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시생활개선연합회, 영주시여성농업인연합회… 영주시에서 활동하는 굵직한 여성농업인단체들을 만든 ‘미다스의 손’ 황순자(55세) 씨. 생활개선구락부시절부터 생활개선회와 인연을 맺어 영주시생활개선연합회를 구성했고,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주시여성농업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시 황 씨는 영주시생활개선회의 부흥을 위해 생활개선회에 뛰어들었다. 한여농 활동으로 생긴 10년간의 공백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황 씨를 만났다.



나는야 농촌이 좋아
4남 4녀 중 자신을 제외한 7남매들이 모두 객지로 나가버린 친정집. 황 씨는 다른 도시를 꿈꾸던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홀로 부모님 곁에서 농촌을 지켜왔다.

촌이 좋아서였는지, 농사가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단지 엄한 부모님이 무서워서였는지는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 듯 했다.

당시 친정은 밥은 굶지 않았지만 농사로 8남매를 키우기에는 그리 넉넉한 살림이 되지 못했다.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황 씨에게 사회를 알게 해 준 단체는 4H 였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으며 지도소를 왔다갔다 했었어요. 그러다가 4H 활동을 시작했는데 단체 생활이 그때부터 적성에 맞았었나봐요. 군 여자부회장까지 맡아서 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활동했어요. 농촌이 좋았다고 하지만 어린 나이에 또래들도 쉽게 만날 수 없는 농촌에서 4H 활동마저 안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아마 그 덕분에 갑갑한 농촌생활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며 농촌에서만 지내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농한기를 기회로 도시로 나가 친척들이 운영하는 사업을 돕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사회경험을 쌓았다.
어린 나이에 화려한 도시생활을 보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기 힘들 법도 한데 황 씨는 남달랐다.

“도시생활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아무리 농한기 내내 도시에서 지내도 농번기가 되면 어김없이 농촌으로 내려와 농사일을 거들었어요. 그런데 단 한번도 불만을 갖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농촌에서 뿌리박고 살 운명이었나봐요.”

방황… 그러나 결국은 농촌으로
23살이 되던 해. 황 씨도 결혼 적령기가 됐고 혼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상대는 당시 부모님들 끼리 알고 지내던 집안의 안종기(57세) 씨. 순박했던 황 씨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지 안드는지조차 생각지 않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결혼을 했다.

“당시 남편은 밭 조금을 갖고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와는 달리 남편은 욕심이 많았었어요. 농사로는 큰 돈을 벌 수 없다는 생각에 결혼하고 얼마 뒤 여러 가지 제안을 했었죠. 결혼도 부모님의 뜻에 따라 했듯이, 결혼을 해서는 남편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기로 했었죠.”

그렇게 황 씨 부부는 고향을 등지고 강원도로 올라갔다. 강원도에 올라가 광산일을 시작하면서 황 씨도 조금씩 희망이 생겨났다.

“당시 광산일이 경기가 좋았어요. 열심히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죠. 처음 한두해는 돈 버는 재미가 좋았어요. 그런데 잦은 광산 사고를 보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죠. 결국 남편이 먼저 그만 고향으로 내려가자더군요.”
황 씨 부부는 광산에서 번 돈으로 땅을 사 다시 영주로, 농촌으로 돌아왔다.

절망이란 없다
1981년. 황 씨는 외지생활을 통해 농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고 다시 돌아온 농촌에서 정말 잘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의 편이 아닌 듯 했다.

“영주로 내려와 얼마 안 있어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사고가 굉장히 컸어요. 치료를 위해 땅을 다 팔고도 빚을 많이 지게 됐죠. 정말 그 험한 광산일을 하면서도 사고 한번 없었는데 이제와 이런 사고를 당하나 원망도 많이 되고 이제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았어요.”

그래도 황 씨는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고로 인해 거동이 약간 불편해진 남편을 위해 황 씨가 더욱더 힘을 내야했기 때문이다.

“후계자금을 신청했어요. 당시는 후계자금 받는 조건도 까다로웠고 경쟁률도 무척 높아서 걱정했는데 어린시절 4H 활동했던 것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죠. 그 덕에 어려움없이 후계자금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일어설 수 있었어요.”

그렇게 아픈 남편을 대신해 뛰어다니면서 황 씨는 예전 4H 활동을 하던때와 같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말씀, 남편의 의견에 군말 않고 따르기만 하던 예전의 황 씨가 아니었다.
황 씨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영주시 여성농업인단체 산증인
1983년 생활개선구락부 시절, 황 씨는 생활개선회 발기인으로 활동하며 회원을 모집하고 연합회를 구성했다. 황 씨와 소수의 발기인들의 노력으로 85년 영주시생활개선연합회가 조직됐고, 연합회가 어느정도 자리잡자 황 씨는 다시 면으로 내려와 면회장을 맡았다.

“정말 힘들었죠. 일손을 거들어 주는 사람이 있나, 아이를 맡길데가 있나… 젊은 여자가 바깥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동네 어른들 눈치보랴, 바쁜 농사일에 시간 쪼개랴 정말 아이업고 다니면서 고생 많이 했어요.”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부족했나보다. 황 씨는 생활개선회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듯 하자 경영인 활동을 시작했다. 경영인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영인회의 분과로 활동하고 있던 여성농업인회를 알게됐다.

“대부분 여성농업인들이 중복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인원은 한정이 되있는데 단체는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또다른 단체를 만들어 회원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기 보다는 이미 조직되있는 단체를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여성농업인연합회 조직을 미뤘어요. 그런데 제가 미룬다고 끝이 아니더라고요.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하지 않겠어요?”

결국 황 씨는 또다시 발기인이 돼 영주시여성농업인회를 조직했다. 황 씨의 노력으로 다른 시군에는 조금 늦었지만 1997년, 영주시에도 여성농업인회가 조직됐다.

생활개선회여, 내가 돌아왔다
황 씨는 경영인 활동과 한여농 활동을 하다보니 10여년간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개선회는 황 씨를 잊지 않고 있었다.

“제가 인복이 많나봐요. 시작부터 같이한 단체기 때문에 늘 생활개선회를 마음에 두고는 있었지만 막상 맡은 일이 있다보니 쉽게 돌아갈 수 없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나를 찾아주다니 너무 감사했어요. 그 감사한 마음으로 뭔가 큰 일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돌아오게 됐죠.”

황 씨는 어떻게 하면 10여년의 휴면기간을 보상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많이 했다.
“기금조성도 중요하고, 교육도 중요하죠.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탄탄한 조직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회원간의 단합과 화목을 조성하는 것이 시급했죠.”

타 단체에 비해 유난히 단합이 잘 된다고 소문난 생활개선회지만 황 씨의 욕심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황 씨는 한달에 한번 전 회원이 모두 모이는 회의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반대도 심했다. ‘너무 자주 모인다’, ‘만나도 할 일이 없다’,‘시간이 부족하다’ 등의 불만을 뒤로하고 황 씨는 계획을 추진했다.

“막상 회의를 잡고 보니 회의할 때마다 안건이 생기고 할 이야기가 넘치더라고요. 회장이 할 일이 좋은말만 해주고, 회원들을 편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누군가 총대를 매고 억지를 부리고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그 역할이 바로 회장이 해야할 일이라 생각되요.”

황 씨가 돌아오고 영주시생활개선회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회원들의 정이 두터워짐은 물론이고, 각종 굵직한 사업들이 생겨났다.

“작년까지 고부간의 정나누기 행사를 매년 진행해왔어요. 이제 고부간 정 나누기 행사는 거의 모든 시군에서 진행하면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잖아요. 새로운 행사를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다문화가족 끌어안기예요.”

오는 7월 영주시생활개선회는 다문화가족들과 함께 경주로 견학을 갈 예정이다. 황 씨는 이 행사를 시작으로 다문화 가족을 위한 행사를 하나하나 발굴해 나갈 계획이다.

“제가 추진한 일 중 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소득사업 발굴이예요. 이제 농업은 1차산업만으로는 부족하잖아요. 3차 가공판매까지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죠. 생활개선회에서 진행하는 교육들을 소득사업으로 연결시키면 교육효과도 높아지고 그로인해 여성농업인들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돼요.”

황 씨는 어떤 사업이 영주시를 대표하기에 가장 적합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때 황 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바로 ‘국화’

“영주시는 선비의 숨결이 숨쉬는 선비의 고장이잖아요. 국화 가공사업이 그 특징을 잘 살릴 것 같더군요.”
영주시생활개선회는 7백여평의 국화밭을 가꿔 그 국화를 이용해 국화차, 포프리, 베게 속 등을 만들어 판매했다.
사업은 생각보다도 성공적이었고 올해는 국화가공사업을 영주시의 장수면으로 넘겼다.

“매년 한가지 이상의 소득사업을 개발해 각 읍면별로 나눠줄 계획이예요. 제 임기동안에는 다 못하겠지만 시작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언젠가는 모든 읍면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소득사업을 갖게 될 날이 오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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