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시생활개선회 최영자(54세) 회장에게 2008년은 매우 뜻깊은 해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해이기 때문이다.
4년간의 시생활개선회장과 3년간의 방송통신고등학교 수업… 항상 뒤를 되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고는 하지만 하지만 하루하루 모든 일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최 씨이기에 아쉬움보다는 뿌듯한 마음이 크다. 남들은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일을 동시에 해냈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넘친 최 씨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쥔다.


최진사댁 ‘막내딸’

대대로 방앗간을 운영하는 집의 7남매중 막내딸. 이쯤하면 최 씨의 어린시절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귀여움만 받고 자랐죠. 농촌에 살고 있고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랄 정도였어요. 형제도 많으니 농사일 도울 필요도 없었고 농사도 짓지만 사업을 하다보니 집에 현금이 많아 집안에는 항상 과일이며 간식이며, 물품들이 풍족했었거든요.”

최 씨가 23살 되던 해. 혼기가 차오면서 주변에서 중매 자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님 눈에 최 씨는 아직 아이같기만 했다. 시집살이 하나도 딸이 견뎌낼 것 같지가 않았다.
농사라도 안짓는 집에 시집보내면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사람이 지금의 남편 이종철(56세) 씨다.

당시 이 씨는 농사짓는 부모님밑에서 자란 외아들이었지만 농협에 근무하고 있어 농사와는 관련이 없어보였다.
최 씨의 친정 부모님은 시댁이 넓진 않지만 땅을 갖고 있었고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것으로 믿고 막내딸을 시집보냈다.

“처음 시집올 때는 농사는 안짓고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그러나 막상 시집오고 나니까 그게 아니더군요. 어른들이 일하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집에서 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시어머니의 양에는 차지 않았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일을 도왔어요. 누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해보는 일이 너무 힘들어 밤에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래도 다음날이면 예쁜 며느리가 돼야지란 생각에 팔을 걷어올렸죠. 사실 일은커녕 뜨거운 햇볕아래 서있는 것조차 버거워했었어요.”

암흑속에 비친 한줄기 빛

최 씨를 힘들게 한 것은 농사일 만이 아니었다.
“농사일 힘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죠. 고부갈등과 외로움, 갑갑함 때문에 우울증이 걸릴 지경이었어요.”
나이어린 외며느리지만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예쁘다 해도 자기딸만큼 예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최 씨는 그런 상황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온 식구가 저만 예뻐하고 저만 귀여워주는 환경에서 살다보니 시어머니가 시누이들과 조금이라도 차별을 하는 것 같으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어요. 나도 예쁜 딸인데, 귀한 자식인데 왜 시누이만 더 예뻐하고 나는 저만큼 예뻐해주지 않을까란 생각에 이유없는 박탈감까지 느꼈었죠.”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최 씨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모든 것이 풍족했던 친정과는 달리 과일하나 먹을 수 없는 시골 살림을 견뎌내기란 여간 힘든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시집은 산으로 둘러쌓여있어 차가 다니지 않았었어요. 장날이 되면 시어머니가 광주리를 이고가 장을 봐오곤 하셨으니 과일은커녕 간식거리는 꿈도 못꿨죠. 적막함과 외로움이 더해져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그래도 최 씨에게는 직장 다니는 남편이 자리를 잡아 독립을 하면 농사를 안짓고 살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1년 후 그 희망은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하루가 다르게 인건비가 올랐어요. 인부를 쓰면서는 도저히 소득을 올릴수가 없었죠.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땅은 목숨만큼이나 귀한 것인데 팔아서 처분해버릴수도 없고… 결국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물려받을 수 밖에 없었죠. 그날부터 저는 농사꾼의 딸, 아니 여성농업인이 됐어요.”

남편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후계자로 발탁되면서 최 씨도 남편과 함께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됐다. 남편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꿈도 희망도 버렸던 최 씨는 바깥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남편이 농사꾼이 된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희망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농업기술센터’를 알게된 것이었다.


나를 살게 한 힘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이 있으니 와보라는 말에 별 생각없이 나갔어요. 그런데 마침 그때 한 교육이 고부관계에 관한 강의였죠. 강의를 듣는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어요.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고민들을 이렇게 속 시원히 풀어주다니… 그날로 농업기술센터의 팬이 되버렸죠.”

고부갈등이 세상사람들 모두다 겪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본인이 이렇게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마음의 짐은 한순간에 없어졌다. 시어머니의 태도도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미워하는 마음이 눈녹듯 없어졌다.

“농업기술센터는 그야말로 나를 지금껏 살게해준 힘이죠. 농업기술센터를 만나고 생활개선회를 알게됐고 나에게도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처음 시집와서 힘들어하는 동생을 보고 언니들은 서울로 시집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동생이 농촌으로 시집가서 고생하는 것 아닐까란 걱정에 자책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점점 밝아지는 동생을 보며 친정 식구들의 마음도 밝아졌다.

“저 하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걸 알게 되면서 제 삶의 목표가 생기게 됐죠. ‘항상 최선을 다해 생활하자. 내가 행복하면 주변사람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늘 주문처럼 외우고 있죠”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이 맡은일에 최선을 다하자 주변사람들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시생활개선회장직도 맡게 됐다.

다시 출발선으로…

“회장을 맡고 나서 내가 회장에 어울릴만한 사람인가 뒤돌아봤어요.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았어요. 부족하다고 포기하는 것보다 부족함을 매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최 씨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농사일에 집안일에 생활개선회 활동까지 과연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최 씨는 용감하게 도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도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컴퓨터 자격증에도 도전해 워드프로세스 자격증을 취득했다.

“새벽으로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고 낮에는 센터에서 실시하는 교육과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면서 자격증 준비하랴 방통고 수업들으랴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죠. 하지만 제 선택에 후회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3년간 고생한 덕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게 됐고 대학교에 입학 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최 씨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은 까맣게 잊은 듯 했다. 마치 소풍가기 전날 들떠있는 아이처럼 최 씨의 얼굴은 상기되기까지 했다.

“한학기만 있으면 방통고를 졸업해요. 또 생활개선회 회장도 졸업하고요. 유종의 미를 거둬야죠. 마지막 학기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 할 계획이예요. 생활개선회에도 뭔가 보탬이 될 일을 많이 하고 가야죠.”
올해 최 씨는 생활개선회원들을 위해 간병인 교육을 신청했다. 최 씨 자신이 자격증을 한번 따보니 그냥 배우면 그만인 교육보다 뭔가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교육이 더 큰 보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년부터는 오히려 더 바빠질 것 같아요. 졸업을 했으니 뭔가 해야하지 않겠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대학교를 가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생활개선회장을 졸업했으니 그동안 농업기술센터에서 배운 것들을 발휘해 서산의 유명한 마늘과 생강을 이용한 가공식품 소득사업을 하나 구상해볼까 해요. 대학생과 여성농업인CEO가 된 제 모습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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