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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스파이로 활약한 청나라 황녀의 비극적 일생… 가와시마 요시코
민족의 열사(烈士)인가? 조국을 등진 간자(間者)인가?
2008년 04월 16일 (수) 11:35:59 박재호 pjaehool@nongupin.co.kr
  
 
  
 
가와시마 요시코(島川芳子;1906~1948)로 알려진 인물의 생은 화려한 진홍색인 동시에 또한 칙칙한 회색이다.
혹자는 그녀를 동양의 마타하리라고 부르고, 중국인들은 조국에 칼을 겨눈 더러운 배신자(漢奸)라고 부른다.만주인들에게는 서럽고 가련한 마지막 황녀(皇女)의 측은함이, 일본인들에게는 능력 있고 세련된 여자 ‘제임스 본드’가, 중국인들에게는 영화 ‘색, 계’에서 보았던 ‘탕웨이’의 모습이 보일는지 모른다.
어떤 작가도 그만큼의 극적인 삶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만큼 그녀의 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긴 머리 자르고
“요시코 너 왜 머리를 그렇게 흉측하게 잘랐니?”
“나는 오늘부터 남자다. 단정한 하이칼라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남자 옷을 입고 다닐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그 삼단 같던 머리 다 자르다니....너 혹시 또 양아버지가...?”
요시코가 유일하게 흉금을 터놓는 친구 ‘나즈키’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야? 무슨 소리를 듣고 싶은 거야? 난 그저 남장이 좋아서 그래. 난 남자들의 삶을 동경해 왔다고!”
요시코의 격한 반응에 움찔하던 나즈키는 그러나 이내 요시코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사태의 진상을 알아차렸다.

“그래 더는 묻지 않을 테니 걱정 마. 그러면 너에게 맞는 남자 옷을 구하러 다녀야겠네.”
“미안해. 내가 지나치게 화를 냈구나.”
요시코는 17세 때의 어느 날 양아버지의 권총을 몰래 꺼내 자기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서투른 권총조작은 다행히 그녀의 목숨을 건졌다.

요시코는 그 일 이후 돌연 머리를 짧게 잘른 것이다.
나즈키는 요시코의 저런 행동이 요즘 요시코의 몸을 탐하려하는 양아버지 ‘나니와’의 변태행각에 대한 경고이자 처절한 몸부림임을 알고 있었다.

황가(皇家)의 딸
요시코의 원래 이름은 ‘아이신줘러 쉔이’다.
“나의 조상님은 자랑스러운 ‘아이신줘러 누르하치’님. 대청(大靑)제국을 만드신 분이야. 장백산의 영험한 기상을 타고나셨지. 나는 그 피를 이어받았어. 옛날 같으면 한족(漢族), 조선족, 너희 같은 왜족(倭族)은 쳐다보지도 못 했을, 나는야 대청나라의 공주님이신걸......호호호”

요시코는 나즈키에게 이런 농담을 잘 했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1906년 청나라 ‘숙친왕 선춘’ 의 14번째 공주로 만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요시코가 태어난 1906년의 청 황실은 사실상 중국국민당에 의해 연금 상태에 처해진 포로 같은 신세였다.
숙친왕은 만주일대에서 한반도 크기 정도를 다스리던 황실의 세도가였는데 청의 멸망이 가까워 오면서 영광은 옛 것이 되고 말았다.

“부인, 아이들을 여기저기로 흩어 보내야겠소. 잘못하다간 국민당 군에게 모두 체포돼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르오. 각 국의 유력자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주고 아이들을 맡기면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는 청 황실의 아이들이니 그들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겠지.”

아버지의 전략적 선택으로 쉔이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대륙낭인 ‘가와시마 나니와’에게 보내진다. 이때 나이가 6살.
아이는 양아버지의 성을 얻어 ‘가와시마 요시코’가 된다.

‘흠~ 만주의 명문가와 결탁해 나쁠 것이 없다. 우리 대일본제국이 만주를 경영하려면 청 황실의 실력자와 손을 잡아야한다. 저 아이는 빨리 일본으로 보내 일본식 교육을 시켜야겠다.’
청 황가의 공주로 태어난 쉔이는 그렇게 일본으로 보내졌고, 요시코가 되어 일본에서 교육받는다.

말 타고 학교에
요시코는 잘 자랐다. 그렇게 7, 8년의 세월이 흘렀다.
명랑하고 당당했으며 기품이 있었으며 외모가 수려했다.

“흥. 제가 아무리 황실의 공주면 뭘 해.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미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었고, 지나(중국을 지칭)를 압도하고 있어. 그래봐야 망한 나라에서 온 볼모 일 뿐이야.”
이렇게 질투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요시코를 좋아했다.

“중국아이들은 어찌나 지저분한지 머리도 겨우 내내 감지 않고 목욕은 생일날 한 번 할까 말까래....옆으로 지나가기라도 하면 냄새는 어찌나 지독한지...”
어떤 아이는 요시코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 경을 친 적이 있다.

요시코는 논리 정연했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말하는 중국인들은 가난한 한족이주자들이다. 한족 백성들과 그들을 점령한 우리 만주의 황족을 동일시해서는 안돼. 우리는 중원을 점령한 지배자란 말이다. 너희가 조선을 병합했다 해서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지”

한번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중국에 대해 비난하자 요시코는 자리를 박차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요시코. 참 재미있는 아이야. 가와지마 상의 대저택에 살면서 언제나 공주님처럼 우아하게 생활하면서도 기분이 상해 발끈할 때면 헌병들보다 무서워지는 아이.’(나즈키)

나니와는 만주에서 큰 돈을 버는 부자였고 요시코의 아버지가 보내주는 막대한 돈은 요시코의 풍족한 삶을 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나니와의 사업이 차질을 빚으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요시코의 아버지 숙친왕도 차츰 기반을 잃어갔다.
마침내 나니와의 대저택이 넘어가게 됐고 요시코는 나니와의 고향 ‘신슈’로 이사하게 됐다. 그러나 부자 망해도 3대라 했던가. 요시코의 생활방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어머 저기 쟤 좀 봐. 말을 타고 학교에 오네.”

“얼마 전 전학 온 요시코 아냐? 정말 특이하다. 저 옷 좀 보라지. 저거 남자 옷 같아.”
“정말 특이한 아이인데...내 눈엔 저 아이 참 멋있게 보여.”
“그래.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는 요시코의 저 당당한 모습. 멋지다.”
요시코의 일거수 일투족은 화제였다. 학교에서는 요시코의 ‘팬’들이 엄청 늘어났다.

다시 만주로
요시코가 열여섯 살이 됐을 때, 고향의 친 아버지가 사망했다.
요시코는 만주에 다녀와야 했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요시코는 생전 처음 보는 수백, 수천의 친척들을 만났고 청 황실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국민당에 밀려나 연금 상태에 있는 황실의 비참함에 대해 들었다.
만주에 머무르는 몇 달 동안 요시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했다.

‘진정한 적은 중국인들이야. 그들은 우리의 신민이었어. 중원은 우리 황실의 것이어야 해. 우리는 일본을 이용해 다시 중원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뭐라고요? 학교에 복학이 안 된다고요?”

“요시코양 안됐지만 학칙이 그렇다네. 자네는 너무 오랫동안 휴학했어. 어쩔 수 없네”
일본에 돌아 온 요시코는 복학을 거부당했다.
우울한 일상 속에 십 칠세가 되었고, 바로 그 권총 자살 미수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요시코의 활달한 성격은 그 사건을 기점으로 변해갔다.

“나즈키. 진작 눈치 채고 있었겠지만 네 추측이 맞았어. 양아버지는 내게 이상한 짓을 하려 했어. 벌써 2, 3년 전부터의 일이야. 그런데 머리를 밀고 남자 옷을 입기 시작하자 그런 시도는 신기하게도 딱 그쳤지. 내가 강하게 나가니까 조금 섬뜩했나 봐.”
“역시....그랬었구나...요시코 정말 힘들었겠다.”

“나즈키. 나 만주로 돌아가야 해.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관리할 사람이 없대. 아버지의 사업과 재산은 양아버지와도 깊은 연관이 있지. 그래서 나니와와 함께 만주로 돌아가는 거야. 그 동안 고마웠어. 보고 싶을 거야.”
요시코는 만주에서 양아버지의 비서로 일했다. 만주의 실력자들과 부딪치면서 그녀는 다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항로변경(航路變更)
1927년이 되자 양아버지는 몽골의 왕족과 요시코를 결혼시켰다.
그러나 요시코는 결혼 3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요시코는 말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일이 생겼기에 당신의 아내로 살 수없어요.\`

“청 황실의 부활 따위는 꿈도 꾸지 마시오. 우리 몽골의 황실도 세계를 점령했던 가문이오. 모든 것은 찰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는 법.....내 말은 일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말라는 뜻이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거 예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요시코의 운명이 변한 것은 일본 관동군 정보국의 다나카 다카시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의 만남은 아버지 나니와를 수행하면서 일본관동군에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 것이다.
다나카 다카시의 수려한 외모와 남성다움, 유머는 요시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요시코. 조국을 위해 일해보지 않겠어?....나도 좀 도와주고. 당신의 위치는 독특해. 당신은 청 황실의 공주이며 또한 우리 텐노헤이카(천황폐하)의 신민이기도 해. 당신의 진정한 적은 청 황실을 붕괴시킨 저 한족(漢族)의 국민당이야.”
“다카시 상. 내가 할 일이 뭐지요? 나도 청 황실을 위해 힘을 보태고 싶어요.”

1911년 신해혁명으로 국민당은 청나라를 전복시켰다.
중국은 장개석, 모택동, 장작림 등 실력자들이 세력을 나눠 치열한 싸움이 그치질 않았다.
그 싸움은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 초반까지 팽팽하게 이어졌는데 이 와중에 1928년 일본은 장작림을 암살했고, 1931년에는 만주철도를 폭파하며 중국에 싸움을 걸어 만주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은 만주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부의‘를 왕에 앉히려했다.
“요시코. 이제 만주국은 당신의 진정한 조국이 될 것이요. 일본과 만주가 손을 잡으면 저 광활한 중원은 모두 천황폐하와 부의황제의 것이 되는 것이요.”
“그런 감격스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요.”

요시코는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강도 높은 스파이 훈련을 받았다.
각종무기 사용법, 기밀서류 입수 및 복사 방법, 암호 푸는 법, 변장 법, 심지어 남자 다루는 법까지....게다가 일본어는 물론 고국 만주어, 러시아어, 영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그녀는 ‘대일본제국’의 일급 스파이로 거듭난다. 요시코의 활용가치는 다나카를 흡족하게 했다.

“자~ 이제 당신은 완벽하게 변신했소. 당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다나카는 요시코에게 거금 1만 엔을 건넸다.

상해사변
1932년 1월. 상하이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한 일본인 승려의 참혹한 시체가 거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는 일본의 명망 있는 승려로 이 일로 일본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됐다.

일본인 승려를 죽인 것은 요시코의 돈을 건네받은 중국인 살인청부업자였다.
일본 당국은 이일을 트집거리로 삼았다. 일본은 치안 불안을 핑계로 상해에 일본군을 진주시켰다. 중국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양 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개시된 것은 그 달 28일의 일이었다.(제1차 상해사변)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고 일본군도 많은 사상자를 냈다.

중국군의 예기치 못한 전투력은 일본에 타격을 가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세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3월 1일을 기해 총퇴각을 단행했다. 일본 당국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이상한 작전 이었다.
여기에 가와시마 요시코가 등장한다.

그녀가 일본의 스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없었던 중국고위급 인사들은 그녀를 믿었다.
그만큼 그녀가 용의주도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요시코는 중국군에 거짓정보를 흘렸다.

“일본의 막강 14사단이 이미 중국의 해안에 이르렀다는 정보요. 11사단 하나로 싸우는 일본에게 아직은 우리 중국이 우세하지만 제14사단이 합류하면 이미 탄약과 식량이 고갈상태에 있는 중국은 전멸당할 지도 모릅니다.”
이 즈음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싸움을 중재했고 일본도 못이기는 체하며 전투를 중단했다. 그때 일본 14사단은 아직 일본 본토를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제1차 상해사변을 결코 일본의 승리라 할 수는 없지만 일본은 이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마침내 만주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1932년 3월)
가와시마 요시코는 이렇게 제1차 상해사변의 발단과 전개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자신이 ‘제2의 조국’ ‘또 다른 조국의 부활’로 여기는 만주국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백발의 최후
그후 가와시마 요시코와 다나카 커플은 일본의 영광의 시절, 즉 1930년대에서 1940년대를 관통하는 태평양, 동남아시아, 중국 만주지역과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환태평양을 호령하던 ‘다이 닛뽄 지 다이(대 일본시대)’에 혁혁한 스파이전과를 올린다.

중국군의 기밀서류와 인사동향, 군 배치 등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캐냈으며 때로는 총 황실의 공주 신분으로 인민들을 선동해 중국을 곤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일본의 영광도 1942년을 기점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일본 고위급 인사들과 마찰이 잦았다.

“공을 많이 세웠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렇다고 여자가 그렇게 생색을 내고 건방을 떨어서야...또 일을 마치면 왜 그렇게 엄청나 대가를 원하는지...” 이런 생각을 일본의 고위급 인사들이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 점 소외됐다.
마침내 1945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고 천황은 무릎을 꿇었다.

요시코는 만주에서 중국인민 해방군에 체포돼 간첩죄로 사형이 언도됐다.
다나카도, 만주국의 부의황제도, 일본의 천황도 그녀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48년 백발의 초췌한 가와시마는 결박을 당한 채 무릎이 꿇려 졌다.

집행병사가 그녀의 뒤로가 뒤통수에 총구를 겨눴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중국 인민들은 한간(漢奸;중국의 배신자)의 죽음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한 조국은 ‘청 황실’이었고 그녀의 동포는 만주족이었던 것이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그렇게 다시 ‘아이쉰줘러 쉔이’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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