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대의 비극 ‘문화대혁명’의 주모자

  
 
  
 
*강청은 장칭, 모택동은 마오쩌뚱, 임표는 린뱌오로 표기하는 것이 중국 고유 명사를 표기하는 법 부합하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우리발음대로 이름을 싣습니다.


미친바람(狂風)

“지난 10년 동안 3백만 명의 당원이 숙청당했고 희생된 인명은 2천만 명을 헤아린다오. 경제적인 손실도 5천억 위안으로 추산됩니다. 국토 곳곳이 유린되고 중국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수사관)
“그것은 비겁한 수정주의에 맞서 만민평등과 조직 타파를 실현해 중국을 세계 최강의 나라, 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한 위대한 실험이었소.”

힘없는 목소리, 퀭한 눈빛의 여인은 날카롭게 반론했다.
도무지 자신들이 저지른 그 끔직한 10년(1966~1976년)에 대한 반성의 기미라곤 보이지 않는 이 여인의 이름은 강청(江靑;1914~1991. 5. 14)이다.

현대 중국의 최대 비극이자 대륙을 피의 회오리바람으로 물들였던 문화대혁명.
이 엄청난 재앙은 1966년 8월 모택동이 중국공산당의 제8회 제1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十一中全會)에서 “모든 (그릇된) 전통적인 것과 부르주아 적인 것에 대해 젊은 홍위병들이 전방위 적으로 공격할 것”을 종용하면서 시작됐다.

모택동은 8월 18일 겁 없는 학생들로 구성된 100만 명의 홍위병들을 천안문 광장에 모아 놓고 “전국 주요 도시로 진출 모택동 사상을 찬양 전파하면서 불합리하고 무능한 옛 문화를 뿌리 뽑으라.”고 선동했다.
곧바로 대륙은 광풍에 휩쓸렸다.
교사, 의사, 관리, 종교인, 지식인들은 붉은 깃발과 완장에 요란한 구호 소리로 무장한 홍위병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목에는 ‘반혁명분자’라는 푯말을 달고 무릎 꿇려져 이리저리 질질 끌려 다니며 손가락질, 욕설을 당해야했고 어린 홍위병들은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학생이 교장선생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마을의 어르신을 문짝 밑에 깔고 짓밟아 죽이는 일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들이 중국 전역에서 발생했다.

“악질분자를 죽여라”
“부르주아 배신자와 반혁명사상에 물든 지식인들을 타도하라”
“위대한 모택동 주석을 우리가 사수하자”

홍위병에게는 신이었던 모택동을 조금이라도 비판했던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위병들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살육하고 구타했다.
단지 나이가 많고 한 자리하고 있다는 죄로 수많은 기성세대들이 능멸을 당해야했다.

실패한 지난 ‘대약진운동’의 과오를 덮고, 반대세력을 제압해 권력을 유지하려던 모택동의 ‘작전’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문화대혁명의 또 하나의 주도자는 강청이다. 그녀는 현대 중국인들에게 가장 많은 (부정적인)영향을 끼친 여성이다.

1980년. 어는 젊은 수사관을 향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은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정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꾸짖는 이 여인은 곧 사형판결을 받게 된다.

푸른 사과

강청은 1914년 중국 산둥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이청운(李靑雲), 별명은 이운학(李雲鶴)이었던 것을 보면 원래는 이 씨였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괄괄하던 성격은 조용한 시골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아~ 답답해서 못 살겠어. 지난번에 보았던 유랑극단의 발랄한 분위기를 잊을 수 없어.’
그녀는 14세가 되던 해 보따리 하나를 둘러메고 무작정 가출했다.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유랑극단의 동선(動線)을 찾아내 한 소도시에서 공연을 하던 유랑극단을 찾아냈다. 강청은 책임자를 찾아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데려만 가달라고 애원했다.
그렇게 유랑극단의 일원이 된 강청은 19살까지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19살이 되자 강청은 유랑극단에 결별을 고하고 언젠가 들렀던 번화한 도시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여배우를 지망해 프롤레타리아 연극 그룹에 참가했다.
“앞으로 나의 예명은 ‘남빈(푸른사과)’이 될 것이다.”

스무 살 여배우 남빈의 미모는 빛을 발하기 시작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당시 상하이의 대스타이며 영화평론가인 당납(唐納)과 스캔들이 터지며 남빈의 유명세는 한층 더 해졌다. 그녀의 앞날에는 배우로서의 명성과 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정말 그 시골구석에 아직도 처박혀 있다고 생각한다면….정말 끔찍해’
명성과 곧 다가올 재물과 든든한 애인까지….강청의 하루하루는 정말 행복했다.
그러나 중국현대사의 격랑은 잘 나가던 신인여배우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진 것이다.

운명의 만남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대륙으로 밀고 들어왔다.
곧 상하이가 함락될 것이다.
강청은 중국공산당의 수도인 ‘옌안’으로 피신했다.
‘전쟁 중이라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어. 차라리 그 동안 체계적으로 공부나 해 두자.’
강청은 ‘노신 예술학원’에 입학해 자신의 경험을 강의하기도 했고 다른 이에게 수강을 받기도 했다.

“얘들아. 오늘 강연하러 오는 사람이 그 유명한 모택동이래.”
“모택동이 누구야?”
“얘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인 모택동도 모르니?”

45세의 한창 나이에 키가 훤칠하고 이마가 시원시원한 모택동은 여자관계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담당 간호사건 시중드는 처녀건 또는 공적으로 만난 여성이건 닥치는 대로 건드렸다. 병원의 병상이나 학교의 숙직실, 심지어 달리는 열차 안에서도 그의 불타는 정욕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동지들… 현대 예술이 인민 대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모택동은 강연을 하다말고 말을 멎었다.
유난히 눈에 띠는 빼어난 스타일의 한 여학생이 보였던 것이다.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 강의를 이어나갔지만 강의 후에도 강청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음~ 살결이 유난히 희고 아름다웠어. 그리고 그 나긋나긋 한 자태하며….‘
모택동이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둘리 없었다.

‘흠~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라… 아직 국민당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지만 모택동은 인민의 마음을 꿰뚫고 있어. 특히 농촌지역에서의 지지는 국민당에 비할 바 아니지. 중국인민들의 90%는 농민들이야. 농민들의 지지를 받는 자가 결국엔 승리하게 돼있어.’

23세에 불과한 강청의 ‘주판알 튀기는 실력’은 놀라웠다.
그녀는 모택동의 ‘추파’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모택동도 보통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나는 인민들에게 추앙받고 있어. 지도자들은 뭔가 인민들에게 신비하게 포장되어 있지. 즉 사생활과 대중에 보이는 모습은 다소 거리가 있게 마련이란 말일세. 나는 황제는 아니지만 지도자의 사생활은 좀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네.”
그는 아직 ‘이청운’이자 예명 ‘남빈’이었던 그녀의 이름을 ‘강청’으로 고쳐주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당신은 나의 부인이라 불릴 수 없다. ‘강청’ 동지로 불리면서 나의 생활 비서이자 가정부 역할을 하며 생활해야 한다. 당신이 나와 동거한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 즉 당의 업무에는 일체 간여할 수 없다. 당신 때문에 나의 부하들이 불편해 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강청은 생리적 욕구까지 충족시켜주는 가정부 취급에 잠시 망설였으나 뒷날을 보기로 했다.

‘그래? 얼마든지 견뎌줄 수 있으니 부디 중국 대륙만 제패해 다오. 당신을 놓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나는 여제가 될 수 있다. 십 오년만 지나면 당신도 60이라오. 그래봐야 나는 40도 되지 않을 나이….’
강청은 모택동을 따라 들어갔다. 결혼을 하되 부인으로는 대접을 못 받는다는 이상한 관계. 모택동의 아내는 충격으로 쓰러져 모스코바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수많은 격랑을 해치고 이 뚝심의 사나이는 드디어 중국을 제패한다.
1949년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은 마침내 외세와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국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여제, 활화산처럼 터지다.

“이젠 좀 풀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요? 나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퍼스트레이디예요. 아직까지 나의 대외활동을 막는 이유가 어디에 있지요?”
“당신 나와 첫 만남 때의 약속을 잊었소? 그렇게 살기로 한건 당신의 선택이었소. 정치활동에 대한 미련일랑 아예 접는 것이 좋을 것이오.”

강청은 아직까지도 ‘비천한 ’첩에 불과했다.
다른 당 간부들의 부인들이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존경받는 것을 보 때마다 강청의 가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곧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찾아온다.

모택동은 그 동안, 그러니까 1966년까지 시행된 ‘대약진 운동’에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있었다. 그는 ‘유소기’ 등에게 국가권력마저 내줄 판이었다.
이때 모택동이 생각해 낸 결정적인 ‘한방’이 바로 홍위병들을 선동한 ‘문화대혁명’이었던 것이다.
상황은 반전됐다.

100만 홍위병의 호위로 모택동은 자신의 정적들과 사회 속에 숨어있는 반 모택동 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문화대혁명은 강청이 그 동안 짓눌려왔던 모든 욕구불만을 일시에 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모택동은 강청이 문화예술계에서 일했던 경험을 주목해 그녀에게 문화예술분야에서 구태의 잔재를 소탕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강청은 날개를 단 호랑이 같았다.
강청이 홍위병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하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모택동은 그때까지 대중연설, 대중선동, 대중동원에 있어서 자신을 능가하는 연설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냥 정부(情婦)처럼만 여겼던 강청이 마이크를 잡자 백만의 청중들이 들끓고 있지 않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 연극을 통해 다진듯한 적절한 제스처, 울리고 웃기는 놀라운 화술, 거기다 세련된 외모와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
홍위병들은 그녀의 연설에 열광했다.

‘강청에게는 마치 옛 삼국지에 나오는 장건(황건족의 수장) 형제처럼 백성들을 들끓게 하는 힘이 있구나. 저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됐을까?‘
모택동은 강청에게 문화대혁명을 일임하다시피 했다.
강청은 1966년 가을 갑작스럽게 터진 활화산처럼 중국 정치의 전면에 부상한다.
사실상 중국의 이인자로…

권력의 정점에 선 강청은 10억에 달하는 중국인인의 전 문화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혁명기간 중에 다양한 전통적·비정치적 문화 활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강청은 훗날 자신과 함께 ‘문화대혁명 4인방‘으로 불리는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과 함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옛 유적과 전국의 사찰이 파괴됐다. 모택동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문화대혁명을 즐겼다.
모택동은 강청의 재능을 이용했고 강청은 모택동을 신처럼 섬기는 홍위병을 권력수단으로 이용했다.
급기야 강청의 힘은 마침내 모택동의 수중에서마저 벗어나고 있었다.

정점 앞에서의 몰락

강청의 정치적 파워는 마침내 국가주석인 유소기와 임표 부주석을 실각시키기에 이른다.
모택동은 측근을 불러 불안감을 토로했다.
“이보게. 이러다가 이거 강청에게 모든 권력이 넘어가는 것 아닐까? 이제 강청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네. 그녀는 스스로 주석이 되려하고 있단 말일세.”
그런 세월이 5년 가까이 흘러갔다. 밀물처럼 밀려와 세상을 뒤엎을 것 같았던 혁명의 기세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모택동으로서는 보낼(?) 사람들 다 보내고 권력을 유지했기에 이네는 평온한 말년을 보내기 원했다. 그러나 강청은 그 격랑의 세월이 좋았다. 그때야 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황금기가 아니었던가.
그 동안 강청에게서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린(아니 두려워 진) 모택동은 떠 다른 젊은 ‘생활비서’를 곁에 두었다.

그러나 강청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강청은 중국 정치의 전면에 다시 나설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1970년대가 되면서 모택동은 ‘정착’을 표방하며 다시 문화대혁명을 슬금슬금 재개했다.
강청도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1973년 정적 임표가 몽골에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죽었고 1975년에는 항저우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동맹파업이 군대에 의해 진압됐다.

그러나 문화혁명 10년은 인민들에게 피로감을 주었고 정적들도 하나 둘 씩 재기해 중앙으로 진출해 왔다.
1978년 1월 8일 한때 그녀에 의해 쫓겨났던 등소평은 주은래 총리의 장례식 조문에서 대담하게도 ‘중국현대화의 4개 노선’을 선포함으로써 강청에게 정면도전을 선포했다.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잦아들고 모택동의 병세가 악화되며 강청의 기세도 꺾이고 있었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했다.
모택동이 죽자 중국 정국은 사태가 급변했다.
한 달도 안 돼 4인방은 새 정권 실세에 의해 체포됐다. 그녀에 열광하던 인민들은 이제 그녀와 4인방을 비난하고, 죽이라는 대자보를 거리에 붙였다.

문화대혁명 주도자 4인방에 대한 비난이 대륙을 휩쓸었다.
1977년 강청은 공산당에서 축출됐고, 1980년에는 그녀를 조사하던 수사관을 꾸짖었다.
1981년 사형이 확정되고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 후의 강청의 삶은 오욕과 수치의 나날이었다.
1991년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강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대 중국 최대의 비극이었던 문화대혁명의 ‘실세’ 주도자였던 강청의 삶은 그렇게 끝났고 중국은 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에 힘입어 21세기의 초강대국으로 거듭나려하고 있다.
등소평은 어쩌면 모택동과 강청의 광기어린 정치를 반면교사 삼으며 중국의 돌파구에 대한 지혜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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