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생활개선회 조금자(54세) 회장을 만나러 간 4월의 어느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 회장은 따뜻한 봄 햇살을 마시며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다과를 즐기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손길 하나하나 정성이 들어간 다과 순서는 어디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전문 지도자 자격증까지 있다는 조 씨는 올해로 포천시생활개선회장 6년차다. 6년간 650명의 회원을 이끌면서 자기 발전에도 소홀함이 없다는 그녀를 만나봤다.



포천 토박이, 포천으로 돌아오다
포천에서 나고 자란 조 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공의 꿈을 갖고 포천시를 떠났다.
조 씨는 성공의 꿈을 안고 올라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어느덧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6년동안이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수가 없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손으로 번돈을 차곡차곡 모아 독립하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고 시간 낭비만 한것 같이 마음이 허전했어요. 아마 직장생활은 아무리 오래해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일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사업을 하면 좀 낫지 않을까란 생각에 사업을 구상하기로 결심했죠.”

이같은 생각에 조 씨는 양품점을 하나 개업했다. 개업을 하고 얼마되지 않아 선을 봤고 당시 기술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지금의 남편 안경삼(57세) 씨를 만나게 됐다. 얼마간의 연애 끝에 두사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사업가로서의 성공을 포기하고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시간이 흘러 아이가 4살이 됐을때, 갑자기 남편이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조 씨도 펴보지 못한 사업에의 꿈이 있었기에 남편의 뜻에 따랐다. 그렇게 조 씨는 25년만에 다시 포천으로 돌아오게 됐다.

금의환향은 아니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니 자신감이 생겼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작은 사업부터 시작한 부부는 예상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둘다 사업경험이 없다보니 작은 문제 하나도 해결하기 버거웠던 것이다.

“계산 착오였어요. 고향에 돌아오니 왠지 모를 자신감에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일부터 벌였던 거예요.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둘다 여기에 매어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땅을 구입해 남편은 사업을 하고 조 씨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과연 농사경험조차 없던 조 씨가 농사인들 잘 적응했을까? 역시나였다. 남편이 도와준다고는 하나 사업에 전념해도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농사경험이 전무한 여자 혼자서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만큼 힘들었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온 고향에서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을 때쯤 조 씨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이가 있었다.

세상에 이런 단체가?
힘든 농사일과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사업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지쳐있던 조 씨를 보고 곁에 살던 친구가 ‘생활개선회’를 추천했다. 그 때가 1996년이었다.

“당시 너무 힘들어서 내 일도 못하는데 무슨 단체활동까지… 라는 생각으로 거절했었는데 친구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한번 가보기나 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생활개선회를 몰랐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니까요.”

포천시생활개선회는 당시 그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지는 않았었다. 지금이야 봉사활동을 비롯해 각종 활발한 활동으로 지역홍보도우미로서의 역할이 확고해졌지만 당시에는 적은 인원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습단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었다.

“처음에는 끌려다니듯 교육을 받았어요. 거의 타의였죠. 너무나 오랫동안 책에서 손을 놓았던 상태라 ‘공부’라는 것 자체에 부담이 많았어요. 이 나이에 뭔가 배운다는 것 자체가 버겁고 힘들었죠. 아마 주위에서 끌어주고 힘을 북돋아준 친구들과 회원들, 담당 공무원들 없이 저 혼자였다면 금방 포기했을 꺼예요.”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다니 듯이 교육을 받던 조 씨는 어느 순간 배움의 기쁨에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배우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하고, 그러면서 결혼을 하게 된 조 씨에게 요리를 가르쳐 준 것도 친정 엄마가 아닌 생활개선회였다.

“집에 손님들이 왔을때 장아찌며 장같은 전통음식으로 상을 차리면 손님들이 감탄하는 것이 느껴져요. ‘생활개선회에서 배운거예요’라고 자랑하는 내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생활개선회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고 기회를 주는 것도 물론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그 보다도 깨우쳐 준다는 것에 감사해하고 있어요. 생활개선회는 저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배우는 것이 늦지 않았음을 깨우쳐주는 소중한 곳이예요.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생활개선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하고 있어요.”


배우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면서 조 씨는 배움의 기쁨과 동시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 나이에 이걸 해도 될까? 이 나이에 저걸 하면 힘들지 않을까? 하며 움츠러 들었던 제자신이 확 바뀌었어요. 내가 나이가 들어 조금 늦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힘들지만 만약 더 늦었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늦었다고 느꼈을때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어요.”

조 씨는 어렸을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꿈을 포기해야했던 조 씨는 용기를 내 포천에 있는 경북대학에 문을 두드렸다. 영유아보육과를 전공해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유치원선생님이 돼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용기를 내 도전을 하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흔히 하는 틀에 박힌 교육보다도 제 나이를 장점으로 삼아 ‘할머니 선생님’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 인성교육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문적인 교육이야 젊고 유능한 선생님들이 많잖아요. 제 나이 사람이 경쟁력을 가질만한 분야를 하나 개발하자고 결심했죠.”

그래서 조 씨는 원광대 철원 분교 사회교육원에서 실시하는 전통차·요리 교육을 실시했다. 전통요리와 다도도 배우고 전통예절까지 익힐수 있는 학과였다. 낮에는 농사지으며 생활개선회장일을 하고 밤에는 두 학교에서 공부까지 병행하려니 조금 벅차긴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중 조 씨에게 시련이 닥쳤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어요. 그런데 제 일이 너무 벅차다 보니 어머니에게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었죠. 그러다가 제가 졸업을 한달 앞둔 작년 1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내 욕심 차리느라 돌봐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모두다 포기해버리려고까지 했었죠. 평생에 한이 될 것 같았어요.”
조 씨는 자신에게 원망도 해보고 후회도 하며 자책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때는 정말 너무나 마음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약에 그때 내가 배우지 않았다면 평생동안 기회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지금까지도 시도도 하지 못했을 꺼예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쓰리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자고 결심했죠.”

아픈 시련을 견뎌낸 조 씨에게 영유아보육사 자격증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 전통교육지도자자격증이 주어졌다. 그 무엇보다 값진 보상이었다.

“마무리도 확실하게 해야죠”
조 씨는 포천시생활개선회장을 6년째 맡고 있다. 임기 2년에 연임 1번이라는 다수의 생활개선회를 봤을 때 조금 의외다.

“처음 저를 보면 회장감 같지는 않죠? 목소리도 작고, 나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저도 처음에 저의 그런 모습을 잘 알기 때문에 회장직을 거절했었어요.”

처음 생활개선회에 가입하고 2년만에 조 씨는 신읍면회장을 맡았다. 면회장 2년 임기를 마치고 조 씨는 시연합회로 진출해 부회장직을 맡았다. 부회장을 맡은지 2년만에 회장에 당선됐고 그 후로 6년간 회장직을 이수했다.

“저희도 원래 2년 임기에 1번 연임이었어요. 그런데 회원들이 4년이 너무 짧다고 2번 연임으로 하자고 건의를 해 정관을 바꾸면서 다시 회장직을 맡게 됐어요. 잘 나서지도 못하고 추진력도 없는 저를 왜이리 믿어주는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라며 웃는 조 씨의 얼굴을 보니 왠지 회원들의 마음을 알것 같기도 하다.

차분하면서 한 없이 감싸줄 것만 같은 포근함이 배어나오는 조 씨를 언니처럼, 엄마처럼 따르는 것이 아닐까?
올해 조 씨는 임기 마지막 해를 맞았다.

“6년이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힘들었지만 뿌듯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재작년과 작년, 제 욕심 때문에 조금 소홀했던 점이 마음에 많이 걸려서 올해는 정말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확실한 마무리를 할 생각이예요.”

올해 9월 중에 포천시생활개선회에서 떡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포천시생활개선회원들은 힘든 농사일 가운데도 열심히 떡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열심인 회원들을 위해 성대한 행사를 준비해야겠죠? 저희 생활개선회가 유난히 조용한 편이예요. 회장을 닮아서 그런지 나서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일하고 누군가 한사람만 알아줘도 뿌듯해하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열심히 노력하는 회원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나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올해는 생활개선회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내빈들도 많이 초청하고 홍보도 많이 해 회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줄 생각이예요.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는데 많이 자랑해도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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