는 토종 복분자로 복분자주를 만들어볼 생각이예요. 이제 겉모습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까지 누가봐도 농업인 답지 않나요?”

위기를 기회로…

작년 김 씨는 시댁에서 물려받은 땅에 30두를 키울수 있는 축사를 지었다. 남편의 오랜 꿈이기도 하지만 농한기 남는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한여름과 한겨울에 일이 없어 한가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할 일이 없는 농촌생활은 답답한 도시생활보다 더 답답해요. 횡성은 한우가 유명하잖아요. 우리도 한우에 도전해보자고 했죠.”
작년에 축사를 짓고 올해 처음으로 암소 두마리를 구입했다.

“올해 암소 두 마리를 사서 새끼를 낳을 꺼예요. 한꺼번에 사기보다는 한 마리씩 늘려가려구요. 남편이 축산을 전공하긴 했어도 둘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배워가면서 해야하거든요. 차근차근 한발씩 나갈꺼예요.”

텅텅 비어있던 축사에 소가 들어오니 김 씨는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 김 씨는 소들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 꽉 차있을 축사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런 김 씨를 보고 사람들은 걱정어린 충고들을 했다.

“사료값이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고 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해 우리나라 축산 농가들이 많이 힘들어요. 지금 축산을 하는 농가가 하루에도 몇 십개씩 폐업을 선언하고 있는 이 때에 축산 초보자가 축산을 시작한다고 하니 다들 걱정이 되나봐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달라요. 지금 이때가 소를 사기에 적기라고 생각되거든요. 저희도 한 마리값으로 두 마리를 구입했어요. 큰 욕심만 부리지 않고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위기를 기회라고 말하는 그녀.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한농대생을 대표하는, 아니 횡성을 대표하는,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농업인CEO가 될 그날을 위해 한발씩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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