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다. 공부도 봉사 활동도, 단체 생활도…
양구군생활개선회 감사 김옥선(51세) 씨는사고로 한팔을 잃으신 시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거기에 갑자기 찾아온 허리 통증까지 그동안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다.
이제 훌훌 털고 다시 도약하려는 김 씨에게 더 이상 장애물은 없어 보인다.
아마도 내년은 김 씨의 해가 되지 않을까?


어린 신부

어린시절 김 씨의 친정집은 동네의 사랑방이었다. 농한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네 어른들은 김 씨의 집에 모여 담소를 나누곤 했었다. 어른들 중에는 김 씨의 시아버지도 있었다.

“다들 절 예뻐하셨지만 시아버지께서 특히나 더 예뻐하셨어요. 항상 저를 볼때마다 넌 내 며느리라고 못을 밖으셨죠. 아버지도 사위감이 마음에 드셨는지 두분이서 먼저 사돈을 맺어버리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이라고 해야하나요?”

농담 반 진담 반 맺은 혼사는 실제로 이뤄졌고 79년도에 남편 박치노(56세) 씨와 김 씨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스무살이 갓 넘었던 어린 신부 김 씨. 농사짓는 집으로 시집오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법한데도 김 씨는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때부터 나이많은 부모님 밑에서 일을 많이 했어요. 농사일이며 집안일이며, 동생돌보는 일까지… 살림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라 공부도 못하고 일을 했었죠. 그래서 그런지 힘든 일에 대해서 크게 거부감은 안들었어요. 사실 지금까지 농사일이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거든요. 단 한번도 쉬운일 하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안해본 것을 보면 이것도 제 운명이었나봐요.”

멀어져만 가는 꿈

결혼을 하고 김 씨는 오히려 친정에서 지내던 때보다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을 아껴주는 시부모님과 남편, 사랑하는 아이들 덕분에 걱정?근심 없는 나날을 보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그러면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뭔지 모를 아쉬움이 생겼죠. 바로 배움에 대한 갈증이었어요.”

아쉬움의 원인을 알게 되자 김 씨는 마음을 먹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큰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 아이와 함께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리라 다짐했어요. 마음만 먹었는데도 어찌나 설래던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죠.”

하지만 그날은 영영 오지 않을 듯이 멀어져 갔다. 갑자기 시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탈곡을 하던 중 오른 팔이 팔곡기로 빨려들어가는 큰 사고를 당하고 시아버지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시아버지의 농사일을 시어머니가 대신해야만 했어요. 자연스럽게 시아버지 병간호는 제 차지가 됐죠. 처음 중환자실에 계실때는 옆에만 있으면 됐는데 일반 병실로 옮기고 부터는 대소변까지 받아야했어요.”

4달동안 아버지를 돌보며 병간호가 익숙해졌다.
활동적인 성격으로 바깥활동이 잦은 시어머니 대신 시아버지를 간호하겠다고 자청한 김 씨는 시아버지의 수족이 돼 단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꿈은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시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 더 안좋은 일은 없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렇게 활동적이고 건강하던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이었다.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주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그리 되고 나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한꺼번에 이럴수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거동이 가능했던 시아버지마저 또다시 사고를 당하게 됐다.
“팔 한쪽을 쓸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이 많아지죠. 그래서 밖에 나가시게 되면 마음을 졸이게 되는데 결국 일이 터졌어요.”

마을회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김 씨의 시아버지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고 골반뼈 골절이라는 부상을 입었다. 바로 병원에 갔지만 수술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만 돌아왔고 결국 그날로 시아버지는 거동도 못하게 되버렸다.
시부모님 두분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김 씨는 꿈도 희망도 가질 수가 없었다.

“불행은 정말 혼자 오지 않나봐요. 두분이 그렇게 되고 아들마저 교통사고가 나 뇌수술을 받게 됐어요. 봄이라 농사철이 시작돼 그렇지않아도 일이 많은데다 시부모님에 아이 수술에 제가 무슨 정신으로 하루하루 보냈는지도 모르겠더군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상황에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자신에게만 왜 이런일이 생기냐며 원망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한꺼번에 일이 벌어지면서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더 잘해드릴수 있었는데 그렇게 못해드린게 너무 아쉬워요. 그래서 그때 다짐했죠. 제 상황이 좋아지면 시부모님을 대신해 다른 노인분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듯 김 씨에게 시련이 물밀 듯 들어왔다 한꺼번에 쓸려갔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남들이 보기에 드디어 고생 끝일 것 같았지만 김 씨는 기댈 곳이 없어진 것처럼 허전했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잠시도 쉴틈 없이 일하고 사회 활동도 시작 했어요. 15년 넘게 중단했던 생활개선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농업기술센터 교육도 착실히 받기 시작했죠. 교육을 받으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어요.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죠.”

어느날 농업기술센터에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한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마음같지만은 않았다.

“어린시절 잠시 배우긴 했지만 그간 한번도 써보지 못한 영어가 제 발목을 붙잡더군요. 알파벳조차 헷갈리다 보니 수업내용을 따라가기는커녕 자판도 제대로 못쳤어요. 이러면 안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컴퓨터 교육보다 영어교육이 더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파벳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본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 공부하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생각 끝에 김 씨는 군수에게 편지를 써내려갔다.

“임경순 전 양구군수님께 편지를 썼죠. 이렇게 배우고자하는 열정이 있어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으니 기회를 만들어달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막막한 마음에 하소연이라도 할 생각으로 편지를 썼는데 제 편지를 반영해주셨어요.”

김 씨의 편지 한 장으로 야간학교 하나 없던 양구에 영어와 컴퓨터를 가르치는 야간 교육과정이 생겼다. 생각외로 신청자도 많아 그 좁은 양구 안에서만 45명이라는 수강생이 모였다.
두달간의 영어 기초교육과 한달간의 컴퓨터 교육이 실시됐다.

“교육을 받고 마트에 갔는데 샴푸, 린스 같은 단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을 못해요. 군수님께 너무도 감사해 중학교 검정고시 자격증을 따서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쉬워요. 그래도 그 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검정고시는 치룰 꺼예요.”
그날 이후 김 씨의 배움의 열정을 깊어만 갔다.

“작년 농업기술센터에 볼일을 보러갔다가 한국농업대학 입학생 모집요강을 보게 됐어요. 처음에는 웰빙대학이나 친환경대학같은 곳인줄 알고 관심을 가졌는데 정규 대학 코스더군요. 난 안되겠구나란 생각에 조금 좌절했다가 왜 나라고 못갈까 하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그곳에 꼭 가보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올 가을 김 씨는 그동안 고질처럼 앓아오던 척추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수술이라는 것이 조금 두렵고 무섭지만 수술 후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어려운 일들이 많기도 했지만 허리 통증때문에도 못한 일이 많아요. 허리 수술을 받고 나면 중학교 검정고시부터 준비하고 곧바로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볼 예정이예요. 최종 목표는 한국 농업대학이구요. 그 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배우다가 중단한 클래식 기타도 마저 배우고 싶고 봉사활동도 활발히 다니고 싶어요. 빨리 내년이 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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