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업대학(이하 한농대) 5기 졸업생 이하정(27세) 씨와 한농대 7기 졸업생 임순영(29세) 씨는 동기생들과 비교해보면 축복받은 커플인지도 모른다. 이들부부는 졸업 후 아버지가 일궈놓으신 농장에서 시행착오와 어려움없이 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씨 부부는 이같은 자신들의 장점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고 한다. 부모님이 일궈놓은 것들을 발판삼아 남들보다 한발, 아니 두발 앞서가는 최고의 농업CEO 되겠다는 결심이 믿음직스럽다.


농사, 죽어도 못해
경남 밀양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이 씨는 정말 특이한 학생이었다. 한참 꿈많은 여고시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하나 없었던 이 씨는 남들 다 하는 진학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조차 없었다.
그렇게 졸업이 다가올때 쯤, 아버지가 한가지 제안을 해왔다.

“한농대라는 곳이 있다면서 한번 농업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그 당시 어머니께서 밭농사를 조금 하고 계셨는데 어머니를 보면서 농사는 절대 짓지 말아야지란 생각을 했었거든요. 정말 철없었죠. 도와드릴 생각은 안하고 나는 하지 말아야지란 생각만 했으니. 그런데 막상 아버지가 농업을 배워보라고 했을때에는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더라구요.”

워낙 우유부단한 성격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그 어떤 이끌림이었을까 그렇게 이 씨는 아무 생각없이 한농대에 진학했다.

“어머니가 당시 고추농사와 딸기농사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당연하게 채소과를 선택했어요. 그 때만 해도 내가 졸업해서 어머니 일을 물려받아야겠다거나 내 일을 해봐야겠다거나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죠.”

그렇게 아무런 계획없이 입학한 이 씨에게 학교생활은 하루하루가 무의미했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특별히 농업에 관심이 생기거나 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때만해도 농업이 나와 맞지 않다는 생각은 안했었어요. 그래서 한번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다녔죠. 그런데 막상 2학년이 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구요.”

이 씨는 2학년 실습기간 동안 부산에 있는 원예시험장에서 딸기재배를 했었다. 처음 이곳을 배정받았을때까지만해도 이 씨의 가슴은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직접 해보진 않았지만 어머니 곁에서 늘 보아오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재밌었어요. 아무리 농사에 관심이 없었어도 늘 봐오던 일을 직접 해보게 됐으니까요. 그런데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에 ‘이길은 내 길이 아니다’란 생각으로 꽉찼으니까요.”

실습기간을 버티면서 학교를 계속 다녀야하나란 고민까지 했을 정도로 이 씨는 농업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하고 어머니에게 농사를 접으라고까지 설득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어머니께도 농사를 물려받을 사람이 없으니 어머니도 그만 고생하고 농사를 접으라고 설득했죠. 결국 어머니는 농사를 접으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굳게 마음 먹은 이 씨의 마음을 흔들어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농사꾼의 아내가 되다

학교를 그만두고 농업과 등을 돌리기로 결심했던 이 씨의 눈앞에 임 씨가 나타났다. 당시 1학년이던 임 씨는 비록 이 씨의 후배였지만 듬직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이 씨를 감싸줬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먼저 사귀자는 말도 없이 연인이 됐다.

“남편은 다른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까지 다녀와서 이곳에 올 정도로 농업에 대한 확신이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남자를 만나면서 결혼 생각까지 했으면 당연하게 농사에 대한 걱정을 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생각이 안든것 보면 저에게도 저도 모르는 농사꾼의 피가 흐르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임 씨는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버섯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맨손으로 이 정도로 농장을 일구신 아버지를 존경하고는 있었지만 농사보다는 경찰을 꿈꾸던 청년이었다. 그런 임 씨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 아버지의 농장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아버지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까지 오게 됐다.

“휴가를 나올때마다 아버지가 일을 물려받지 않겠냐고 설득하셨어요. 그러나 전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에 단호히 거절했었죠. 그러던 중 주변에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을 알게됐고 적어도 2~3년, 길게는 5년이나 되는 수험기간을 거치고 있는 그들을 보게됐어요. 그때서야 아버지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어요.”

그 누구보다 빨리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임 씨는 시험을 준비하는 그 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차라리 아버지의 일을 빨리 물려받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농업인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임 씨가 아버지에게 뜻을 전하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업계획서를 내밀었다.

“아버지의 사업계획서를 보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어요. 섣불리 덤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던 중 한농대를 알게됐어요.”

제대 말년 마지막 휴가, 임 씨는 한농대에 입학원서를 냈다. 제대 열흘 후 입학을 하게됐고 이 씨를 만나게 됐다.
이 씨는 졸업 후 법무사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임 씨의 졸업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단 하루도 기다릴 수 없었던 둘은 임 씨의 3학년 겨울방학때 결혼식을 올리게 됐고 이 씨는 상상치도 못했던 농사꾼의 아내가 됐다.

‘내가 봐도 기특해’
“엄마가 결혼식 올리기 한달 전까지 다시 생각해보라며 결혼을 말렸어요. 거리도 워낙 먼데다 나이 어린 맏딸을 좀 더 곁에 두고 싶으셨나봐요. 특히 아버지와는 달리 직접 농사를 지어보셨기 때문에 딸이 농사짓는 곳에 시집간다는 것이 어떤것인지 알고 계셨던 거죠.”

딱 2년만 기다렸다 가면 안되냐는 어머니의 말을 뒤로하고 시집을 온 이 씨는 남편만 곁에 있다면 어떤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시집을 와서 보니 농촌생활이 생각같이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대전광역시지만 농장이 있는 곳은 시내와는 한참 떨어진 곳인데다 작목이 버섯이다보니 단 하루도 휴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정이 워낙 멀어 가고싶을때 아무 때나 갈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도 다 밀양에 있다보니 만날 수가 없었어요. 운전도 못해서 시내에도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고요.”

임 씨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차라리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힘든 걸 꾹 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내색않는 아내에게 항상 미안했다.

“워낙에 농사일에 서툰데다 버섯은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작목이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가지도 없었어요. 오히려 같이 일하는 분들게 걸리적 거리기까지 할 정도였죠. 누구와 이야기 할 사람도 하나 없는데 남편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모든 일을 관장하다보니 저 하나도 챙겨줄 틈이 없었어요. 잘해보자는 마음에 꾹참고 견뎌봐도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힘들어져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날이 늘었어요. 다투기도 많이 했죠.”

그런 이 씨가 농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이 씨 부부의 농장은 재배시설이 스무동 가까이나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농장이다 보니 직원들도 많고 이것저것 관리할 것이 많았지만 시아버지가 총감독을 하고 남편이 실무를 담당하는 정도밖에 업무 분담이 안돼있었다. 그걸 본 이 씨는 법무사사무실에서 일하던 경력을 발휘해 경리 일을 보기 시작했다.

“문서작성이며 발주관리며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어요. 저도 경영에 대해 직접적으로 배운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이 없는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어요. 꼭 햇볕아래에서 흙만지고 일하는 것만이 농사인가요? 농사도 이젠 경영이잖아요. 사무일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해요.”

이렇게 이 씨는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기특했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게되자 농촌생활도 빠르게 적응됐다. 다툼이 잦았던 둘 사이에도 다툼이 없어졌다. 아내가 생활에 적응하자 임 씨도 농장 승계수업에 박차를 가했다.


십년만 기다리세요

“제가 문제였나봐요. 제가 적응을 하니까 남편의 경영능력이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어요. 언제나 농장을 물려받을까 계획조차 세울 수가 없었는데 이제 둘이서 미래의 계획도 논의하고 꿈도 키우고 있어요.”
임 씨의 꿈이 워낙에 크다보니 처음 이 씨는 임 씨의 꿈을 쫓아가기도 버거웠다.

임 씨는 앞으로 십년이 걸리고 이십년이 걸리더라도 농업인이 똘똘 뭉쳐 그 누구도 농업을 우습게 보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큰 꿈을 갖고 있다.

“혼자 성공하면 의미 없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우리나라 농업이 인정받아야만 개인들도 농사짓기 편하니까요. 작목반이나 지역별 브랜드 사업도 이런 취지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아직은 제 스스로가 힘이 없지만 농장일이 어느정도 안정이 되면 농민운동에도 참여해볼까 해요.”

이 씨 부부는 앞으로 십년안에 버섯을 재배하는 병을 제조하는 시설까지 완비할 계획이다.
한병에 250원~300원인 병을 자체적으로 제작하면 그만큼 생산성도 높아지고 소득도 높아지지 않을까 해서이다. 아직 제대로된 계획을 짠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사업성이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올해부터 조금씩 사업계획을 짜보고 있다.

“남편이 결혼하고 항상 얘기한 계획이 있었어요. 향후 나이 50이 되기 전에 산을 하나 사서 구릉지 전체에 버섯을 재배하고 산에는 휴양림을 조성해 사람들이 와서 버섯도 체험하고 쉴수 있는 테마공원을 만들고 싶어해요.”
이런 남편을 보면서 이 씨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편의 꿈이 큰 만큼 자신도 뭔가 꿈을 갖고 하루하루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취직을 해서 다른 일을 해볼까란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이 농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요. 얼마전에 유치원아이들이 와서 농장체험을 하고 갔는데 버섯 재배하는 것을 구경하고 직접 버섯을 따면서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체험농장을 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체험농장은 남자보다는 여자의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니까 제가 할 일이 많겠죠.”

100%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게 노력하는 남편과 귀여운 아이와 뱃속에 있는 아이, 드디어 찾은 새로운 삶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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