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생활개선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백현자(53세) 씨는 생활개선회에서 활동한지 6년도 채 되지 않은 새내기(?)이다. 새내기 다운 패기와 열정으로 똘똘뭉친 백 씨.

다른 일은 다 재쳐두고 평창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활개선회를 알게 될 때까지 노력하겠다는 백 씨의 각오가 대단했다.

남앞에 나서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해야할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백 씨를 보니 평창군생활개선회가 평창군, 아니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생활개선회가 될 날도 머지않은 듯 하다.



충북 아가씨 강원도에서 짝을 만나다
백 씨의 결혼 과정은 그 나이또래의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대부분의 여성농업인들이 선을 보거나 부모님의 소개로 연애기간 없이 결혼을 한 것에 비해 백 씨와 남편 전명준(53세) 씨의 연애기간은 무려 10년이나 되기 때문이다.

“제천에서 살다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이곳으로 오게 됐어요.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전근으로 오게 되면서 온 식구가 생활터전을 옮기게 된 것이죠. 그 때만해도 이사나 전학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은 전교생의 관심거리였어요.”

잦은 이사로 친구들보다 한 해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한 학년 선배였던 전 씨와는 동갑이었고 둘은 처음 만난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편 전 씨는 도시로 나가게 됐다.

“그 당시만 해도 다들 결혼들이 빨랐어요. 그런데 저희 시댁이 살림이 어려워 어느정도 기반부터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둘다 결혼을 미뤘죠. 졸업을 하고 나면 연애하기가 더 수월할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데이트를 가장 많이 한 것 같아요.”

백 씨는 남편과 자신 모두 10년이라는 연애기간동안 단 한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다고 자신한다.

“주변에서 가끔 물어봐요. 짝사랑으로라도 다른 사람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냐고…. 그럴때마다 한번씩 저도 그때를 되돌아 보게되죠. 그런데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한눈판 기억이 없어요. 친구로 만나 10년을 친구처럼, 또 결혼해서는 연인처럼 지내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일꺼라고 확신해요.”

백 씨는 인터뷰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남편이 그리운지 남편의 사진을 힐끔대며 쳐다봤다. 정말 대단한 부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사랑이라면 사는 내내 다툼 한번, 어려움 한번 없었을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

사랑으로 이겨 낸 어려움들
“아휴~ 아무런 어려움없이 이날 평생 살았다면 거짓말이죠. 정말 못견딜정도로 힘들었던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남편의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죠.”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한 둘은 둘의 사랑만 있으면 아무런 장애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었다.

“남편의 집안이 무척이나 가난했어요. 저희 집도 부자는 아니었지만 큰 어려움없이 살아왔었어요. 제천에 살때는 농사일을 거들었었지만 강원도로 이사온 후에는 농사짓는 것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는데 농사짓는 집안,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간다고 하니 반대가 만만치 않았죠.”

거기에 결혼을 결심할 무렵 시아버지까지 돌아가시자 살림은 더 어려워졌다. 둘은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힘들게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 날부터 고생 시작이었어요. 남편은 어머니를 모셔야하기 때문에 직장을 버리고 강원도로 내려왔고, 농사한번 지어본 적 없던 제가 농사를 지어야만 했죠. 그나마 바로 아이를 가져 많은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내내 직장생활을 해오던 제가 시골집에만 있어야 하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더라고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병원비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댔다. 당시의 상황을 백 씨의 말을 빌리자면 ‘빨래비누 살 돈도 없을 지경’ 이었다고 한다.

코앞에 있는 친정이었지만 힘들때마다 달려갈 수가 없었다. 사실 조금 미안하더라도 친정에 손을 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는데 안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댈 곳이 없다는 외로움과 시골일의 고단함이 더해져 백 씨는 하루하루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백 씨 외로움과 고단함을 풀어준 것은 남편의 사랑과 일이었다. 평상시에는 남편의 사랑으로 버티다가도 남편과 다투거나 의견충돌이 생기면 풀을 뽑고 집안일을 하면서 잊었다. 그 덕에 백 씨의 살림솜씨와 농사 요령이 늘어났다.

“아무리 제가 친정에 안간다고 한동네에 계신 부모님이 제 사정을 모르시겠어요? 딸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지만 저를 위해 참으셨어요. 나중에야 잘 버텨내 대견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다시 세상으로…
“결혼전까지 어린이집에서 교사로 일했었어요. 워낙에 아이들을 좋아했었거든요. 결혼하면서 그만두게 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쉽더군요.”

정이 많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백 씨에게 어린이집 교사는 천직같았다. 어느순간엔가 자신이 가르쳤던 아이들이 성인이 돼 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찾아오기도 했다.

자기가 가르친 아이들이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백 씨는 그제서야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이렇게 집에만 있으며 가족과 농사밖에 모르고 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항상 다시 아이들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 씨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사회활동을 안하다보니 다시 사회에 나가는 것이 겁나더군요. 처음에는 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해서 다시 어린이집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어요. 결국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하며 세월을 보내야만 했죠.”

시어머니가 쓰러지고 살림이 더욱 어려워지자 남편은 건축일을 시작했다. 결국 백 씨는 시어머니와 남편 몫까지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아무리 남편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아직 농사일에 익숙치 않던 백 씨에게는 작은 일 하나도 큰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백 씨곁에 있어준 것이 농업기술센터였다.

“농업기술센터를 오가며 사람들을 사귀게 됐어요. 그곳에서 생활개선회를 알게됐고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2002년에야 생활개선회에 가입하게 됐죠. 아마 전 시·군을 통털어 저같이 경력 짧은 회장은 없을 것 같아요.”

가입하고 6개월만에 백 씨는 읍 부회장을 맡았고, 곧이어 군부회장을 맡게 됐다. 생활개선회라는 단체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가는 중이었던 백 씨에게는 벅찬일 같았다.

“뭘 믿고 저한테 이런 중책을 맡겨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회원들의 믿음을 저버리기가 싫었어요. 남편과의 상의 끝에 한번 맡아보자고 결심했고 이왕 맡은 것 최선을 다해서 성공적으로 이끌겠다 다짐했어요.”

회장을 맡아 작년 ‘농촌진흥청 폐지 반대’를 위한 집회에 나가고 각종 연단에 나가 사회도 보고 인사도 하면서 점차 백 씨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지금은 행사때 사회를 보고 내려오면 사람들이 놀라요. 어쩜 그렇게 떨지도 않고 잘하냐고 놀라는데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이제야 내 모습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아이들앞에서 구연동화하고 춤추고 노래했던 경험이 지금에 와서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제 나에게 두려움은 없다”
어떤 일이든 시작이 어렵다고 했던가? 막상 회장직을 맡고 나자 두려움보다는 의욕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제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겁도 나고 걱정도 됐었어요. 그러나 내가 여태껏 생활개선회를 몰랐던 것을 보면 나처럼 생활개선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내가 맡은 임기동안은 생활개선회를 알리는데 전력을 쏟을 생각이예요.”

하나하나 두려움을 이기고 도전하자 백 씨에게는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무궁무진하게 생겨났다.

“평창에 살면서도 우리 가족들은 스키 한번 타보지 못하고 살았었죠. 5년 전 남편이 스키를 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혼자 하는 취미는 의미없다며 제 손을 이끌었어요. 처음에는 너무도 무섭고 겁나서 싫다고 버텼죠. 그런데 막상 배우고 보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이제는 겨울마다 가족들이 스키타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백 씨는 생활개선회가 여성협의회에서 임원이 아닌 평회원으로만 활동하는 것을 보고는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임원을 맡아 큰 행사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생활개선회의 위상이 높아진다는 생각에 농사에 생활개선회일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을 잊고 총무직을 맡았다.

“총무를 맡으면서 자잘한 서류 만들 일이 많더군요. 그렇다고 컴퓨터 학원에 다닐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책을 사서 혼자 공부를 시작했어요. 컴퓨터라고 하면 덜컥 겁부터 먹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조금만 용기를 내보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아요.”

백 씨는 처음 생활개선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단체활동 하는 것 자체 만도 벅차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었다. 그런데 회장을 맡고, 또 여성협의회 총무까지 맡으면서 일은 더 바빠졌지만 하고 싶은 일과 할 일이 더 많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올해부터는 난타와 농악 교육을 시작해보고 싶어요. 신나게 두드리고 소리지르며 농사로 인한 스트레스도 풀고 또 지역행사 때 공연을 하면서 지역을 위해 봉사도 하고 1석 2조잖아요. 제 임기동안 평창군생활개선회원 모두 난타와 농악 전문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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