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하는 일은 남들도 다 하는 일이라며 자랑 할 줄도 모른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그저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회원들이 너무도 고맙다는 손금지(53세) 씨. 농업기술센터가 시청으로 통합된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손 회장의 역할이 상당했을 듯 한데 한사코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않았다.
손 씨는 자신은 드러나진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산소같은 지역 일꾼’이 되고 싶을 뿐이란다.



두렵기만 했던 바깥세상
손 씨의 친정 부모님은 순천에서 벼농사와 깻잎 농사를 짓는 평범한 시골 농군들이었다. 부모님의 바람들이 늘 그렇듯 손 씨의 부모님도 딸 만큼은 농사를 짓고 사는 삶을 택하지 않길 바랐고, 덕분에 손 씨는 어린 시절 농사일을 거의 하지 않았었다.

“그 당시 시골사람들이 다 그렇잖아요. 딸은 공부를 더 시키기 보다는 신부수업을 잘 시켜 좋은 곳에 시집 보내는 것이 제일 큰 바람이었죠. 그래서 바깥 출입을 거의 안했었어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바깥세상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졌죠.”

그렇게 세상물정 하나 모르고 얌전히 집에만 있던 18살의 손 씨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바로 손 씨의 오빠였다. 오빠의 권유로 4-H 활동을 시작했고 그렇게 손 씨의 첫 사회활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 당시의 활동은 손 씨에게 세상밖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빠가 순천 4-H 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오빠의 도움으로 4-H 활동을 시작했죠. 그렇지만 그저 지도소를 다니며 교육받고 또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그다지 활발한 활동은 하지 않았어요.”

손 씨는 그 당시에는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 씨는 농촌에서 사는 여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홀로 지켜온 농촌
21살이 되던 해, 손 씨는 친척분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 이치수(59세) 씨를 만났다. 이 씨와 중매를 보고 단 한번의 데이트도 없이 결혼 날짜가 잡혔고 손 씨는 이 씨와 단 한번의 만남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나이도 많고 그리 살림도 넉넉하지 못한 남자였지만 부모님이 괜찮다고 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결혼해야한다고만 생각했어요. 불만 한번 가진 적이 없었어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했었죠.”

당시 손 씨의 친정 부모님은 사돈이 농사 안 시키겠다는 말을 듣고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집에서도 안 시킨 농사 시집가서 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큰 아들도 아니니 넉넉한 집은 아니어도 딸이 고생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이 씨 스스로가 농촌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손 씨의 부모님도, 이 씨의 부모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손 씨는 남편의 뜻에 따라 시부모님 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남편이 부모님 밑에서 지내기로 한 것에는 농사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남편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제가 부모님과 농사를 짓는 동안 자신은 나가서 돈을 벌겠다고 했죠. 그때는 둘이 일해야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으니까 그런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나이어린 신부가 불안해 부모님과 같이 있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남편은 처음에는 근처의 여천공단에서 일을 하다 80년대에 들어서는 다른 도시로 일을 가게 됐고 심지어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설 일까지 하게 됐다.

감나무 2700㎡(8백평), 벼 3300㎡(1천평), 밭 2700㎡(8백평)… 그 당시에는 이정도의 규모까지는 아니었지만 농사한번 지어보지 않은 손 씨가 하기에는 벅찬 농사일이었다.
91년, 남편이 집으로 들어오기까지 손 씨는 홀로 농촌을 지켜왔다.

“이제야 세상 살맛 나네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아이들 키우랴, 농사일 하랴 손 씨는 집안에 매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바깥 활동을 할 수 있는 부녀회 활동도 손 씨는 즐겁기 보다는 버겁기만 했다.

그러던 91년,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고 손 씨는 남편의 배려덕에 바깥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남편 이 씨는 그동안 고생한 부인이 열심히 활동하는 것이 좋았다.

“91년에 부녀회장을 맡았어요. 부녀회장을 맡으면서 생활개선회를 알게됐죠. 생활개선회활동을 시작하니 세상이 달라보였어요.”

농촌에 사는 여성은 당연히 농사와 집안일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또 바깥 활동은 동네 잔치를 거드는 일이 전부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생활개선회를 알고부터 손 씨의 삶은 달라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됐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배우고 어울리고, 또 다른 이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줄 몰랐었어요. 저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셈이죠.”
그동안 어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손 씨는 활발하게 활동을 하며 면 회장까지 맡게 됐다.

“처음 내가 회장을 어찌 하나 걱정했었어요. 그래도 큰 욕심 안부리고 열심히만 하면 다들 인정해 줄 것이란 생각에 묵묵히 열심히 했죠. 그 결과 여수시생활개선회 읍·면 중에 제가 회장을 맡고 있던 율촌면의 기금이 제일 많아졌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지금도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면서 가장 뿌듯한 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그 일을 꼽아요.”
손 씨는 점차 자신감을 얻어갔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행복해”
생활개선회에서 활동한지도 벌써 17년이나 됐다. 그동안 손 씨의 삶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지금은 저 스스로 지역에 없어서는 안될 일꾼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제는 여수시에서 개최되는 엑스포를 비롯한 여러 지역행사에 여수시생활개선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단체로 자리잡았다. 먹거리 장터부터 자원봉사까지… 여수시생활개선회는 솔선수범해 지역민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제 바로 전 회장부터 꽃밭을 가꾸기 시작했었어요. 제가 회장을 맡아 그 일을 이어받고 엑스포를 대비해 총력적으로 매달렸죠. 회원들 모두 그 척박한 땅을 꽃밭으로 일구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자기 농사일까지 미루고 애쓰는 회원들을 보면서 난 더 열심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름답게 가꿔진 꽃밭을 보면서 몸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어찌나 뿌듯하고 행복하던지… 그 기분은 말로 못하죠. 생활개선회활동을 하면서 봉사의 참기쁨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

오는 10월에 여수에서는 전국체전이 열린다. 이를 위해 손 회장을 비롯해 회원들이 자원봉사 신청을 마쳤다. 살림하랴, 농사지으랴, 일주일에 한번씩 가는 요양원 봉사활동까지 정말 쉴틈도 없을 듯 한데 회원들은 서슴없이 신청을 했다.

“600명 회원을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회장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힘들죠. 모두 회원들이 너무 잘 따라줘서 여기까지 일군 거예요.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묵묵히 제 할 일 열심히만 하면 누가봐도 인정해 주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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